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에 구애 안받고 작업…한국적인 것 모색 지속
그는 문인화와 서예를 망라해 시·서·화에 능수능란하다. 오죽하면 지난 2007년 시인들이 의기투합해 제1회 한국예술상을 수여했을까. 시인들과 단순하게 친했다기보다 그림쟁이이지만 글과 담을 쌓지 않고 끝까지 연마하며 수양하듯 작품활동을 펼쳐왔다는 이야기다. 그가 화폭으로 끌어들여 마치 시문학이나 고시가와 콜라보하는 작품세계를 가졌다는 것은 화단에서 익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에는 윤동주 이상화 한용운 등 민족독립을 외치며 항거했던 시인 및 이은상 박용철 김영랑 등 독보적 시문학을 구축한 시인, 그리고 제망매가 정읍사 가시리 처용가 헌화가 등 신라향가가 한바탕 노닐고 간 듯하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대로 정리하자면 향찰로 표기된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이자 서정시의 의미하기 때문에 시문학의 원류로 보면 된다. 이처럼 회화와 시가 만나는 지점을 ‘한국성’(韓國性) 발현으로 본다.
한국의 전통성을 찾으려는 그의 시적인 그림의 주류가 한국성이다. 다르게는 ‘시의화’(詩意畵)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주인공은 독창적 회화세계로 이목을 집중시켜온 전남 보성 출신 창현 박종회 화가가 그다. 일찌기 상경해 중앙화단을 주무대로 활동을 펼쳐왔다.
그런데 한국미의 추출을 위한 한국성 모색에 평생 심혈을 기울여온 그가 광주에도 작업공간을 마련했다. 광산구 수완동 타운하우스 연립주택 윤슬의아침 사무동 1층에 창현 전시관을 내고 활동에 돌입한 것이다. 이같이 광주 작업실이 마련된데는 창현의 작품을 좋아하고 미술계 어른으로 모시고자 한 김종성 대표이사가 공간을 제공하면서다. 애초 두 사람간 인연은 먼저 김 대표의 누이와 시작됐다. 김 대표의 누이와의 인연이 전시장을 내는데까지 이른 것이다.
창현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의재 허백련의 큰아드님인 허광덕 선생과는 형님으로 모시셨는데 “어느날 왜 너는 우리 아버지 밑으로 안 들어오냐”고 야단을 치자 창현은 “학문 등 여러 면이 깊지도 못한데 어떻게 문하로 들어가냐”며 어디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예술세계를 개척하며 미술인생을 꾸려온 셈이다.
창현은 “서울에서 작업하면서 늘 고향에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연구하고 있는 것을 선보이고자하는 일념으로 작업에 몰입해왔는데 마침 여기 대표이사가 장소를 제공해줘 내려오게 됐다”며 “한 80여점 작품을 전시 중에 있고, 제 작품 700여점 전부를 다 이쪽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1><@2>그에게 회화 전환점은 1981년 동아미술제 대상 수상과 이탈리아 초대전, 1997년 뒤늦게 열린 제1회 개인전, 2014년 프랑스 퐁피두센터 전시 등에 모아진다. 이탈리아에서는 전시를 연뒤 그림이 한국적이어야겠다며 역으로 배워왔다고 한다. 퐁피두센터 전시는 광장에서 2m×10m 소나무 그림 퍼포먼스가 펼쳐져 그에게 큰 의미로 남아있다.
창현은 당분간 서울과 광주 두집 살림을 할 예정이다. 매주 2∼3일, 한달에 2주 정도는 광주에 머물며 작업을 펼쳐나갈 뜻을 내비쳤다. 광주에서는 금봉 박행보, 고인이 된 학정 이돈흥, 금초 정광주, 시원 박태후, 담헌 전명옥, 한상운 금봉미술관 관장, 이부재 문인화가 등 몇몇과 막역하게 지내온 것으로 알려졌다. 무등미술대전 창립 당시에는 자문위원 및 심사위원장을 맡아 활동을 펼쳤고, 전남도전 심사 2회, 광주시립미술관 전관 전시 등 지역과 연을 쌓아왔다. 개인전은 소품전까지 하면 25∼26회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전시장에는 단색 청색으로 유화 특징을 도드라지게 한 ‘수화 예술의 한국적 심미’를 비롯해 가장 한국적 화가로 꼽히는 김환기와 박수근의 만남을 모색한 ‘수근과 수화의 포옹’, 고려대인촌기념관에서 영구 보존하기로 한 동아미술제 대상 ‘연꽃’, 다른 작가들은 부처님을 보통 그리는데 국보 반가사유상을 5414자나 되는 금강경과 함께 유일하게 구현한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 등 그를 대표하는 작품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수근과 수화의 포옹’은 서로 쓰는 칼라가 다른 가운데 창현은 자신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형상화했고, ‘수화 예술의 한국적 심미’는 유화를 한 수화예술을 다시 한국적으로 재조명을 하고 싶어 우리나라 종이인 고향 보성 복내에서 나는 삼지(마지)를 활용해 작업을 펼쳤다. 수화는 유화를 했는데 그것으로는 번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 한지에 번지게 하면 어떨까 해서 삼지에 찢고 그리기도 하면서 편안한 감각을 투영해 내고자 노력했다.
<@3><@4>구역에 파티션으로 가벽을 세워 일자로 설치, 작품을 걸었는데 한결같이 그의 회화 진수를 엿볼 수 있었다.
현재 부천에 큰 작업실을 가지고 있다는 창현은 추사가 칡뿌리로 글씨를 썼듯, 이쑤시개로 사군자나 문인화, 목판화의 힘든 작업을 넘어 구현해냈다. 칡뿌리를 빻아 섬유질로 붓에 먹물을 슬쩍 스친 듯이 묻혀서 그리는 동양화 묘법인 갈필을 추사가 대체했듯, 창현은 이쑤시개로 주걱처럼 생긴 나무 끝을 가늘게 갈라서 붓으로 작업을 한 목필을 대체한 것이다. 목판화의 느낌이 나고, 모필에서 느낄 수 없는 나름 재미가 있어서다.
창현은 “재료에 구애받지 않고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해왔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제일 환영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안다. 소품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갤러리 그림 말고, 미술관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후학들이 한국적인 것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을 하면 좋겠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내 그림이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미술평론가 장준석(한국미술비평미학연구소 대표)씨는 창현의 작품에 대해 “한국인의 삶과 자연, 의식 등에서 드러나는 미적 조형성을 평생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로부터 비롯된 창현의 작품에는 담백하고 순진무구한 형상미가 담담하게 펼쳐져 있다. 이것은 곧 질박함이며 우리 민족의 정서다. 맑음과 순결함이 내재하고 느림의 미학 같은 성정과 담담함이 있다”고 평한 바 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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