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⑮루키 김기범 완투쇼+노찬엽 적시타…1989년 청룡, 개막전 6연패 악몽 탈출

『MBC가 새 얼굴들의 활약으로 OB에 5-1로 승리, 6년 묵은 개막전 패배의 징크스에서 벗어났다. MBC는 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OB와의 시즌 개막전에서 국가대표 출신 신인 좌완 김기범이 OB 타선을 산발 4안타 1실점으로 막고 노찬엽과 최훈재 등 두 신인이 좌전 적시타, 우전 적시타를 각각 터뜨리는 등 6회초 연속 4안타를 퍼부어 5득점, 승기를 잡았다.』 <1989년 4월 9일자 스포츠서울>
시간은 바람개비처럼 돌았고, 청룡의 여덟 번째 시즌인 1989년이 찾아왔다. 청룡 시대의 가장자리인 1989년을 추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아마도 개막전 승리일 것이다.
해마다 돌아오는 개막전. 세월이 흐르면서 무수히 쌓이는 승리와 패전들. 그러나 청룡 팬들에게 그해의 시작이 감격스러웠던 것은 ‘개막전 6연패’라는 지긋지긋한 악몽의 사슬을 끊어냈기 때문일 게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5번째 주제는 1980년대의 끝자락이자 MBC 청룡 시대의 마지막 해인 1989년 개막전 승리 이야기다. 이 스토리를 시작하려면 1989년 신인 드래프트 1차지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주사위 던지기로 갈라진 운명…승리한 OB는 이진, 패배한 MBC는 김기범 선택
1988년 11월 3일 KBO 사무실. 서울을 연고로 하는 MBC 청룡과 OB 베어스가 1989년 입단 대상자를 놓고 1차지명 회의를 열었다. 당시엔 팀당 3명씩 1차지명을 할 수 있었다.
1차 동전 던지기에서 OB가 모처럼 승리했다. OB로서는 박노준을 뽑은 1986년 이후 3년 만에 찾아온 선지명 권리였다. 이에 따라 OB는 1번과 4번 지명권을 갖게 됐고, MBC는 2번과 3번을 선택할 수 있었다.
“OB 베어스 지명하겠습니다. 성균관대 투수 이진!”
OB는 1번으로 과감하게 왼손투수 이진(배명고-성균관대)을 뽑았다. OB의 지휘봉을 새롭게 잡은 이광환 신임감독과 경창호 이사, 강남규 스카우트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진은 아마추어 시절 국가대표를 지낸 투수도 아니고 무명에 가까웠던 미완의 대기. 그러나 성균관대 3학년 때부터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더니 4학년 때 5승1패를 기록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투구폼이 다소 거칠어 제구의 기복이 있었지만 좌완으로 구속이 최고 148㎞, 평균 145㎞를 찍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잠재력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MBC 청룡 지명하겠습니다. 한국화장품 투수 김기범!”
MBC가 뒤이어 호명했다. MBC에서는 조광식 단장(상무), 유영수 코치, 김지현 운영부장, 정영수 스카우트가 드래프트 현장에 참석했다. 새롭게 지휘봉을 잡게 될 배성서 감독은 계약(11월 24일)을 하기 전이어서 불참했다. MBC 역시 이진이 탐난 게 사실이이지만, 아마추어 시절의 명성만 놓고 보면 국가대표 김기범(충암고-건국대-한국화장품)을 뽑은 것도 나쁘지 않았다.
MBC는 3번으로 왼손 외야수 최훈재(중앙고-단국대)를 지명했고, OB는 4번으로 사이드암 투수 김동현(배재고-동국대)을 찍었다.
2차 동전 던지기에서도 MBC가 졌다. 우선권을 잡은 OB는 우완투수 김보선(충암고-한양대)을, MBC는 내야수 나웅(선린상고-한양대)을 뽑았다.
OB는 1차지명으로 투수만 3명 선택했고, MBC는 투수 1명과 야수 2명을 지명한 부분이 대조적이었다. 훗날의 결과를 놓고 보면 동전 던지기에서 패한 MBC가 오히려 지명을 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기범은 LG 트윈스 시절까지 10승 투수와 불펜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고, 최훈재는 타격, 나웅은 수비에서 나름대로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 “MBC에 지명돼 다행”…국가대표 일본킬러 김기범 '운명의 청룡행'
김기범이 1989년 신인드래프트를 앞두고 저평가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어릴 때부터 야구를 너무 잘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천 축현국민학교(초등학교) 출신으로 동인천중으로 진학해 3학년 때 서울의 충암중으로 전학했다. 충암고 시절엔 청소년 대표를 지냈고, 건국대 시절엔 국가대표 붙박이 왼손투수로 활약했다.
가장 빛났던 시기는 대학 2학년 때인 1985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제7회 대륙간컵 세계야구대회. 김기범은 이 대회에서만 홀로 4승을 올리며 국가대표 에이스로 각광받았다.
특히 예선 일본전에서 완투를 펼치며 12-2, 8회 콜드게임 승리를 이끌었다. 한국야구가 일본을 콜드게임으로 꺾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김기범은 준결승에서도 일본을 다시 만나 4-3 승리의 선봉장에 섰다.
그러면서 이선희-김기범-구대성-김광현 등으로 이어진 한국야구사의 ‘좌완 일본킬러’ 계보에 이름을 올려 놓았다. 김기범은 이 대회에서 다승투수상은 물론 ‘올스타11’에 좌완투수로 뽑히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었다. 김기범은 대학 2학년 때만 각종 국내대회와 국제대회를 합쳐 무려 27승을 기록했다. 프로야구에서도 한 시즌에 거두기 쉽지 않은 승수를 대학야구 선수가 기록했으니 얼마나 많이 던졌는지 알 수 있다.
거의 모든 경기에 등판했다. 팔이 성할 리 없었다. 대학 3학년 때 왼팔에 반깁스를 했다.
“사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지만 3학년 땐 좀 덜 던지기 위해서 반깁스를 했죠. 그런데 그것 때문에 ‘김기범이 혹사로 팔이 망가졌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 같아요.”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김기범은 기자와 통화에서 대학 시절의 추억을 들려줬다.
실제로 야구계에서는 그 시절의 김기범을 두고 ‘한물간 투수’라고 보는 시선이 꽤 있었다.
88서울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면서 동기인 조계현, 송진우와 함께 프로 진출 유보 선수로 묶이는 바람에 한국화장품에 입단했고, 본의 아니게 1년 늦게 신인 드래프트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순위로 뽑히지도 않았으니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얘기를 했다.
“솔직히 서운하기보다는 MBC 청룡에 지명돼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원조 서울팀인 MBC 청룡을 좋아했거든요. OB는 대전에 있다가 1985년에 서울로 올라왔잖아요. 그리고 MBC가 건대구장에서 훈련을 많이 하고 연습경기도 많이 해 자연스럽게 친근감을 느꼈죠. 다만 프로에 들어가면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는 오기는 생겼어요.”

