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에 머무른 기억, 또 다른 여객기 참사 유가족을 만나다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2025. 1. 2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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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승 인원 269명 전원이 실종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은 국적기 사고 가운데 최악의 참사로 기록됐다. 스위스에 살고 있는 유가족으로부터 사고 당시 상황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들었다.
1991년 4월19일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유족회 회원들이 사건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하며 고르바초프의 초상화에 계란을 던지는 시위를 벌였다.ⓒ연합뉴스

1983년 9월1일 새벽,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을 출발해 한국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이 기존 항로를 벗어나 옛 소련 영공에 진입했다. 여객기는 사할린 인근 모네론섬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바다로 추락했다. 한국인 105명을 포함해 탑승 인원 269명 전원이 실종된, 국적기 사고 중 지금까지 최다 사망자 기록을 유지하고 있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다. 희생자 중에는 미국 출장을 다녀오던 대우전자 부장 박일청씨(당시 39세)가 있었다. 교사이던 아내와 여덟 살, 일곱 살짜리 아들, 그리고 돌이 채 되지 않은 막내딸을 남겨둔 채였다. 아빠에 대한 기억조차 없지만 그 부재의 이유에 늘 의문을 품고 자란 막내딸 박수경씨(42)는 현재 스위스에서 마취과 의사로 일한다. 한국에서 제주항공 참사로 179명이 사망한 날로부터 일주일 뒤인 1월4일 토요일 아침, 취리히 남부 추크(Zug)에 있는 수경씨의 집을 찾았다. 딸의 육아를 도와주러 와 있던 어머니 여 아무개씨(74)와 수경씨로부터 40여 년 전 사고와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들었다.

출장 떠나는 날, 박일청씨는 집에서 이상하리만치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운전기사가 가야 할 시간이라고 재촉할 정도였다. “남편이 유난히 그 출장을 가기 싫어했어요”라고 여씨는 기억했다. 남편을 공항에 데려다줬던 운전기사가 저녁에 다시 집에 들렀다. 그의 오래된 서류 가방을 들고서였다. 가는 길에 가방 고리가 떨어져나가 가방을 새로 샀다고 했다. 여씨가 말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지금 그날을 돌이켜보면 왜 유난히 샤워가 길었는지, 멀쩡하던 가방 고리는 왜 떨어졌는지, 그것들이 다가올 일을 가리키는 조짐이 아니었나 곱씹게 되네요.”

남편이 출장을 떠난 지 일주일째 되던 9월1일이었다. 여씨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뉴스 방송이 나왔다. 뉴욕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이었다. 학교의 다른 교사 하나가 통곡을 했다. 장교로 근무하는 남편이 그 비행기에 탔다는 거였다. 여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남편 박씨는 그다음 날인 9월2일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속보로 전해지는 탑승객 명단에 남편과 같은 이름이 있기는 했으나 ‘박’이라는 성이 원래 쓰는 ‘Park’이 아니라 ‘Bahk’으로 표기되어 있어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다. 상황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탑승객에 남편이 포함되어 있다는 연락이 왔다. 엉엉 울던 동료 교사의 남편은 계획이 바뀌어 그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았다. 

학교 교감이 “여 선생 좀 누가 집에 데려다주라”고 해서 집으로 갔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같이 사는 시어머니가 펄쩍펄쩍 뛰면서 내 아들 어쩌냐고 울부짖었다. 그 모습을 보며 ‘왜 저러실까, 부끄럽게···’ 싶었다. 여씨는 남편은 죽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벌써 장례 절차를 얘기하고 있었다. 비현실적이었다. 남편 회사에서 사람들이 왔다. 한 공장장이 여씨에게 “비행기가 사할린 어디 착륙을 해서 탑승객들이 살아남았다고 하니 걱정 말라”고 말했다. 혼란스러웠다. 시신이나 유류품은 발견되지 않았고, 남편이 사망했다며 회사에서는 “대단한 회사장”을 치러주려 하는데, 또 누구는 생존설을 전하니 여씨는 어안이 벙벙했다. “멍하게 며칠을 보낸 뒤 결심했지요. 기다리겠다고. 당시 주변에 남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을 나가 10년씩 귀국하지 않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나도 그런 처지라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사우디 간 셈치고 10년 기다려보겠다고. 남편이 가진 기술이 훌륭하니 소련에서 남편을 잡아두고 그 기술을 쓰고 있지 않을까 상상도 했지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돌아올 수도 있을 거라고. 그해에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어요. 늘 창문을 열어두고 혹시 이 사람이 비 내리는데 집에 오나 싶어 내다보곤 했죠.”

