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과 감성, 두 가지 결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바네사 커비는 오늘날 블록버스터 영화가 원하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정석이 되었다.

무대 위에서 시작된 꿈
“제 고향은 항상 무대였던 것 같아요. 저는 항상 무대 위에 선 배우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제가 연기를 하고 싶었던 이유였어요.”
세계 최대 규모의 영화 데이터베이스 전문 사이트 IMDB와의 인터뷰에서 바네사 커비가 한 말이다. 눈앞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앉은 관객들을 마주하며 그들과 눈빛으로, 감성으로 소통하는 연극 무대를 언제나 꿈꿨다는 것이다. 웬만한 연기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쉽게 대사를 풀어낼 수 없고, 움직임의 자연스럽고도 극적인 묘사가 불가능한 연극 무대를 통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큰 소망으로 삼아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국 런던 근교 윔블던에서 나고 자란 바네사 커비는 자신이 지나온 연기 인생의 자양분이 될 무대를 20대 초반인 2010년에 만났다. 가족들이 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그와는 훗날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된다)의 가족과 절친한 인연을 쌓은 덕분이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연기를 꿈꾼 그는 브리스틀 올드 빅(Bristol Old Vic)이라는 연극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했지만, 희망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배우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는다. 그러고는 2010년 아서 밀러 원작 [모두가 나의 아들]을 통해 그리도 꿈꾸던 연극 무대에 섰다.
최근 영화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의 주연을 맡으며 이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이자 강렬한 여성 캐릭터로 낯익은 배우 바네사 커비의 연기 이력 초기 모습이다. 바네사 커비는 [모두가 나의 아들]로 호평을 받은 이후 헨리크 입센의 [유령],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등 잇따라 굵직한 연극 무대에 나섰다.
바네사 커비가 연극 무대를 항상 고향이라 생각하고, 자신을 늘 “무대 위에 선 배우”라 여기며 연기를 갈망하던 이유를 바로 거기에서 찾았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리고 연극 무대를 통해 쌓은 탄탄한 연기력이 바로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상업영화의 주역으로 각광받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사실 이처럼 바네사 커비가 자신을 키워준 연극 무대를 벗어나 더 크고 넓은 대중적 인지도를 얻게 된 지는 불과 10년도 되지 않는다. 그만큼 그녀의 뛰어난 연기력이 지금의 성공을 이끌었다는 뜻이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만든 존재감
바네사 커비는 영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을 비롯해 [프렌치 키스],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 등 로맨스 영화 제작 명가로 꼽히는 영국 제작사 ‘워킹 타이틀’ 제작진의 선택을 받았다. 2013년 영화 [어바웃 타임]이 그 무대다.

바네사 커비는 레이철 매캐덤스와 도널 글리슨이 주연한 이 영화에서 극 중 도널 글리슨의 첫사랑 마고 로비의 친구 ‘조안나’ 역으로 등장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캐릭터를 연기한 그는 도널 글리슨이 마고 로비에게 다가서려는 첫사랑의 어설픔에 재미를 더하는 맛깔스러운 연기로 관객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고는 3년 뒤, 바네사 커비는 2016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크라운]을 통해 전 세계 시청자에게 얼굴과 이름을 제대로 알렸다. [더 크라운]은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삶을 그린 드라마다. 2016년 11월 4일 넷플릭스가 시즌 1을 공개한 뒤 2023년 시즌 6까지 선보이며 영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바네사 커비는 [더 크라운] 시즌 1과 시즌 2에 연달아 출연했다. 그는 아버지 조지 6세의 둘째 딸이자 엘리자베스 여왕의 동생 마거릿 공주를 연기했다.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은 물론 작품이 평단과 언론의 호평을 받는 사이 그녀에게도 뜨거운 시선이 쏟아졌다.
바네사 커비는 시즌 1에 등장하는 무겁고 진중한 다른 캐릭터들과는 달리 마거릿 공주의 발랄한 이미지를 내뿜으며 시청자에게 다가섰다.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지나는 영국 왕실의 풍경 속에서 그는 팔색조 같은 캐릭터의 매력을 한껏 발산했다. 시즌 2에서는 시즌 1과는 또 다른 다소 우울한 감정을 연기하면서 그는 마거릿 공주의 복잡미묘한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영화 [어바웃 타임]과 드라마 [더 크라운] 등으로 이어진 스크린과 TV 속 활약에 힘입은 바네사 커비는 더 넓은 무대로 나아갔다.
[더 크라운] 속 마거릿 공주는 바네사 커비의 연기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2018년 영국 아카데미 텔레비전상(BAFTA)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세계 최고 권위 방송상인 미국의 에미상 후보에까지 오른 것이다. [더 크라운]을 통해 그는 뛰어난 연기력을 바탕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했고, 영화계 캐스팅 디렉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클리셰를 깬 ‘화이트 위도우’
바네사 커비는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에서 더욱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전 세계 관객의 환호를 받았다. 실제로 주연 톰 크루즈와 연출자 크리스토퍼 매쿼리 감독은 [더 크라운]에 출연한 바네사 커비를 보고 그를 캐스팅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에서 바네사 커비는 무기 중개상 ‘화이트 위도우’를 연기했다. 테러 조직 신디케이트의 잔당들이 만든 새로운 조직 아포스틀이 훔친 플루토늄을 손에 거머쥔 그는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부터 신비로운 이미지를 뿜어내며 관객의 시선을 빼앗았다.


