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사업에 2억원 날리고, 대치동 아이들 보고 떠올린 반전 아이디어
디지털 참고서 서비스 '쏠브' 개발한 테스트뱅크 최현욱 대표
최근엔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는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다. 태블릿 PC 하나면 수십 또는 수백 권의 책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테스트뱅크 최현욱 대표(37)는 그 모습을 보고 창업 아이템을 찾았다. 편리함에 편리함을 더 얹을 방법을 고민해 디지털 참고서 서비스 ‘쏠브(solve)’를 개발했다. 최 대표를 만나 ‘요즘 공부법’을 들었다.
◇의사 결정권 갖는 법
서강대에서 경영학과 경제학을 복수전공 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회계사 시험 준비가 유행이었다. “남은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자격증이라고 생각했어요. 친구들을 따라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습니다. 합격증이 있으니 대학 졸업장을 받기도 전에 취업할 수 있었어요. 2010년 12월 삼일회계법인 재무 자문본부에 입사했죠.”
전문직이란 기대를 안고 입사했지만 하는 일은 예상과 달랐다. “NPL(부실채권)을 실사하는 일을 맡았는데요. 중요한 업무지만 업무 처리 과정이 단순 작업에 가까웠습니다. 등기부등본을 떼서 그 내용을 엑셀에 채워 넣는 업무가 주를 이뤘죠. 문득 ‘이러다간 내 커리어가 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좀 더 창의성을 발휘하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2013년 4월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M&A(인수합병)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업의 재무 실사를 맡았다. “그 전 직장보다는 규모가 큰 업무를 했습니다. 6조원 규모의 M&A 프로젝트의 회계 자문단으로 일하기도 했죠. 다만 어디까지나 ‘팀원’이라 중요한 의사 결정에 관여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저는 그런 부분에서 동기를 얻는 사람이란 걸 깨달았죠. 연차가 쌓이면서 더 큰 책임을 맡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사모펀드 운용사로 눈을 돌렸죠.”
7년 차 회계사일 때 국내 사모펀드 운용사인 코스톤아시아로 이직했다. 보다 큰 발언권을 얻고 싶어 자리를 옮겼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이를테면 2015년 국내의 한 패션 플랫폼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회사의 투자 방침에 입각한 결정이었지만 좋은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쉬웠죠.”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의사결정권’을 사수할 방법을 궁리했다. “여러 직장을 거치면서 겪은 교훈이 있었습니다. 웬만한 규모를 가진 조직은 조직의 존속을 위해 ‘절차’와 ‘형식’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죠. 모든 단계에서 주도적으로 일하려면 방법은 ‘창업’뿐이었어요. 그렇게 무작정 사직서를 던졌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사업 아이템을 찾아 나섰다. 엑셀만 보던 눈이라 엑셀만 보였다. 계산을 자동화하는 서비스를 고안하다가 ‘아르바이트생 급여 계산 서비스’를 만들기로 했다. 2019년 4월 ‘샐러리’ 법인을 세우고 앱 개발에 뛰어들었다. “엑셀만 할 줄 알았지 개발엔 문외한이었어요. 성인을 대상으로 한 ‘개발 부트캠프’에 참가해 공부했는데 그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지금의 허백 CPO(최고제품책임자)입니다. 또 개발자가 많이 모여있는 성남 분당의 정자동에 장표를 들고 다니며 함께 할 이를 찾았는데요. 그때 만난 이가 김지훈 CTO(최고기술책임자)였죠.”
2020년 알바생 급여 계산기 앱 ‘닥터샐러리’를 출시했다. 스케줄만 입력하면 주휴수당, 4대 보험 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계산해 주는 앱이었다. “이용자 수가 야금야금 늘면서 5만명을 넘어섰습니다. 2021년부터는 알바 매칭 등 점주를 대상으로 한 기능을 확대하려고 시도했지만 여의찮았어요. 결과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데 실패했죠.”