유가족 괴롭힌 음모론과 루머

세 아이에게는 몇 년 동안 ‘아빠가 미국에 출장 가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은 주말이면 늘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다니곤 했다. 남편이 사라진 뒤 여씨는 휴일이 두려워졌다. “젊어서 혼자 되었다는 생각이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어요. 아빠 없는 애들을 데리고 놀러 다니기가 부끄럽더라고요. ‘빨간날’에 비가 내리면 좋았어요. 안 나갈 핑계가 생겼으니까.” 너무나 사랑하는, 자랑스러운 남편이었기 때문에 사라진 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서울공대 기계공학과를 나와서 정부 지원으로 미국 연수도 다녀왔던 사람이에요. 냉장고 컴프레서를 처음 국산화시켰지요. 외아들이었던 그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낳고 행복했어요. 그때 내 삶은 구름 위에 붕 뜬 것 같았어요. 그럴 때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한번은 큰아이가 학교 소풍에 아빠와 듣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가져갔다. 여씨는 그 사실을 알고 한 번도 들지 않았던 매를 들었다. 꾸중을 하다 집을 나가라는 말도 했다. “아이가 동생들에게 가더니 ‘형아가 집 나가서 연탄을 끌어서 돈 벌어올게’ 그러더라고요. 나한테 아빠 얘기는 한 번도 묻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자기가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는 억압을 느꼈나봐요. 잘은 몰라도 큰아이가 그 사고의 가장 큰 희생양이 아니었을까요.” 그다음부턴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았다는, 40년 전 기억을 떠올리는 여씨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연탄을 끌겠다던 큰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 가족 사항을 써 내야 했을 때, 여씨는 ‘아버지 직업’ 난에 남편이 살아 있었다면 맡았을 법한 직함인 ‘대우전자 이사’라고 썼다. 부재의 그림자는 길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그의 존재는 유령처럼 가족 사이를 배회했다. 가족 아무도 그의 소식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금기를 깬 건 아빠에 대한 기억조차 없던 수경씨였다. 여씨가 말했다. “수경이가 네 살쯤 됐을 때 그러더라고요. ‘엄마,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미국에 있는 아빠한테 전화를 해보면 어때?’라고요. 얼버무리며 넘겼어요. 도피였죠. 아빠가 세상에 없다고 말을 했어야 하는데, 내가 강하지 못했어요.” 여씨가 기다림을 그만둔 건 10년도 훌쩍 지나 아이들이 다 자란 다음이었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필요한 시간이 전부 지나버린 뒤 더 이상 이건 아니라고,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결심했어요.”

고 박일청씨는 사고 당시 39세였다.. ⓒ유가족 제공

여씨가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 데에는, 잊을 만하면 독버섯처럼 솟아나는 음모론 탓도 있었다. 사할린 착륙 생존설, 조종사 미국 스파이설 등 사고를 둘러싸고 나오는 루머들이 끊임없이 떠돌았다. 음모론은 합리적 설명의 빈틈에 뿌리를 내렸다.

정부가 어떻게 해서든 몇 안 되는 유류품이라도 수거해 남은 가족에게 전달했더라면, 부족한 증거로나마 사건의 전후 상황을 파악해보려 적극적으로 노력했더라면 그토록 오래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씨는 “사건 보도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나왔다”라며 아쉬워했다. 몇 년 뒤 현장에서 발견된 유류품을 모은 전시가 열린 곳도 일본이었다. 당시 그 전시에 갔던 여씨는 물품들의 상태가 비교적 온전한 것을 보고 더 답답해졌다. “정부에서는 비행기가 산산조각이 나서 시신이건 유류품이건 아무것도 못 찾는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뒤축만 좀 타고 멀쩡한 신발, 온전한 바지 같은 것들이 발견됐으니 이상한 거죠. 심지어 탑승객 중 한 수산대 교수가 갖고 있던 논문도 젖지 않은 상태로 나왔어요. 그러면 사람이 생존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요. 희망 고문이었어요. 그래서 우리(유가족)가 러시아 대사관 앞에 가서 해명을 하라고 데모도 한 거예요.”

