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발'은 명함도 못 내민 국산 최강 고급 미니밴

조회 50,1312025. 3. 14.

트라제 XG는 그랜저 XG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 만큼 파워트레인 역시 다양하게 제공됐습니다. 고급스러운 승차감에 최적화된 V6 2.7L LPG와 가솔린, 가격 접근성을 높인 4기통 2.0L 가솔린을 먼저 선보였고 이듬해 신형 SUV 산타페와 공유와는 2.0L 디젤 엔진을 추가하는 등 유종과 배기량을 갖가지로 구성해 운행 환경과 목적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했어요.

변속기는 5단 수동 및 4단 자동을 제공, 애초부터 고급차로 설계된 그랜저 XG와 플랫폼을 공용하는 데다 앞바퀴는 플래그십 에쿠스에 사용하는 서스펜션을 적용하면서 웬만한 세단 못지않은 승차감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에 경쟁차 카니발보다 더 컴팩트한 차체에 더 여유로운 6기통 2.7L 파워트레인을 얹어 쾌적한 주행감과 뛰어난 정숙성을 제공했어요. 가스차를 잠깐 얻어 탈 기회가 있었는데 디젤 SUV를 타다 옮겨 타니 시동이 걸려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했던 기억이 나네요.

다만 연비가 문제였습니다. 2.7L 델타 엔진은 그랜저에서도 연비가 나쁘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더 크고 무거운 이 차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었죠. 그나마 2.7은 힘이라도 좋았지만 2.0 가솔린은 온 가족을 태우고 언덕으로 올라갈 때는 반드시 에어컨을 꺼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LPG는 충전도 문제였습니다. 완충 시 주행거리가 전기차 수준인데, 이 시기는 지금처럼 LPG 충전소가 많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너도나도 내비게이션을 갖고 있던 때도 아니어서 일일이 지도나 주소지를 보고 찾아다녀야 했으니까요. 어렵게 찾은 충전소가 문이라도 닫혀 있으면 정말 낭패였죠. 따라서 충전과 유지비에서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디젤 파워트레인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는 경쟁차였던 카니발도 마찬가지였어요.

이후에는 매년 소소한 마이너 체인지를 통해 내/외관을 업데이트하고 상품성을 개선했습니다. 2001년에는 그릴과 휠 디자인, 범퍼와 차체 하단을 투톤 처리하는 등 일부 디테일을 변경해 신선함을 더했고 전용 엠블럼을 부착해 고급감을 높였습니다.

다만 해가 갈수록 SUV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면서 수익성 면에서 이 차를 미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는지 판매량이 저조한 고배기량 가솔린, LPG 엔진이 순차적으로 빠졌고 은근슬쩍 디젤 엔진을 주력으로 한 가성비 미니밴으로 포지셔닝을 변경했습니다.

이후 2003년형 모델부터는 고급형 모델에 한해 개선형 VGT 디젤 엔진을 추가해 더 나은 출력과 효율을 제공했고 이외에도 새로운 디자인의 휠, 9인승의 시트 배치를 수정해 3열 승객의 승/하차 편의성을 높였어요. 2열 오른쪽 의자가 봉고차처럼 접힌다면 2003년식 이후 모델입니다.

3열 시트는 종전 그대로에서 2.0L 가솔린 7인승은 2열에도 없는 센터 암레스트가 3열에 있는 특이한 구조였죠.

2004년에는 나름 적극적인 변경으로 페이스리프트라고 할 만한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새로운 디자인의 휠과 라디에이터 그릴, 알록달록했던 앞뒤 램프를 클리어 타입으로 수정해 인상이 한결 깔끔해졌고 인테리어도 새로운 베이지 컬러 내장과 함께 우드 그레인의 색상을 변경해 세련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연출했죠.

내비게이션과 차량 내 전화, 전용 웹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텔레메틱스 시스템 'MOZEN'이 탑재된 것과 2.0L 가솔린 모델의 엔진이 과거 소나타부터 사용하던 시리우스 엔진에서 자체 개발 베타 엔진으로 변경된 것도 이 모델부터였습니다.

이후 대부분의 끝물 차량들이 그러하듯 소소한 원가 절감이 이어지다 높아진 안전 및 환경 규정이 대응하지 못해 2007년 정식으로 단종, 출시 8년 만에 마침표를 찍었죠.

세련된 스타일과 고급스러운 승차감, 각종 첨단 장비를 휘감은 트라제XG는 저렴한 다인승차라는 인식이 있었던 MPV들 틈바구니에서 색다른 매력을 선사, 그야말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랜저의 버금가는 고급감을 전면에 내세운 만큼 출시 초 경쟁차보다 판매 가격이 꽤 높았음에도 개시 첫날 1만 5천 대라는 대기록을 세웠어요.