◆ 스프링캠프에서 일찌감치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된 루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지금부터 올해 개막전 선발로 준비해라.
MBC 청룡의 새 사령탑 배성서 감독(2025년 3월 작고)은 2월에 대만 전지훈련을 가자마자 김기범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이렇게 통보했다.
시범경기 즈음도 아니고, 개막을 거의 두 달이나 남겨둔 시점. 이 시기에 일찌감치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도 프로에서 검증되지 않은 신인 투수에게 말이다.
배성서 감독은 김기범에게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우리(MBC)가 개막전에서만 6연패를 당하고 있다. 특히 OB한테는 지금까지 개막전에서 한 번도 못 이겼다더라. 선배 투수들이 줄줄이 나가봤지만 다 깨졌어. 너밖에 없다. 대신 개막전 선발이 너라는 사실은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김기범은 감독의 당부에 “예,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배 감독은 국가대표 시절 큰 경기에 유난히 강했던 김기범의 어깨를 믿었던 것이다.
김기범은 그때부터 개막전에 베스트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 몸 상태와 피칭 페이스를 120%로 끌어올렸다.

◆김기범 구단 역사상 유일한 개막전 완투승…청룡의 개막전 6연패 악몽 청산
1989년 4월 8일 토요일 오후 2시 잠실구장. MBC와 OB의 개막전이 펼쳐졌다.
이 경기는 한편으론 MBC 청룡 시대의 마지막 개막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공교롭게도 MBC는 배성서, OB는 이광환 감독이 새 사령탑으로 부임해 의욕을 다진 경기였다.
‘잠실 라이벌’이지만 MBC가 원정팀으로 선공을 맡았다. 1989년 양 팀 개막전 선발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OB의 선발투수는 장호연. 1983년 잠실 개막전에서 MBC를 상대로 7-0 완봉승을 거뒀고, 1988년 사직 개막전에서는 롯데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프로 데뷔 후 개막전에서만 4승무패를 기록 중이어서 ‘개막전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투수였다.
그러니까 1989년의 개막전은 충암고 5년 선후배 사이인 장호연과 김기범의 선발 맞대결이기도 했다.

