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일괄 수거는 인권침해 아니다?…인권위 판단 들여다보니
학생이 학교에서 휴대전화를 소지해도 괜찮을까?
어제(7일) 국가인권위원회 전원위원회에서 이 해묵은 논쟁에 대한 새로운 판단이 나왔습니다.
인권위는 어제 오후 전원위원회를 열고, 학생의 휴대전화를 일괄 수거하도록 학칙에 명시한 한 고등학교에 대해 '인권침해가 아니다'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안창호 위원장이 취임한 뒤 주재한 전원위원회에서 나온 첫 의결입니다.
■"휴대전화 일괄 수거는 인권침해 아냐"…10년 만에 바뀐 결정?
논의된 안건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지난해 3월 전남의 한 고등학교 재학생은 '학칙을 근거로 휴대전화를 일괄 수거해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등에도 사용할 수 없게끔 하는 것은 인권침해'라는 진정을 제기했습니다.
인권위 아동권리소위원회는 지난 5월 “사안이 중대하고 사회적 파장이 미치는 범위가 넓다”며 사건을 전원위에 회부했고, 여기서 안건을 기각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겁니다.
전원위에 참석한 10명의 위원 중 안창호 위원장을 포함한 8명이 안건의 기각을 주장했고, 2명이 인용을 주장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인권위가 지난 10년간 관련 진정 300여 건에 대해 일관적으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는 판단을 내려왔다는 데 있습니다.
불과 두 달 전인 지난 8월에도, 인권위는 휴대전화를 일괄 수거해온 한 고등학교가 인권위의 시정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유감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몇 가지 유사한 사건들에 대해 인권위가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살펴봤습니다.
2023년 7월
A 중학교장에게 학생들의 일반적 행동의 자유와 통신의 자유가 제한되지 않도록 학교 일과 중 임의로 학생들의 휴대전화 소지와 사용을 제한하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권고
2021년 11월
B 고등학교장에게 일과시간 동안 학생의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제한한 조치를 멈추고, 학생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는 범위에서 규정을 완화하라고 권고
2016년 7월
휴대 전화를 아예 학교에 가져오지 못하게 하는 학교에 대해 이러한 제한이 통신의 자유와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판단
그간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인권위는 학교에서 학생의 휴대전화 사용을 무조건 허용해야 한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인권위가 문제라고 본 부분은 휴대전화 사용의 '전면 금지'입니다.
인권위는 그간의 결정문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이 일반적인 행동 자유권을 포함하고 있으며, 모든 국민은 통신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학생의 휴대전화 사용을 제한하는 행위는 학생의 안전 등을 위해 '불가피한 경우'에만, '최소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 겁니다.
따라서 인권위는 정규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할 수는 있지만,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등에는 허용하도록 권고해 왔습니다.
■"휴대전화 사용이 교사의 수업 진행 방해"…교사 단체도 '환영'
그렇다면 이번 전원위에서 인권위의 이런 기조가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요?
안건의 기각을 주장한 위원들은 학생들의 휴대전화 사용이 교사들의 수업 진행을 방해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일부 해외 국가에서 학교 내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한 사례 등이 거론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지난해 플로리다주는 공립학교 수업 시간에 학생의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했으며, 오렌지 카운티 공립학교는 수업 시간뿐 아니라 학생들이 학교에 머무는 동안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휴대전화를 통해 학생들 간 괴롭힘이 발생하고 성 착취물이 공유되는 등 부작용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국내 교사 단체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오늘 입장문을 내고 "인권위가 교육의 특수성과 학교 현실, 법령에 보장된 교원의 생활지도권을 반영한 결정으로 평가한다" 고 밝혔습니다.
교총은 "수업 중 휴대전화 사용으로 교사의 교권과 여타 학생의 학습권이 침해되는 사례가 빈발했다"며 "이번 결정으로 교권과 학생 인권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 학교 문화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결정이 인권위가 10년간 내려온 판단을 뒤집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의결에 참여한 인권위 남규선 상임위원은 "이번 사건의 경우 학생 생활 규정에는 '수업 시간 이외의 시간에는 전자기기 사용권을 최대한 보장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교사가 정한 장소에 기기를 보관하고 교사의 승인 하에 사용한다'는 별도의 규칙이 있어 문제가 된 특이한 사례"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기각을 주장한 일부 위원도 '휴식시간에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내려온 그간의 판단을 뒤집는 결정이 아니며, 앞으로 처리할 사건의 내용에 따라 또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며 "그간 인권위가 내려온 결정이 뒤집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인권위 존재 의의 실추"…시민단체 반발
인권위의 이러한 결정이 경기도 등 일부 광역자치단체에서 시행 중인 학생인권조례와 상충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은 소지품, 사적 기록물 등 사생활의 자유와 비밀이 침해되거나 감시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인권단체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전국행동'은 오늘 논평을 내고 "이전 수백 건의 유사한 진정에서 인권위가 정립해온 인권 기준을 무시하는 결정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의 권위와 존재 의의 자체를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35개 인권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 행동'은 "지난 10년 동안 휴대전화 강제적인 일괄 수거는 학생 인권침해라는 기존 인권위의 권고를 뒤엎는 퇴행이라는 점에서 안창호 위원장을 강력히 규탄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권위는 각하나 기각 사건에 대해서는 보통 결정문을 작성하지 않지만,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결정문을 작성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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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욱 기자 (woogi@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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