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받는 ‘문화누리 카드’…오죽하면 잔액 소진 이벤트까지

홍정표 2022. 11. 2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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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화재단의 문화누리카드 잔액 소진 이벤트 홍보물

■오죽하면 ‘잔액소진’ 이벤트까지
지역 주민들과 예술가들의 문화예술 활동을 연계하고, 지원해주는 대전문화재단이 최근 내놓은 홍보물입니다. ‘문화누리 카드’ 잔액을 다 쓰고 나면 선착순 2백 명에게는 편의점에서 쓸 수 있는 상품권이 일종의 ‘인센티브(유인책)’로 제공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이렇게 잔액소진 이벤트를 하는 이유, 그럼 잔액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는 얘긴가? 담당자와 통화를 하고 나니, 의문은 금세 풀렸는데요. 올해 대상자에게 지원된 11만 원의 문화누리카드 지원금 가운데 상당액이 아직 쓰이지 않고 있어, 그야말로 잔액 소비 촉진 행사까지 마련하고 나선 겁니다.

■얼마나 안 썼길래?

대전문화재단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4일 기준 이용률은 59.12%. 60%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올해 카드를 발급받았거나 이전에 카드를 발급받아 재충전된 경우를 합쳐 6만 9천 5백여 건으로, 관련 예산만 76억 4천5백만 원가량 됩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40% 가량인 30억 5천8백만 원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인데요. 한 사람당 11만 원의 지원금이 나오니까 얼핏 계산해도 4만 4천 원 가량은 사용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쓰라고 돈을 주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니, 뭔가 이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문화누리 카드

■ 문화누리 카드
‘문화누리 카드’는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을 대상으로 문화예술과, 체육 활동, 국내 여행 등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에서 지원하기 위해 발급하는 카드입니다.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의 복권기금을 재원으로 운영하는 공익사업으로, 2014년부터 시행이 돼 올해로 벌써 9년 차를 맞은 복지 정책입니다. 초기엔 한 가구당 10만 원을 지원하고, 청소년에게는 5만 원을 추가로 지급했습니다. 또 이듬해부터는 혜택을 늘리기 위해 개인별로 지급하기 시작했고, 매년 만 원씩 지원금이 인상돼 올해(2022년)는 11만 원이 지급됐습니다.

한 사람당 11만 원의 지원금.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만 6살 이상에게 지원되다 보니 가족 두세 명이 함께 지원받는다고 하면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지원 취지처럼 가족들이 영화나 스포츠 관람을 하고, 여행을 가는 데도 약간은 보탬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용자들은 사용하지 않아 들고 다니지도 않는다며 반감부터 나타냈습니다.

■“이게 뭔가요?” “다른 카드 없어요?”…카드 사용 자체가 숙제

문화누리 카드 이용자들이 자주 듣는 질문입니다. 일반 카드와 달리 IC칩이 달리지 않은 기프트 카드 형식으로 돼 있어 가맹점에서만 결재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대형 서점 등을 제외하고는 지점 등의 가맹점에서 문화누리 카드를 알아보고 결재에 응해주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용자 스스로 카드의 취지를 설명해 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릅니다. 가뜩이나 예민한 청소년들의 경우 이 카드를 가지고 다니며 영화 한 편 보기도 쉽지 않다는 게 이용자들의 설명인데요. 일반 카드와 형태가 달라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데다 영화관을 가도 매표소에서 영화표 구입만 가능하고, 팝콘 등의 간식은 살 수가 없어 효용이 떨어진다는 설명입니다.


10대 자녀 두 명을 키우고 있는 한부모 가정의 김 모 씨는 올해 자신과 자녀들 몫으로 나온 지원금 33만 원 가운데, 지금까지 5만 원가량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여름 방학에 자녀들과 가까운 바닷가라도 여행을 다녀오는 데 카드를 쓰고 싶었지만, 예약하려고 해도 현장 결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펜션 측 설명에 포기해야 했습니다. 또 렌터카를 이용하고 싶어 알아봤지만, 본사와 달리 지점에서는 문화누리 카드 가맹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 이용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읽고 싶은 책 몇 권을 구입한 것을 빼고는 별달리 사용할 곳이 없어 집안에 카드를 보관 중입니다.

그래도 국가에서 좋은 취지로 지원해주는 돈인데,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해 보는 게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씨는 아이들과 그 지원금 쓰겠다고 무작정 기차 타고 서울이나 부산 왔다 갔다 하느니 그냥 가만있는 게 낫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자신들과 같은 취약계층을 위하는 척, 문화생활 누리게 해주는 것처럼 포장하고 결국 이렇게 쓰지 않는 지원금은 이월도 되지 않고 싹 회수해 간다면서, 줬다 뺐는 기분이라고도 했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전국의 가맹점 수는 2만 6천 6백여 곳입니다. 많아 보일 수도 있지만, 도시와 농촌, 또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고 목적 외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다 보니 사용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예를 들어 공예용품을 구입하는 경우에도 화방은 가맹점으로 돼 있어 가능하지만, 집에서 가까운 문방구는 제외되는 등 가맹점 지정 기준 자체도 애매한 상황입니다.

■‘연말까지 안 쓰면 사라집니다’…지난해 141억 원 국고 반납

다음 달 31일, 즉 올해 12월 31일까지 사용하지 않은 지원금은 모두 국고로 반납됩니다. 지난해에도 전국적으로 141억 원, 전체 사업비의 10%가량이 사용되지 않고 반납됐는데요. 매년 카드 발급률이 100%에 근접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원금의 10%가량이 사용되지 않고 반납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특히 올해는 지원금이 만 원 증액되고, 또 지원 대상까지 늘어났지만, 이용률은 신통치 않습니다. 대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지난 15일 기준으로 이용률이 58.42% 수준인데요. 문화예술위원회와 사업을 주관하는 각 자치단체의 관계 기관에서 카드 발급 기한을 2주가량 늘리고, 잔액 소진 이벤트를 하고 나선 이유입니다. 이런 엇박자를 정부 부처와 자치단체가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매년 반복돼 온 불용액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업을 주관하고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바우처 형태의 다른 공공사업에 비해 이용률이 낮은 편이 아니라며 별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특히 이용자들이 사용하고 남은 소액 잔액을사용하기 위해 추가로 들어가는 교통비나 추가 결제 금액 등의 개인 부담 때문에 잔액을 남기거나, 질병 등의 개인 사정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있어 매년 일정 금액의 불용액은 현실적으로 발생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인데요. 지원금을 유인책 삼아 이용자의 문화 향유를 증대하겠다는 문화누리 카드의 목적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문화누리카드는 ‘문화 격차’를 줄이기 위해 도입된 제도입니다. 도입 목적과 취지를 살려 취약계층 사람들의 삶에 여유를 더하고,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양질의 소비처를 발굴하고, 특성화된 프로그램과 상품이 개발된다면 서둘러 잔액을 쓰라고 독촉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카드를 쓰는 이용자는 자연스럽게 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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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표 기자 (real-eye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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