시작부터 양 팀 선발투수들의 역투가 불을 뿜었다. 장호연은 1회초부터 3회초까지 매 이닝 득점권에 주자를 두고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관록의 피칭을 자랑했고, 김기범은 1회말부터 3회말까지 매 이닝 삼자범퇴를 잡아내는 패기의 피칭을 펼쳐나갔다.
김기범이 첫 안타를 내준 건 4회 2사 후. 송재박에게 좌전전안타를 맞았지만 실점하지 않았다.
5회까지 양 팀 모두 숨 막히는 0의 행렬을 이어가고 있었다.
6회초 MBC의 빅이닝이 터졌다. 1사 후 3번타자 김상훈과 4번타자 이광은의 연속 볼넷으로 만든 1·2루. 태평양에서 방출돼 자유계약선수로 MBC 유니폼을 입은 포수 김진우가 "나도 왕년의 국가대표"라고 시위를 하듯 2타점짜리 좌중월 2루타를 날리며 선취점을 뽑았다. MBC는 그 이후 3점을 추가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6회까지 무실점 피칭을 이어가던 김기범은 7회말 1점을 내주고 말았다. 1사 후 양세종의 평범한 땅볼을 잡은 유격수 김재박이 1루에 악송구를 범한 것이 빌미가 됐다. 2사 후 대타 최동창이 우익수 쪽 2루타를 날리면서 스코어는 5-1.
OB에서는 장호연이 '개막전의 사나이'답지 않게 5.1이닝 5실점으로 물러나고, OB 타선이 김기범의 완투에 막히면서 결국 5-1로 패하고 말았다.
OB는 1983년부터 개막전을 치렀는데 5승1무 끝에 처음으로 패했다. 개막전 4연승 무패가도를 달리던 장호연도 1983년 데뷔 후 처음으로 패전투수가 됐다.
김기범은 성공적인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108구로 4안타 3볼넷 4탈삼진 1실점(바자책점) 역투 속에 값진 승리투수 기록을 남겼다. 그것도 완투승이었다.
종전까지 MBC가 개막전에서 승리한 건 이종도의 만루홈런으로 이긴 1982년이 유일한 사례였다. MBC로서는 원년 승리 이후 질기게 따라붙었던 ‘개막전 6연패’의 사슬을 끊어낸 것이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개막전에서만 OB에 4연패를 당한 뒤 처음으로 이긴 것도 MBC에겐 큰 소득이었다.


김기범으로선 완봉승도 올릴 수 있었지만, 천하의 최고 유격수 김재박이 7회말 실책을 범하면서 결국 완투승에 만족해야 했다.
“김재박 선배님이 경기 후에 ‘신인이 데뷔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면 기고만장해질까봐 일부러 에러를 했다’며 웃으셨어요. 사실 제 야구인생에서 아직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경기들이 몇몇 있지만 1989년 개막전 완투승도 있지 못할 경기죠.”


2000년을 끝으로 은퇴한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간 김기범은 현재 샌프란시스코 아래 산호세의 산타클라라 시에 살면서 사업가로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주류 사업을 하면서 소주를 OEM(주문자상표생산) 방식으로 브랜드 런칭하고, 한식당 겸 포장마차인 ‘대박’을 운영하고 있다.
벌써 36년 전의 일. 하지만 어찌 김기범 스스로만 간직하고 있을 추억이겠는가.
“제가 사는 곳이 실리콘밸리 쪽인데 현지 지사에 부임한 기업 임직원들 중에 야구 팬이 꽤 있어요. 손님으로 오셔서 저를 알아보는 분들도 계십니다. 오늘 손님 중에 1989년 개막전 완투승 이야기를 하신 분이 계셨어요. 허허. 저로서는 그걸 기억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맙죠.”
이날의 개막전 승리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MBC 청룡의 개막전 6연패 후 승리라는 점 외에 구단 역사상 최초 개막전 완투승 기록이었다. MBC 청룡과 LG 트윈스로 이어진 구단 역사에서 현재까지 개막전 완투승을 거둔 투수는 김기범이 유일하다.

