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무중 ‘바위 각자(刻字) 3곳’ 그 글씨 주인공은?①

경북도민일보 2025. 8. 1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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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유향토사 연구가

백두대간 중심에 자리 잡은 문경은 예로부터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100대 명산 중 전국에서 가장 많은 4개의 명산을 품고 있고 산자수명하여 조선의 선비들이 관직과 부와 명예를 탐하지 않고 무위자연의 삶을 살면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심성을 수양하며 성리학을 구현했던 공간인 구곡원림 또한 13개소로 전국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이런 소중한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는 우리 문경 땅에는 곳곳에 선인들의 삶과 생활 속에서 남긴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 아주 긴 역사를 품고 있는 옛길이나 전통 사찰, 구곡원림 등 유적지마다 골짜기마다 다양한 글씨체와 수준 높은 필치로 바위에 새겨진 글자들이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최근까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선유구곡, 봉암사 등 명소에 새겨진 글자의 주인공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아쉬움이 컸었다. 관광객이 찾아와도 학생들이 탐방을 와도 지도하는 분이나 안내 해설하는 분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니, 임기응변식으로 전부터 향토 사료나 지역 선배들이 막연히 추정했던 그대로 '신라 시대 고운 최치원이 여기 와서 남긴 글씨라고 한다.'라는 등으로 두루뭉술 말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유적, 유물에 대해서는 근거가 되는 문헌으로 증명하거나 정확한 글자 판독으로 규명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왜곡이고 허상일 뿐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우리 문경에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각자인 선유구곡의 학천정 옆에 새겨져 있는'산고수장(山高水長)'과 봉암사 계곡 양산동천의 '백운대(白雲臺)' 그리고 구곡원림의 백미인 '선유구곡 곡마다 새겨진 각자'를 쓴 주인공 누구일까? 그래서 이미 일부 알려진 부분도 있지만, 다시 3곳의 각자 주인공과 근거 문헌이나 판독 결과가 무엇이고, 이 문헌을 찾아내거나 판독하여 밝히신 분은 누구인지 차례로 기술하고 정리하여 모든 사람과 공유하고자 한다.

첫째, 학천정 옆 바위에 새겨진'산고수장(山高水長)' 4자의 큰 글자 옆에 작은 글로 '尗侄東寧君 以景慕之忱 諒刻此四字 乃丙熙敬書'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 글은 결과적으로 '산고수장'이란 글씨를 새긴 사람을 명시하는 것인데 탁본도 어렵고 희미해진 글씨로 인해 판독이 어려워 미궁에 빠졌었는데 마침내 누가 쓴 글인가에 종지부를 찍은 분은 박열의사기념관 운영위원장이며 ㈜예문관 박성진 대표의 노력으로 이룩한 성과이고 문경인 모두가 가진 오래된 숙제를 풀어주었다.

뜻풀이하면 '숙질인 동영군이 도암 이재 선조에 대한 경모하는 마음이 깊어 山高水長 이 네 글자를 새기자는 뜻을 청하고 고집하는지라 이에 병희가 공경의 마음을 담아 글씨를 썼다.'라고 되어있다. 다시 말하지만, 산고수장이란 '산처럼 높고 물처럼 장구하다는 뜻으로 인자나 군자의 덕행이 높고 한없이 오래 전한다.'라는 말로서 선조인 도암(陶菴) 이재(李縡) 선생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이로써 '산고수장'이란 글씨를 쓴 주인공은 우봉이씨 이병희(李丙熙)라는 결론이 난 것이다. 이병희는 역사학자 이병도의 형으로 당대의 명필로 통하던 이완용의 서체까지 빼닮았다고 할 정도로 명필가였다고 한다.

둘째, 봉암사 계곡 양산동천의 석각(石刻) '백운대(白雲臺)' 역시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이 쓴 글씨라고 전해 왔는데, 고운이 아니라 '白雲臺'라는 이름을 짓고 글씨를 새긴 분이 밝혀졌다. 이 또한 출처를 밝혀낸 분이 ㈜예문관 박성진 대표이시다. 대표께서 보내주신 '백운대 단상/ 박성진'이란 자료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요 부분 발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운대 이름을 짓고 암각을 남긴 이는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1469년~1502년)이다. 라고 하며 그 근거로 조선 후기 학자인 호고와(好古窩) 유휘문(柳徽文-1773~1832)의 호고와문집 권지일(卷之一)에 '白雲臺是鄭虛菴命名'(백운대시정허암명명)와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의 訥齋先生集 卷第五(눌재선생집 권제5)에 七言律詩(칠언율시)를 지으면서 鄭虛菴希良 登白雲有詩故云(정허암희량 등백운유시고운)이란 글도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 전기의 학자, 주세붕 선생의 시문집인 무릉잡고(武陵雜稿) 권지4 별집(卷之四 別集)에도 '虛庵名曰白雲臺(허암명왈백운대)'이란 기록을 제시하였다.

혹자는 위 문헌상 허암이 글씨를 새겼다. 라고 하는 분명한 글이 없지 않으냐? 하겠지만, 그 당시 선비들이 명승지를 유람하거나 은거하게 되면 통상적으로 자기가 여기에 머물렀다는 흔적을 남기에 되는데 그것이 그 명소의 특성이나 자기의 생각 또는 철학을 담아 이름을 짓고 시문을 남겼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허암이 여기에 와서 백운대라고 명명하였고, 시문을 남겼다.라고 후학들이 자기 시에 언급하였고 백운대는 허암의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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