‘각본 없는 드라마’를 잡아라…OTT ‘스포츠 쟁탈전’의 진짜 속내
치솟는 중계권료 결국 이용자 부담 되나…구독료 기습 인상 가능성 커진다
(시사저널=조유빈 기자)
TV의 시대가 저무는 것일까. 생방송은 TV의 마지막 보루였다. 모두가 스마트폰과 노트북으로 콘텐츠를 감상하는 시대가 왔지만,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스포츠만큼은 안방 TV로 사수해야 한다는 것이 과거 미디어 시장의 공고한 공식이었다. 그러나 이 공식마저 무너졌다. 지상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생중계 영역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다.
드라마와 예능으로 몸집을 키워온 OTT는 이제 라이브 콘텐츠를 통해 이용자를 묶어두는 전략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그 중심에 스포츠가 있다. 프로야구와 해외 축구, 국가대항전 등 스포츠의 주요 장면이 OTT 플랫폼으로 넘어오면서 콘텐츠의 주도권 자체가 OTT로 향하는 모습이다. 이들이 오리지널 콘텐츠와 스트리밍에 집중했던 전략을 뒤엎고, 천문학적인 비용까지 감수하며 스포츠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무엇일까. '각본 없는 드라마'를 잡기 위한 플랫폼 간 전쟁은 이제 스포츠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다음 라운드로 진입했다.
최근 OTT 업계의 가장 큰 화두는 넷플릭스의 행보였다. 넷플릭스가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일본에서 독점 생중계하면서, 그동안 지상파에서 무료로 중계되던 경기를 OTT를 통해서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WBC 경기는 3140만 시청자를 모으며 일본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많이 시청한 프로그램으로 기록됐다. OTT가 스포츠를 잡아야 하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 수치다. 넷플릭스는 2026 시즌 미국프로야구(MLB) 개막전까지 단독 중계했다. 그동안 스포츠 중계에 소극적이었던 넷플릭스가 '빅 이벤트'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스포츠 라이브 전략에 시동을 걸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정주행 후 이탈 차단…'구독 기한' 늘려
OTT 플랫폼들은 스포츠 중계에 통 크게 베팅하고 있다. 한국프로야구(KBO)를 잡은 티빙, 농구·축구·F1 등 콘텐츠 종류를 다양화하고 유료 구독 요금제 '스포츠패스'를 도입한 쿠팡플레이 등 스포츠를 향한 OTT의 행보는 거침없다. 일명 '드라마 공화국'으로 불리던 한국 미디어 시장에서 콘텐츠 스트리밍을 중심으로 덩치를 키워온 OTT가 스포츠 생중계에 사활을 거는 것은 미디어 지형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콘텐츠를 제작하고 스트리밍하는 경쟁을 넘어, 어떤 경기를 얼마나 독점하느냐가 플랫폼 경쟁력으로 부상한 것이다.
스포츠를 좇는 이유는 결국 구독자 유지에 있다. 그동안 OTT 성장의 핵심 요인이었던 오리지널 시리즈는 일명 '정주행'을 마친 이용자들이 플랫폼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반면 스포츠는 시즌이 지속되는 수개월 동안 이용자를 플랫폼에 오랫동안 묶어두는 강력한 '락인(Lock-in)' 효과를 발휘한다. 티빙이 KBO 중계권을 확보한 이후 유료 가입자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야구 시즌 내내 낮은 이탈률을 기록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쿠팡플레이가 축구 중계를 통해 남성 이용자를 대거 유입시킨 것처럼, 특정 타깃층을 공략하는 신규 유입 효과도 탁월하다.
전호겸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구독경제전략연구센터장은 "OTT가 유일하게 할 수 없었던 것이 정해진 시간에 소비자를 앉히는 것이었다. 지상파가 경쟁력을 보였던 분야지만, 스포츠를 잡으면서 그것이 가능해졌다"며 "OTT가 스포츠로 들어가게 되면 메이저 플랫폼은 살아남겠지만 중계권료가 더 비싸지면 결국 자본력을 갖춘 상위 플랫폼 위주로 미디어 시장이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넷플릭스는 궁극적으로 스포츠 분야를 더 넓혀갈 것"이라고 짚었다.

팬덤으로 흥행 보증…광고 수익의 '황금알'
스포츠의 인기는 플랫폼의 수익 구조와도 직결된다. 흥행 여부가 불확실한 신규 콘텐츠에 거액을 베팅하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대신, 확실한 팬덤이 보장된 스포츠 중계로 안정적 시청층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자체 중계 인프라가 부족한 글로벌 OTT들도 스포츠 팬덤을 흡수하기 위해 전략적 제휴에 나서는 추세다. 일본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가 일본 내 MLB 중계권을 보유한 한국 스포티비(SPOTV)와 손잡고 채널을 론칭한 것이 대표적이다.
스포티비는 오타니 쇼헤이의 기록적인 성장과 일본 미디어 시장의 디지털 전환기에 주목해 선제적인 투자를 단행했고, 이는 높은 수준의 수익으로 돌아왔다. 스포티비 관계자는 "콘텐츠 재판매와 D2C(소비자 직접 판매) OTT 서비스 등으로 유의미한 수익이 발생하고 있으며, 일본 내 유튜브 채널 연간 조회 수 1위를 기록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며 "단순히 중계권 재판매를 통한 단기 수익을 넘어, 일본 내 디지털 스포츠 시장 자체의 파이를 키우고 있다는 점이 더 고무적"이라고 설명했다.