이 성과는 한참 후인 그랜저 IG가 소폭 앞지르기 전까지 오래도록 깨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때는 요즘 흔히 하는 사전계약이 아닌 차량이 출시된 후 직접 계약하는 실계약 대수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 컸어요.

타이밍도 좋았습니다. 이때는 7인승 이상, 10인승 미만 차량들이 모두 승합차로 분류되어 2004년까지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죠. 때문에 제조사를 막론하고 MPV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던 시기였고 유예가 끝난 후에도 경쟁차 카니발보다 낮은 2,000cc 디젤 및 가솔린 엔진을 장착했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세금 문제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중형 MPV라는 장르에 처음 도전하는 모델이었지만, 단종 직전까지 국내와 해외를 포함 도합 30만 대라는 나름 의미 있는 판매량을 달성했어요. 참고로 해외에는 서브네임 XG를 뺀 '트라제'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유럽 및 아시아 시장을 주력으로 인도네시아 공장에서도 추가로 생산되어 동남아와 중동에도 판매됐습니다.

다만 출시 초부터 꾸준히 불거진 여러 가지 품질 문제와 리콜로 이미지에 먹칠을 하기 시작하면서 출시 초의 인기를 이어가진 못했습니다. 특히 주력 사양이었던 LPG 모델의 문제가 심각했는데요. LPG 탱크의 압력 조절 밸브 결함으로 용기에 균열이 발생해 가스가 새어 나올 위험이 제기됐고 엔진 내 점화 코일에 문제가 생겨 시동 불량, 운행 중 시동 꺼짐이 발생하는 등 각종 결항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필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온라인 카페 '안티트라제'로 대표되는 국산차 역사상 최초의 특정 모델 안티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어요. 다행히 문제가 많은 LPG 파워트레인이 아예 단종, 고객 집단의 활약으로 대부분의 치명적인 문제가 해결됐고 적당한 크기에 준수한 승차감과 합리적인 유지비, 버스 전용 차로 혜택 등 장점이 다시금 조명받으면 한때 중고차 시장에서 나름 환영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후에는 부식 문제가 불거졌죠. 매번 언급할 만큼 이 당시 국산 차들의 부식이 심하긴 했지만, 이 차는 그중에서도 유난히 심한 편이었습니다. 차체는 물론 하부 프레임까지 삭아서 운행에 지장을 주는 차들이 많았어요. 때문에 연식에 비해 수명이 매우 짧았고 남아있는 모델마저도 전부 노후 경유차로 분류됐기 때문에 해외로 망명을 떠나거나 폐차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치 한순간 멸종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어요.

한편 나름의 성과를 올린 모델인 만큼 후속 모델 역시 계획되어 있었는데요. 2005년 시카고 모터쇼에서 선보인 미니밴 컨셉트카 '포르티코'를 예고편으로 이번에는 유럽이 아닌 미국 시장을 노려 '프로젝트 PO'라는 이름으로 개발 중에 있었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시장이 크게 요동치면서 개발이 취소됐습니다.

이 선택과 집중의 결과로 당시 준비 중이던 상용밴 스타렉스의 후속 모델에 힘이 실리면서 승용 감각이 더욱 가미됐고, 이 포르티코의 본래 목적이었던 북미 미니밴 시장 진출은 기아 세도나, 즉 그랜드 카니발을 뱃지 엔지니어링 해 투입하는 것으로 대체됐어요.

광명 공장에서 생산된 현대 카니발, '안투라지'는 외관과 시트 구성을 약간 달리하는 성의를 더해 북미 현대차의 첫 번째 미니밴이 됐습니다. 눈썰미 좋은 분들은 기시감이 드실 텐데요. 이 구성을 활용해 '뉴 카니발 리무진'으로 국내 시장에도 판매됐어요.

지금까지 현대의 유럽전략형 MPV '트라제XG'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 외삼촌의 차로 오랫동안 이 모델을 경험해와서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반갑고 애틋한 마음이 들곤 하는데요. 어느 순간 다 사라져버려 예전처럼 다양한 MPV를 볼 수 없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트라제 XG의 단종으로 기아의 숏바디 '뉴 카니발'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던 국내 중형 미니밴 시장, 이마저도 3세대 카니발이 나오면서 단종되어 아예 명맥이 끊어졌죠.

본 콘텐츠는 해당 유튜브 채널의 이용 허락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9인승 차량들이 있긴 했지만, 4열 좌석을 가진 대형 미니밴들일뿐이고 그나마 대체재라고 할 수 있는 대형 SUV, 최근 등장한 신형 팰리세이드는 뜬금없이 1열 중앙 좌석을 갖춘 '3+3+3' 구조의 9인승 모델을 출시했지만, 이들은 가격도 크기도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합리적인 가격에 준수한 실내 공간을 갖춘 이런 MPV에 대한 수요가 분명 있을 텐데, 향후 전기차나 하이브리드로 걸출한 모델이 하나 나와줬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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