밑 빠진 독에 계속 물을 부을 순 없었다. “그해 여름, 직원과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때 김지훈 CTO가 제 손을 붙잡고 ‘한 번만 더 해보자’고 설득하더군요. 못 이기는 척 그 손을 잡았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 동업자를 찾는 게 쉽지 않은 일일뿐더러, 내심 저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둘만 남았다. 이번엔 진짜 될 만한 아이템을 찾아야 했다. 눈에 불을 켜고 다녔더니 평범한 풍경이 뭔가 달리 보였다. “지하철 분당선을 타고 가는데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수서역에서 우르르 타고, 한티역에서 우르르 내렸어요. 행선지는 대치동의 유명 학원이라 짐작할 수 있었죠. 그런데 학생들이 저마다 태블릿PC를 하나씩 쥐고 있었습니다. 이 풍경을 좀 더 파 봐야겠다 싶었죠.”
다음날 비타500을 사 들고 분당 정자동의 독서실을 찾았다. “학생들에게 음료를 나눠주면서 어떻게 공부하는지 물었더니, 요즘엔 교과서나 문제집을 PDF로 다운받아 본다고 하더군요. 태블릿 PC 하나로 수십 또는 수백 권의 참고서를 담을 수 있었죠. 다만 PDF 파일을 만들기 위해 문제집을 사서 하나하나 스캔해야 하는 방식이 비효율적으로 보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디지털 교재 산업을 조사해 봤더니 이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었어요. 충분히 시장성이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죠.”
◇이토록 감사한 거절
문제집 산업을 빠르게 변화시키려면 B2B(기업 간 거래)로 풀어야 한다고 봤다. “출판사를 고객사로 두고 해당 출판사가 보유한 여러 문제집을 PDF 파일 형태로 판매할 수 있도록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소설책을 e-book으로 판매하는 것처럼요. 매년 교육 과정이 바뀔 때마다 디지털화 작업이 필요할 테니, 정기적인 수익이 보장된 구조라고 생각했죠.”
그러자면 일단 판권을 가진 출판사부터 설득해야 했다. “전 직장 사수가 마침 교재 출판사 ‘미래엔’ 경영진과 연이 닿아 있었어요. 애걸복걸한 끝에 딱 한 번 미팅 기회가 주어졌죠. 이런 사업을 구상하고 있으니 문제집 원문을 제공해달라고 했더니 단칼에 거절하더군요. ‘학생들이 필기는 어디에 할 것인가’, ‘채점은 어떻게 할 것인가’, ‘관련 데이터는 어떻게 수집할 것인가’ 등 질문이 쏟아졌지만 아무 대답도 못 했어요.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죠.”
미팅의 결과를 ‘실패’로만 볼 순 없었다. “디지털 교재에 대한 핵심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한 페이지 안에서 문제집 원문이 보이면서 필기가 가능해야 하고, 클릭 한번에 채점을 할 수 있으며, 채점 후엔 문제와 해설을 동시에 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구상을 할 수 있었죠. 사명을 ‘테스트뱅크(testbank·문제은행)’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디지털 교재라는 아이템에 뛰어들었습니다.”
2021년 8월 중소벤처기업부 주관 ‘대스타 인공지능대회’가 열렸다. 대기업의 고민을 해결할 스타트업을 찾는 대회다. “공교롭게도 문제 해결을 필요로 하는 대기업이 ‘대교’였어요. 참고서 데이터를 OCR(광학문자인식)을 이용해 추출하라는 과제가 주어졌죠. 머신러닝(컴퓨터가 스스로 학습하는 모델)으로 문제집 속 활자를 하나하나 분해해 재조립하는 기술을 개발해 2위를 차지했습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OCR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명확해졌다. “너무 작은 단위까지 쪼개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문제였어요. 고등학교 3학년 수험서로 OCR 기반 채점 시스템을 만든다고 하면 그 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갈 때쯤에야 콘텐츠가 다 만들어지겠다 싶었죠. 문제 단위로 디지털화할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문제집 원문 위에 층을 쌓아가는 방식을 떠올렸다. “문제지를 가장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투명한 레이어를 입혔어요. 투명 레이어엔 ‘①~⑤’번 선택지 부분에만 클릭이 가능하도록 했죠. 제일 위에는 필기할 수 있는 캔버스(canvas) 레이어를 얹었습니다. 3개 적층 구조, 이른바 ‘멀티 인터랙션 레이어(Multi-Interaction Layer)’를 만들었죠. 실제 문제에 적용하기 위해 공개된 자료인 수능 기출문제를 활용해 프로그램을 설계했습니다.”
