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숙한 실수투성이, 그러나 불꽃같은 장훈이 이름조차 부르지 못했던 인물

타계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종신 명예감독 나가시마 시게오 이야기

지난해 구단 창립 90주년 행사 때 모습. 요미우리 자이언츠 홈페이지

선수 이름도 헷갈리는 허술한 감독

그는 전형적인 ‘원 클럽 맨’이다. 평생 요미우리를 떠난 적이 없다.

1993년의 일이다. 다시 감독에 취임했다. 이른바 2기 때다. 문제는 공백기가 길었다는 점이다. 현장을 떠난 지 13년 만의 복귀였다.

스프링캠프가 선수들과 첫 만남이다. 대부분 낯설고,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나름대로 친한 척을 한다. 그런데 문제가 많다. 이름도 틀리고, 딴소리하기 일쑤다.

허벅지 근육통으로 고생하는 2루수 오카자키 가오루에게 다가간다. “이봐, 팔꿈치는 어때? 좀 괜찮아졌어?”

내야수 가와이 마사히로는 어깨가 고질이다. 통증 때문에 얼음찜질 중이었다. 그걸 보면서 엉뚱한 소리를 한다. “무릎이 아플 때는 무리하면 안 돼. 내일은 좀 쉬라고.”

그런 일이 일상이다. 매일 반복된다. 당시 에이스 사이토 마사키의 회고다.

“첫 대면에 감독님이 내 이름을 불러 주셨다. ‘어이, 사이토’라고 정확히 알고 계시더라. 다른 선수들이 모두 부러워하더라. ‘참 다행이구나’ 생각했다.”

도쿄 요미우리 타운의 전광판 모습. 요미우리 자이언츠 홈페이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스타였다. 야구계뿐만이 아니다. 나가시마 시게오는 일본의 어느 유명인보다 존경받고,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반면 빈틈도 꽤 엿보인다. 어리숙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일화도 많다.

경기 중에도 숨길 수 없다. 결정적인 순간 타임을 부른다. 그리고 심판을 향해 외친다. “대타 고토.” 그런데 몸짓이 문제다. 두 손은 이미 번트 동작을 하고 있다.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보내기 작전은 실패가 뻔하다.

운전과 관련된 일화도 여럿이다. 독일제 외제차를 구입했다. 그런데 주차 브레이크를 깜빡했다. 잠근 채 일주일을 몰았다. 결국 한 달도 안돼 폐차시켜야 했다.

대신 선배가 출퇴근을 시켜준다. 차 안에서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집 앞에 왔다. 내리면서 이렇게 묻는다. “감사합니다. 얼마예요?” 택시라고 착각한 것이다.

이런 식의 에피소드가 A4 용지로 몇 장은 된다.

도쿄 요미우리 타운의 애도하는 모습. 요미우리 자이언츠 홈페이지

감독에게도 “당신이~”, 불같은 성격

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야구인이 있다. 장훈(84)이다.

그는 열혈남아다. 거칠 것이 없는 성격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화끈한 성격으로 악명이 높다.

심지어 감독도 어질어질하게 만든다. 현역 말년의 에피소드다. 롯데 오리온즈(지금의 지바 롯데)로 이적한 40세 때 얘기다.

당시 야마우치 가즈히로라는 감독이 지휘할 때다. 유명한 별명을 가진 지도자다. ‘갓파에비센(かっぱえびせん)’이라는 닉네임이다. 우리의 새우깡과 무척 비슷한 과자다.

CM송까지 일치율이 높다. 이를테면 “손이 가요, 손이 가~”의 일본 버전이다. “멈출 수 없어, 끊을 수 없어…”가 계속 반복된다. 별명이 된 이유는, 그만큼 말이 많다는 뜻이다.

팀 미팅 때 사달이 났다.

20분, 30분이 훌쩍 넘어간다. 감독의 설교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있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다 됐나 싶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그때였다. 맨 앞 줄에서 볼멘소리가 터진다. “그래서, 그러니까.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뭐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하극상이 없다. 선수가 감독의 말을 끊는다. 그것도 ‘당신(アンタ)’이라며 거의 맞먹는 시비조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얼음장이 된다. 감독은 부글부글, 울그락불그락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8살 아래 선수가 치받는데, 숨만 씩씩거릴 뿐이다.

맞다. 함부로 할 상대가 아니다. 최초의 3000안타를 코 앞에 둔 슈퍼 스타다. 독보적인 팀의 리더이자, 간판이다.

성격이나 만만한가. 한 번 끌어 오르면, 앞뒤 가리지 않는다. “니들 다 야구 못하게 만든다.” 그의 일갈이면, 웬만한 벤치 클리어링은 곧바로 상황 종료다. 신주쿠 밤거리에서 야쿠자 몇 명 정도는 추풍낙엽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인물이다.

지난해 구단 창립 90주년 행사 때 장훈 씨의 모습. 요미우리 자이언츠 홈페이지

나가시마의 호칭 “미스터”

그런 장훈 씨가 유독 공손해지는 상대가 있다. 세상에 친절하고, 사람 좋은 나가시마 시게오다.

나이 차도 크지 않다. 4살 위다. 8살 많은 감독(야마우치)에게도 심사가 뒤틀리면 ‘당신’이라고 부르는 성깔 아닌가.