스포츠는 광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OTT 플랫폼은 초기 TV 방송과의 차별화를 위해 광고를 배제했으나, 현재는 '광고형 요금제' 등을 도입하며 수익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스포츠는 정해진 시간에 수백만 명의 시청자가 동시 접속하는 유일한 콘텐츠다. 과거 TV 시대의 '프라임 타임' 광고 효과를 OTT가 고스란히 계승한 셈이다. 장시간 시청이 필요하고 건너뛰기가 어려운 스포츠 특성상 광고 노출이 쉽고 몰입도가 높다. 지난달 티빙의 1인당 평균 사용 시간이 382분에 달한 점은 KBO리그 생중계 효과로 해석된다. 실시간 중계 콘텐츠의 높은 광고 단가는 OTT 플랫폼의 수익 구조를 개선할 핵심 열쇠로도 꼽힌다.
시청 패턴의 구조적 변화를 보더라도 OTT가 스포츠를 잡는 이유는 명확해진다. 스포츠 중계를 보기 위해 OTT를 구독하는 이용자의 비중은 2024년 15.4%에서 2025년 24.3%로 높아졌다. 특히 남성은 13.8%포인트 불어난 38.8%를 나타냈고, 여성 역시 6.9%에서 10.4%로 상승했다. 주목할 점은 전 연령대에서의 확산세다. 핵심 시청층인 3040 세대뿐 아니라 5060 세대(20%대), 70세 이상(31.2%)에서도 높은 수치가 나타나는 등 스포츠 시청을 위한 유료 구독이 보편적 미디어 소비 행태로 자리 잡은 것이다. 김인애 한국콘텐츠진흥원 콘텐츠산업정책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KBO 등 국내 프로 스포츠의 인기 상승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프로 스포츠 중계 콘텐츠는 국내 OTT 플랫폼이 충성도 높은 이용자를 확보하고 수익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짚었다.
OTT 플랫폼들의 경쟁이 심화할수록 중계권 비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소비자에게 비용이 전가될 것이란 우려로 이어진다. 대체 채널이 사라진 상황에서 스포츠를 보기 위해서는 인상된 구독료를 감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 연구원은 "스포츠 중계권 확보 경쟁이 심화되면 중계권료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이용자 구독료로 전가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스포츠 중계권 시장의 투명성 제고 및 공정 경쟁 환경 조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스포츠의 '유료화'에 대한 비판도 여전하다. 과거 티빙이 KBO 뉴미디어 중계권을 확보했을 때, 기존에 네이버 등 포털에서 무료로 즐기던 온라인 중계가 유료로 전환된 것에 대한 반발이 컸다. 특히 OTT 환경에 서툰 고령층을 중심으로 접근성 저하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현재 스포츠 중계 유료화가 세계적인 추세라지만, 플랫폼 파편화로 인한 경제적 부담 증가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2024년 한국언론진흥재단 조사 결과, 스포츠 중계 유료화가 정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응답이 85.1%에 달했다. 최근 OTT 플랫폼이 자체 제작 콘텐츠를 늘리고 구독자 이벤트를 강화하는 것은 이 같은 유료 서비스에 대한 저항감을 상쇄하고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일부 플랫폼은 유료 회원이 아니더라도 특정 경기를 시청할 수 있도록 무료 중계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OTT 중계 쏠림 현상이 스포츠 산업 전반의 접근성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구독자 확보를 위해 인기 종목에만 편성이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비주류인 종목들은 대중에게 노출될 기회 자체가 차단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다양한 스포츠를 중계하는 전문 플랫폼의 역할은 남을 것이란 견해도 나온다. 전 센터장은 "인기 종목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면 잠재적 팬덤과의 접점이 사라지면서 일부 종목 시장 자체가 축소될 우려가 있다"며 "과거 컬링 등이 예상치 못한 흥행을 기록한 배경에는 TV 중계를 통한 노출이 있었다. 불특정 다수가 시청하는 방송을 통해 새로운 종목에 입문하고 저변이 확대되던 선순환 구조가 무너질 수 있다"고 짚었다.
안방 내준 지상파, OTT 하청 제작사로 전락하나
과거 스포츠 중계의 절대 권력이었던 지상파 방송사들이 내몰리고 있다. 수십 년간 쌓아온 생중계 노하우와 인프라를 갖추고도 안방 사수조차 버거운 처지다. 국제 경기에서도 마찬가지다. JTBC가 2026∼32년 동·하계 올림픽과 2025∼30년 월드컵 단독 중계권을 확보한 이후, 지상파 3사와의 재판매 협상이 결렬되면서 밀라노 동계올림픽이 지상파로 중계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의 경우에도 KBS만 합의했을 뿐, MBC·SBS와의 협상은 끝내 불발됐다.
이제 중계권 다툼은 방송사 간 경쟁을 넘어 거대 자본을 앞세운 OTT 플랫폼과의 생존 싸움이 될 수 있다. 업계에서는 향후 메이저 스포츠 이벤트 중계권이 OTT로 완전히 넘어갈 가능성까지 제기한다. 글로벌 OTT들이 천문학적 베팅을 시작하면서 중계권 가격은 기존 방송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일례로 WBC 일본 중계권을 확보하기 위해 넷플릭스가 투입한 금액은 이전 대회의 5배 수준인 약 14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설적이게도 지상파의 생중계 역량은 가장 뛰어나다. 수십 대의 카메라를 제어하고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송출 기술은 대체 불가능한 자산이다. 해외에서는 지상파가 OTT의 하청사 역할을 수행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일본 넷플릭스와 지상파 니혼테레비가 맺은 '프로모션 파트너 계약'이 대표적이다. 중계권은 OTT가 쥐고 지상파는 제작 인프라만 제공하는 형태다. 현지에서는 지상파가 글로벌 플랫폼의 '제작 기지'로 전락했다는 뼈아픈 비판도 나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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