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에 소외된 노년층, 실버영화관 몰린다

최효정 기자 2023. 6. 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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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관객 수 회복...日 500여명
키오스크 없고 자막 1.5배...팝콘 대신 가래떡
노 시니어존까지 등장한 시대
재정난으로 미래 불투명한 노년층의 “삶의 낙”
“이 영화 재밌어요?”
“어제 많이들 보러 오셨어. 오늘 또 보러 오신다는 거 보니 영화가 재밌는가 봐요.”

7일 오전 10시, 서울시 종로구 낙원악기상가 4층에 위치한 ‘실버영화관’. 매표소 앞에서 굽은 허리로 지팡이를 짚은 80대 노인과 창구에 앉은 50대 직원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30분 뒤 상영되는 영화는 1955년에 공개된 영화 ‘불타는 전장’. 마이클 케인과 클리프 로버트슨 주연의 액션 영화다. 일주일 만에 관객 수 600만명을 돌파한 한국 영화 ‘범죄도시’ 같은 최신작은 이곳에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상영관 안은 들뜬 표정으로 영화 시작을 기다리는 노인들로 북적였다.

실버영화관은 지난 1969년 문을 연 허리우드 극장이 모태다. 2009년 ‘추억을 파는 극장’이란 회사가 인수해 실버영화관으로 다시 개관했다. 이곳에선 CGV, 메가박스 같은 대형 영화관에서 상영하지 않는 남태평양 목선작전(1960년 작품), 성춘향(1987년) 등 국내외 고전영화를 튼다. 연령 제한은 없지만 하루 평균 찾아오는 관객 500여명 대다수가 60대 이상이다. 55세 이상 고령층과 동반인은 관람료가 2000원이라는 장점 덕분이다. 일반 극장의 조조 영화 티켓 가격(1만원)의 5분의1이다.

이곳을 노인 친화적인 극장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노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상영작과 가격 정책 때문만은 아니다. 요즘 어딜가나 볼 수 있는 키오스크(무인 발매기) 대신 매표소 직원이 손님을 맞고, 자막은 일반 상영관의 1.5배 크기다. 최근 고령층이 이용하기 어려운 키오스크와 영어 메뉴판을 도입하는 상업시설이 늘어나고 일부 자영업자는 카페 앞에 ‘노 시니어존(No senior zone·고령층 입장을 받지 않겠다는 뜻)’ 팻말을 써붙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마치 홀대 받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실버영화관은 고령층 고객에게 영화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거주하는 김송주(85)씨는 “아침 일찍부터 영화 보려고 여기 오고 영화를 보다가 편하게 잠들기도 한다”며 “근처에 밥 먹을 데도 많아서 하루종일 여기 있다가 집에 가는 게 낙”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거주하는 김신일(78)씨는 “갈 데가 마땅치 않으니까 시간 보내러 오는 거다”라며 “2000원에 고전 영화를 주로 틀어주니까 예전에 봤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실버영화관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급증할 때마다 운영을 중단했다가 다시 열기를 반복해, 영업 못 한 날이 6개월에 달한다. 2021년 2월부터는 전면 재개관 했지만 하루 관객 수가 코로나 전 1000여명에서 100명도 안 되는 수준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작년 말부터 떠났던 관객들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7일 오전 10시쯤 영화를 관람하러 온 노인들이 서울 종로 실버영화관 매표소 앞에 줄 서 있다./소가윤 기자

◇ 실버영화관에만 있는 3가지...대면 티켓팅·큰 자막·다방커피

돌아온 단골 고객들은 무엇보다 ‘100% 대면 티켓팅’ 문화를 가장 반가워한다. 경기도 안양에서 지하철을 타고 온 전순주(83)씨는 “다른 영화관에는 젊은 사람들이 가니까 노인네가 가기 창피한데 여기는 노인들밖에 없어서 편하다”며 “여기 있는 기계는 200원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가 전부인데, 키오스크는 영어도 모르는 데다 눌러야 하는 게 많아 어렵고 좀 무섭다”고 말했다.

매일 오전 일산에서 출발해 극장을 찾는다는 이영표(87)씨는 “노인들은 머리가 빨리 안 돌아가서 키오스크를 쓰기가 어렵다”며 “기계 앞에 줄이 있으면 빨리 못 누를까봐 걱정하게 된다”고 말했다.

일반 영화관보다 1.5배 큰 자막과 특별한 매점 메뉴도 고령층 고객의 사랑을 받는다. 매점에서는 팝콘 대신 다방커피와 미숫가루, 국화차, 가래떡구이, 잔치국수 등을 2000~3000원에 판매한다. 고객 맞춤형 영화 상영도 해준다. 15년 넘게 영사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경재(74)씨는 “원하는 영화를 노인들이 종이에 써서 신청하면 회사에서 필름을 구해서 상영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관객뿐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도 50대 이상이다. 영화관을 운영하는 추억을 파는 극장 관계자는 “노인들을 위한 영화관인 만큼 고객들은 젊은 사람들보다 고령층이 더 편하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고 일자리 창출 면에서도 고령층 고용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들 사이에선 명소로 자리잡은 지 오래지만, 언제까지 정상 운영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저렴한 영화 관람료 때문에 수익을 남기기 어려운 구조인데 지자체나 정부로부터 지원이 끊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운영사인 추억을 파는 극장은 지난 2009년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돼 고용노동부로부터 지원을 받았지만 최장 10년까지만 지원이 가능해 기간 만료로 지원이 끊겼다. 지난 2015년 서울시에서도 사회적경제우수기업으로 선정해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보조금을 지원했지만 이 역시 중단된 상태다.

실버영화관 관계자는 “관람료를 2000원씩 받고 있으니 실수익이 나기 어렵다”면서 “개인 재산까지 처분해 영화관 운영을 지속하려는 사람들의 의지로 운영이 지속되고 있지만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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