하지만 나가시마에게는 언제나 깍듯하다. 그 흔한 “~상“ 혹은 “~씨”도 쓰지 않는다. 늘 “미스터”라고 부른다. 별명 ‘미스터 베이스볼(Mr. Baseball)’의 그 ‘미스터’다. 존경의 마음이 담긴 호칭이다.

둘이 한 팀이었던 기간을 짧다. 장훈 씨가 요미우리에서 뛴 4년이 전부다.

“처음 이적했을 때다. 미스터가 따로 불러 이런 당부를 하더라. ‘오랫동안 내가 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안 되겠다. 앞으로는 당신이 좀 맡아 달라.’ 그런 말이었다. 아주 간곡한 표정으로 얘기하더라. ‘저렇게 팀을 생각하는 사람이 다 있구나.’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일’은 다름 아니다. 오 사다하루(왕정치)를 도와주라는 부탁이다.

1960~70년대 요미우리는 ‘ON’으로 불리는 타선이 강력했다. 오 사다하루(O)-나가시마(N)로 이어지는 3, 4번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N이 나이를 먹으면서 틀이 깨졌다. O가 집중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결국 체제 개편이 이뤄진다. 나가시마가 은퇴하고,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장훈(Harimoto)을 영입한다. ‘ON’ 대신 ‘OH’ 타선이 구축된 것이다. 즉, 장훈이 4번에 버티고 있으면, 상대는 3번 오 사다하루를 피해 갈 수 없다.

OH는 성공적인 기획이 됐다. 이후 3년간 매 시즌 60~70개의 합작 홈런을 생산했다. (장훈과 오 사다하루는 동갑이자, 둘도 없는 술친구가 됐다.)

생전에 오타니 쇼헤이와 함께 한 모습. 오타니 SNS

미스터의 엄한 꾸짖음

장훈 씨의 요미우리 때 기억이다.

“어느 날이다. 상대 투수 공에 맞았다. 손이 퉁퉁 붓고 통증이 심했다. 배트를 잡기도 어려워 2~3일 정도는 쉬어야 했다. 그 얘기를 했더니, 감독이 방으로 부르더라. 그러더니 한동안 이런 말을 해주더라.”

당시 감독은 나가시마였다.

“이봐, 오늘 자네를 보러 온 어린이 팬이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아? 4시에 문을 여는데, 2시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기다리는 애들이 있다고 하더군. 이 더운 날씨에 말이야. 그 친구들 마음이 어떻겠나. ‘오늘 하리모토 선수가 안타를 쳤으면 좋겠다’ 하는 설렘이 가득하지 않겠나?”

그 말을 들은 장훈 씨의 감상이다. “정신이 번쩍 들더라. 직업 야구 선수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180도 바꾼 전환점이었다.”

또 있다. 이번에는 장훈 씨가 혼쭐이 난 일화다.

“지방 원정 때였다. 게임 종반 1사 1, 3루에서 내 차례가 됐다. 그런데 번트(스퀴즈) 사인이 나오더라. ‘설마’ 했다. 그런 적은 없었다. ‘뭔가 잘못됐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쳤다. 중전 안타가 돼서 더 좋은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또다시 감독실 호출이다. 그리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노여운 얼굴과 만나야 했다.

“자네 정도라면 외야 플라이는 칠 수 있겠지. 어떻게든 3루 주자를 불러들이는 타격은 해주겠지. 하지만 그때는 1점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네. 그걸로 충분했지. 그게 감독인 내 방식이야. 나중에 너도 감독이 되겠지. 그때는 내 기분을 알게 될 거야.”

그런 나가시마 감독에 대해 장훈 씨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그 말을 하는 미스터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야구에 대해 순수하고, 누구보다 열정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곧바로 두 손을 모아서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 존경하는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홈페이지

도쿄타워가 일찍 조명을 끈 이유

명물 도쿄 타워의 불이 저녁 9시에 꺼졌다. 본래는 자정까지 훤한 조명이다. 평소보다 3시간이나 일찍 깜깜해진 셈이다.

도쿄 타워가 슬퍼한 이유가 있다. 동갑내기 친구를 잃은 탓이다. 나가시마 시게오가 데뷔한 것은 일본 연호인 쇼와 33년(1958년)이다. 도쿄 타워가 지어진 해와 같다.

또 있다. 숫자 3은 유독 둘과 인연이 깊다. 도쿄 타워의 높이는 333미터로 설계됐다. 나가시마는 3루수였다. 유니폼에 3번을 달고 뛰었다. 감독 시절에도 마찬가지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달 수 없는 번호였다. (1974년 요미우리 영구 결번 지정)

그리고 바로 그 ‘3일’이다. 숫자의 주인공이 먼 곳으로 떠났다. 장훈 씨는 미스터의 부음을 듣고 이렇게 얘기했다.

“고인과는 계속 한 동네에 살았다(도쿄 오타구). 아침 산책 코스도 같아서 함께 다녔다. 그렇게 순수하게 야구를 사랑한 사람은 없다. 무엇보다 훌륭한 인격자였다. 평생 누굴 험담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떨리는 목소리로) 마치 내 몸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이 고통스럽다.”

고인의 빈소를 찾은 추모객들. 요미우리 자이언츠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