시위는 소득이 없었고, 냉전이라는 시대 상황은 민감한 정보를 미국과 소련이 독점할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거죠.” 여씨가 쓴웃음을 지었다. 더구나 사건 약 한 달 후인 1983년 10월9일에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미얀마 양곤에 위치한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해외 순방 중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겨냥해 북한이 시행한 폭탄 테러 공격)이 터지면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은 급격히 언론과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정년까지 과학 교사를 하며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늘 말했어요. 과학기술이 국가 부강의 척도라고, 과학 공부 열심히 해서 노벨상 받으라고. 그래야 나라에 힘이 생긴다고요.” 소련에 책임을 묻고 제대로 조사를 할 만큼 한국이 강했다면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이 조금을 덜했으리라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여씨의 안타까움이다. 듣고 있던 수경씨가 “힘도 있어야겠지만 용기도 필요한 일이지요”라며 말을 이었다. “당시 강대국인 소련에 맞서 적극적으로 사건 조사를 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했겠죠. 전두환 전 대통령은 희생당한 국민 입장에 서기보다는 사태가 얼른 잠잠해지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상처 아물 수 있도록 함께 기억해달라”

세상은 빠르게 변했고, 상처 입은 가족은 뒤에 남겨졌다. 여씨와 함께 살던 시어머니는 말년에 뇌출혈을 앓았는데, 의사가 인지력 테스트를 위해 지금이 몇 년도냐 물으면 줄곧 ‘1983년’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마음의 시간이 멈춰버린 할머니, 현실을 부인하려 했던 어머니의 상처를 보고 자란 수경씨는 ‘기억’을 강조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계속 듣고 알리는 일을 하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러워요. 아픈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해 함께 기억하는 게 중요하죠. 저는 1983년 사건이 꾸준히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는 걸 보면서 힘을 얻어요. 하다못해 이 사건을 다룬 TV 프로그램에서 패널들이 ‘아이고’ 하며 탄식하는 것까지도 위로가 돼요. 얼마 전 제주항공 참사로 많은 분들이 또 큰 상처를 입었는데,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시민사회 전체가 그 일을 함께 기억하고 위로해야 해요.”

1983년 김포공항 임시보관소에 모아놓은 사고 당시 대한항공 여객기 잔해들.

수경씨는 가끔 아무도 속 시원히 설명해주지 않은 이 사건의 결말을 상상하곤 한다. 일종의 판타지다. 이야기에는 여러 버전이 있다. 한 시나리오에서는 비행기가 사할린 땅에 비상 착륙한다. 탑승객들이 모두 소련 군인들에게 끌려가 신원조회를 받은 뒤 수용소로 이송된다. 극적으로 수용소를 탈출한 아버지는 갖은 고초를 겪으며 시베리아 벌판을 건너고, 결국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온다. 공항에는 아버지의 귀환을 환영하는 국민과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시나리오에서는 아버지가 살아남긴 했지만 소련 군인들로부터 온갖 생체실험을 당한 뒤 한국에서의 기억을 잃는다. 아버지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일부러 소련 사회에 더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새 삶에 적응하는 버전도 있고, 비행기 추락과 동시에 아버지가 사망하는 버전도 있다. “해피엔딩 드라마처럼 가족이 다시 재회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을 하다가도, (나쁜 버전 시나리오에서) 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을 떠올리면 차라리 현장에서 돌아가신 게 낫겠다 싶기도 하죠.” 40여 년이 흘렀지만, 참사와 이후 국가의 미흡한 대처로 인한 유가족의 상처는 여전하다.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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