화이트 위도우는 시리즈 영화의 출발점인 1996년작 [미션 임파서블] 속 무기 밀매상 맥스의 딸이라는 설정이었다. 극중 맥스를 연기한 배우가 바로 앞서 언급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다. 바네사 커비는 어린 시절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가족과 자신의 가족이 절친한 우정을 나눠온 사이여서 또 다른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바네사 커비가 눈길을 끈 배경에는 또 다른 것이 있다. 영화 속 캐릭터로 관능적 매력을 한껏 과시하면서도 바네사 커비는 이전의 숱한 첩보영화가 여성 캐릭터의 성적 이미지에 과도하게 기대는 것은 거부했다. 그는 극 중에서 결코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려 하면서도, 원하는 것은 집요하게 거머쥐려고 하는 야심 찬 인물을 그렸다. 어쩌면 단순히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첩보 액션 시리즈물에 새롭게 등장한 여성 캐릭터를 넘어 그녀만의 색이 강렬한 화이트 위도우라는 캐릭터에 관객은 환호했는지 모른다.
바네사 커비는 말했다. “아주 천천히 변해 갔습니다. 영화는 하나의 기술인 만큼 이제 스크린 연기를 배워야 하고, 연극 무대에 설 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고 느껴요.”
영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거치며 자신의 ‘고향’이자 꿈이었던 연극 무대에서 펼치기 시작한 날개의 크기를 더욱 넓혀 갔다.
인생작이 된 [그녀의 조각들]
바네사 커비는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과 [분노의 질주: 홉스-쇼] 등을 통해 전 세계 스크린에 안착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20년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더 크라운]에 이어 그녀에게 또렷한 변곡점이 되어주었다.
코르넬 문드루초 감독이 연출하고 할리우드의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제작한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가정분만을 고집해 낳은 아이를 영원히 떠나보내면서 송두리째 바뀐 일상을 견뎌내야 하는 엄마 ‘마사’의 이야기를 그렸다. 바네사 커비는 극 중 딸과 이별하는 더없는 고통 속에서 남편(샤이아 라보프)과도 극심한 갈등을 겪는 사이 어느 한 사람, 어디 한곳, 위로해 주고 위로받을 수 없는 세상의 시선에까지 맞서야 하는 인물을 연기했다.

출산의 고통과 아이를 잃은 깊은 상실감 등 바네사 커비의 현실감 넘치는 연기의 압권은 특히 극 초반 30여 분에 달하는 롱테이크(하나의 숏을 끊김 없이 하나의 장면으로 구성하는 기법)를 통해 드러난다. 지독한 진통과 여과 없는 사실적 장면 등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완벽에 가깝게 보여주었다. 보는 이들의 시선을 압도하는 롱테이크 시퀀스는 이후 마사의 고통스러운 일상을 받아들이게 하는 바탕이 된다.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려는 끈질긴 노력 속에서 마사는 사과를 먹고 남은 씨앗을 발아시켜 나무로 키워 내려고 한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된 뒤 마사는 다시 사과를 따 먹는데, 막 세상에 나온 아기의 몸에서 난 사과 향기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사과를 통해 현실과 삶의 아픔, 비극을 끈질기게 이겨내려는 마사. 바네사 커비는 극단적 고통과 상실감을 극복하려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아나서는 마사를 그야말로 온몸으로 표현했다.
이 같은 노력은 곧 성과로 이어졌다. 2020년 열린 제7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바네사 커비는 볼피컵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조각들]이 최고 영예인 작품상 후보로 강력히 거론된 데에도 그의 역할이 컸다는 점은 당시 평단도 인정한다.

같은 해 관객에게 선보인 [다가올 세상]과 2022년 [더 썬] 등도 [그녀의 조각들]과 비슷한 이미지로 바네사 커비가 나선 무대로 꼽힌다.
[다가올 세상]에서 바네사 커비는 19세기 중반, 미국 북동부의 한 외딴 마을을 배경으로 미묘한 애정의 감정에 사로잡히는 여성을 연기했다. 이미 결혼했지만 외로운 일상에 놓인 그녀는 상대역 캐서린 워터스턴과 함께 캐릭터의 내밀한 감성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연기로 호평 받았다. 성공한 변호사(휴 잭맨)와 이혼한 아내로 질풍노도의 시기에 놓인 아들과 겪어가야 하는 심란한 일상을 그린 [더 썬]으로 바네사 커비는 다시 한번 베니스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새로운 블록버스터 히어로로 돌아오다
바네사 커비는 이제 새로운 블록버스터로 다시 관객을 만난다. 7월 24일 한국에서도 개봉한 [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이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물을 대표하는 스튜디오 마블이 처음 내세우는 슈퍼히어로 가족을 이루며 ‘인비저블 우먼’인 ‘수잔 스톰’ 역으로 관객 앞에 나선다. 영화 [원더우먼 1984]와 최근작 [글래디에이터Ⅱ],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나르코스] 등으로 낯익은 배우 페드로 파스칼과 극 중 부부로 호흡을 맞췄다.

그녀는 최근 영국 런던 등에서 영화 홍보 프로모션을 위해 나선 시사회 레드카펫에서 임신한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 또 한 번 눈길을 끌었다. [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 속 동료들에게 임신한 사실을 전하는 설정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어서 더욱 눈길이 갔다.
하지만 바네사 커비가 시선을 끈 데는 정작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그녀는 미국 영화 전문지 <버라이어티>를 통해 “[더 크라운]의 마거릿 공주 역할이 ‘정말 많은 것을 주었다’면서 ‘그토록 다채롭고 생생한 감정과 깊이를 지닌 사람을 연기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영화 속 마거릿 공주가 자신에게 “기준을 제시했다”라고 말하며, 덧붙여 “내가 아는 여성들을 섬세하게 연기하면서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라는 희망을 드러냈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통해 표현한 여성 캐릭터, 나아가 이후 자신이 연기하는 모든 캐릭터를 맞아들이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바네사 커비는 말과 행동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ㅣ 덴 매거진 2025년 8월호
글 윤여수(맥스무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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