◆1989년 빛난 샛별 김기범 노찬엽 그리고 최훈재
1989년 개막전에서 빛난 루키는 김기범뿐만 아니었다. 5회초 김진우의 2타점 2루타 이후 타석에 등장한 선수는 루키 노찬엽. 앞선 두 타석에서 범타로 물러난 뒤 세 번째 타석에서 좌전 적시타로 데뷔 첫 안타를 뽑아냈다. 이어 윤덕규의 1타점 우월 3루타 때 노찬엽이 홈을 밟아 MBC는 4-0으로 달아났다.
여기서 또 다른 루키가 등장했다. 8번타자 김상호 타석에 대타로 나선 최훈재가 우전 적시타를 뽑아내면서 5-0 리드를 잡았다.
1988년만 하더라도 팀타율이 0.260으로 7개 구단 중 6위였던 MBC였기에 1989년 개막전 승리에 일조한 신인 노찬엽과 최훈재의 가세는 더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노찬엽은 1987년 신인 드래프트 때 이미 MBC 1차지명을 받은 아마추어 최고 강타자였다. 배재고와 고려대를 졸업했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프로 진출이 강제로 유보됐고, 2년간 실업팀 농협에서 뛰어야만 했다.
노찬엽은 1989년 시즌 초반부터 맹타를 휘둘러 나갔다. 7월 21일 대전 빙그레전에서 5타수 2안타로 타율 0.313을 기록하고 있었다. 특히 7월 이후 3할5푼에 육박하는 고타율로 절정의 타격감을 자랑했다.
그러나 노찬엽은 이날 경기에서 9회초 타격 후 전력질주를 하면서 1루를 잘못 밟는 바람에 발목을 크게 다치는 불운을 겪었다. 8월 13일까지 3주 이상 결장한 부분이 뼈아팠다.
장기간 결장에도 불구하고 8월12일까지 타율 0.313으로 타격 부문에서 빙그레 고원부(0.338)에 이어 2위를 달렸고, 출루율 0.410은 롯데 장효조와 공동 1위. 투수로는 태평양 박정현과 해태 이강철, 타자로는 삼성 강기웅 등과 치열한 신인왕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9월 18일까지 3할대 타율(0.301)을 유지하다 그 이후 타격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첫해 0.287(252타수 101안타)로 시즌을 마감했다.
1989년 신인왕 트로피는 데뷔 2년생으로 19승을 거둔 태평양 잠수함 투수 박정현이 가져갔다.
노찬엽으로선 아쉬움이 남는 첫해였지만, ‘검객’ 같은 날카로운 타격 솜씨로 곧바로 팀 주력타자로 자리 잡았다. 그런 다음 이듬해인 1990년 LG 트윈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KBO 역사에 길이 남을 타격왕 싸움에 뛰어든다.
최훈재 역시 88서울림픽 국가대표 출신이다. 단국대 85학번이어서 프로 진출 유보 없이 졸업반 때 MBC에 입단했다. 2년간 프로 진출이 유보된 노찬엽, 1년간 프로 진출이 유보된 김기범과 함께 1989년 MBC 청룡 입단 동기가 됐다.
최훈재는 첫해 백업요원과 대타로 58경기에 나서며 타율 0.289(152타수 44안타)로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김기범은 국가대표 시절에도 그랬지만 우리에게 ‘빅게임 피처’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1989년 개막전 역시 그 진가가 드러난 게임이었다.
그러나 성급하게 끌어올린 페이스와 개막전의 무리한 완투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시즌 3번째 등판인 4월 18일 사직 롯데전에 선발등판해 아웃카운트 1개만 잡고 자진강판해야만 했다. 견갑골(어깨 뒤쪽 날개뼈) 쪽이 불편했다.
“요즘엔 개막전 선발투수도 점진적으로 페이스를 올리는데 저는 당시 너무나 일찍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 받았기 때문에 과도하게 빨리 몸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저한테 ‘한물갔다’고 말씀하신 분들한테 오기로 뭔가 보여주고 싶었죠. 그러면서 좀 무리를 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 한 달 정도 결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김기범은 4월 18일 롯데전 등판 이후 정확히 한 달 만인 5월 18일 잠실 OB전을 통해 복귀했다. 5이닝 4실점(2자책점)으로 시즌 2승을 수확했다.
그 이후 구원으로 돌아 패전을 기록하기도 했고, 6월 10일 잠실 빙그레전에서 9이닝 2실점(1자책점)으로 완투를 하고도 패전투수가 되기도 했다.
김기범의 그해 성적은 7승8패, 평균자책점 4.69. 초반의 찬란했던 등장과는 달리 부상 여파로 다소 아쉬운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김기범은 LG 트윈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1990년에 한국시리즈 3차전 승리투수가 되는 등 큰 경기에서 진가를 발휘했고, 1991년 12승, 1995년 13승을 거두면서 마운드의 왼쪽 기둥으로 활약하게 된다. 1990년대 후반에는 불펜투수로 전환해 LG 트윈스의 전성기에 불꽃을 함께 태우며 윤활유 같은 역할을 소화하기도 했다.

◆마지막 여정을 향해 달리는 청룡열차
MBC 청룡은 1989년 신인 삼총사의 활약으로 개막전 6연패의 사슬을 끊어낸 뒤 이튿날에도 전년도 신인왕 이용철의 구원 역투(4.1이닝 무실점) 속에 OB를 3-1로 격파하며 2연승을 달렸다.
김기범이 88서울올림픽 대표팀에 묶여 1년 늦게 입단하게 됐지만 김기범과 이용철은 동기. 둘은 개막 이후 이틀 연속 승리투수가 되면서 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MBC 청룡은 신예 좌완과 잠수함 투수의 활약을 엔진 삼아 개막 후 4경기에서 3승1패를 기록하며 초반 선두로 올라섰다.
지나고 보니 1989년은 청룡 시대의 마지막 여정. 청룡은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남기게 된다.
[엘팬알백] ⑯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