◇꿩 대신 닭, B2B 대신 B2C
프로그램 개발이 끝났지만 찾아주는 이가 없었다. “유명 문제집을 출간한 출판사에 연락해 봐도 소용없었어요. ‘멀티 인터랙션 레이어’의 작동 방식을 이해시키는 것부터 난제였죠. 출판사의 입장에서 볼 때 소비자인 학생들이 원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 봤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디지털 문제 풀이 앱을 개발해 레퍼런스를 먼저 쌓기로 했죠.”
지난 7월 고등학생을 타깃으로 디지털 문제 풀이 앱 ‘쏠브(solve)’를 정식 출시했다. “지금은 앱스토어에서만 지원하지만 안드로이드 앱도 개발 중입니다. 고등학생들이 가장 많이 보는 참고서 400종의 멀티 레이어를 먼저 제작했어요. 이용자가 본인이 가지고 있는 교재의 PDF파일을 업로드하면 멀티 레이어가 씌워진 교재로 공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책을 직접 스캔해서 디지털 파일로 사용하는 것은 저작권법에 위배되지 않아요. 쏠브가 제공하는 건 정답을 체크하는 투명 레이어와 채점·필기가 가능한 캔버스 레이어일 뿐, 문제집 원문은 학생의 것입니다.”
쏠브에서는 실물 문제집과 유사한 방식으로 디지털 교재를 사용할 수 있다. “하얀 부분에 필기해 가며 문제를 풀고 ‘①~⑤’번 선택지에 체크한 다음, ‘채점’ 버튼을 누르면 순식간에 채점이 끝납니다. 해설집을 일일이 열어볼 필요 없이 문제를 클릭하면 한쪽 귀퉁이에 그 문제의 풀이를 볼 수 있죠. 틀린 문제는 자동으로 정리되니 오답 노트를 따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출판사와의 제휴, 이제 시작이다
앱 출시와 동시에 메가스터디교육과 업무 협약을 맺었다. 메가스터디가 수능 대비를 위해 제작한 퀄(QUEL) 모의고사를 쏠브에서 풀고 채점할 수 있다. 지난 8월엔 은행권청년창업재단(디캠프)이 주관하는 창업경진대회(디데이) 본선 무대에 올랐다. “문제집 한 권에 멀티 레이어 인터렉션을 입히는 데 2시간이면 됩니다. 특정 출판사가 보유한 300권의 책을 한 달 안에 판매 가능한 디지털 교재로 전환할 수 있는 속도죠. B2B의 확장 가능성에서 좋은 평가를 얻은 것 같아요.”
기술은 잘 개발하는 것만큼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B2B 시장에서의 확장을 위해 교과서 전문 출판사 한 곳과 미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치 당장이라도 도장을 찍을 것처럼 말하며 초대하길래 찾아갔더니 강당에 100여 명이 앉아 있었어요. 다짜고짜 기술 시연을 하라고 하더군요. 듣도 보도 못한 기술이니 여러 차례 재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했던 거겠죠. 그런 수모를 겪은 후에 바로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지금까지 멀티 인터랙션 레이어 기술의 핵심 원리를 골자로 하는 총 5건의 특허를 등록했어요.”
메가스터디와의 제휴를 시작으로 국내 참고서 출판사와의 제휴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출판사들과 경쟁을 하려는 의도는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오히려 시장의 크기를 더 키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산업군을 막론하고 디지털화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참고서 시장이라고 예외는 아니죠. 무엇보다 최종 소비자인 학생들이 원하고 있습니다. 저희만의 독자 기술을 바탕으로 디지털 교재 시장의 변화를 이끌고 싶어요."
/이영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