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총 거수기 운용사 '실명공개' 강수뒀지만...업계는 갸우뚱
패시브펀드 대부분인 탓에 의결권 행사 관심도 낮아
"이사 충실의무 확대 등 근본적 해결책 필요" 지적
금융감독당국이 이번 분기부터 의결권 행사 내역을 제대로 공시하지 않은 자산운용사들의 이름을 공개한다. 운용사 대부분이 의결권 행사를 투자자들에게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지배주주의 거수기 노릇만 한다는 지적이 나오자 '계도' 강도를 높이기 위한 방침이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벌써부터 실명공개가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유도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나온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추가하는 등 근본적인 해법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불성실 공시 난무하자 문제아 공개 카드 꺼낸 금감원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감원은 올 3분기부터 주주권익 침해 가능성이 있는 안건에 대해 의결권 행사 내역을 미흡하게 공시한 운용사의 실명을 공개하기 위해 사례를 검토 중이다.
다만 △미흡한 사례만 공개 △우수 공시사례와 비교 등 구체적인 공개 방법은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 물론 주주권익 침해 우려 안건을 다룬 사례가 없다면 공개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기주주총회가 몰려있는 내년 1분기부터 본격적으로 사례가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운용사들은 한 펀드 내에서 특정 종목을 100억원 이상 혹은 전체 자산 중 5% 넘게 담고 있을 경우, 한국거래소에 의결권 행사 내역을 보고해야 한다. 펀드에 자산을 맡긴 투자자들을 대신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만큼, 표를 어디에 던졌는지 뿐 아니라 그렇게 행사한 이유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리라는 취지다.
그러나 금감원이 의결권 행사 내역을 전수 조사한 결과, 의결권 행사 내역을 불성실하게 공시한 곳이 96.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주총회 영향이 미미해서', '주주권 침해 없는 사안이라서' 등 형식적인 사유를 쓴 곳이 난무했다.
당국은 이미 국내 운용사들의 펀드 의결권 행사에 문제가 있다고 여러차례 경고해왔다. 김병환 금융위원장도 취임 후 자산운용업계와의 상견례 자리에서 "그동안 자산운용업계는 ETF 베끼기, 수수료 인하, 형식적인 의결권 행사 등 단기적 수익추구에 치중하느라 장기적인 기업가치 제고 노력에는 소홀한 측면이 있다"고 질타했다.
문제는 운용사가 공시를 하지 않거나 불성실 공시를 하더라도 현재 자본시장법상에는 '충실하게' 공시하라고만 명시하고 있어 제재하기 어렵다. 따라서 금융감독당국은 압박 수단으로 실명공개 카드를 꺼내들었다.
특히 금감원이 이 시점에 압박 수위를 높인 건 최근 두산, SK그룹 사태 등 소액주주의 주주권익을 침해하는 사례가 잇달아 나온 것도 배경이다. 두산그룹은 에너빌리티의 자회사 밥캣을 분할·합병 과정을 거쳐 로보틱스의 100% 자회사로 바꾸는 그룹 개편을 시도하다가 소액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비판에 부딪혀 개편 작업을 중단했다. SK 역시 이노베이션과 E&S의 합병을 진행 중인데 합병비율이 이노베이션에 불리하게 책정돼 논란이 빚어졌다.
'효과 있을까' 운용업계, 갸우뚱
감독당국이 강수를 뒀지만 정작 운용업계에서는 효과에 의문을 품으며 미지근한 반응이다. 주주권익 침해 위험이 있다고 분류하는 안건이 많지 않을뿐더러 지수를 추종하는 패시브 펀드나 상장지수펀드(ETF)를 통해 주식을 보유하는 경우가 많아 여전히 형식적인 공시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행동주의 컨셉을 가진 액티브 펀드가 아니라면 운용부문에서 의결권 행사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며 "지수를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개별 종목의 이슈를 중요하게 보진 않는다"고 밝혔다.
또 다른 운용사 관계자 역시 "내부에서 의결권 행사를 전담하는 부서가 있기 때문에 실제 운용역들은 사례 공개에 신경쓰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만일 LG에너지솔루션 물적분할이나 두산 합병과 같이 주주이익 침해가 유력한 사안이 있더라도 내부 지침과 사유만 자세하게 명시하면 되기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도 있다.
운용사 펀드매니저는 "일반주주와 경영진간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비즈니스하는 입장에선 오너 편에 설 수밖에 없다"며 "운용사에서도 오너와 틀어지면 힘들어지기 때문에 사유를 만들어서라도 (경영진 제안에) 찬성 쪽에 표를 던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를 비롯한 유의미한 법적 근거가 있지 않는 한 운용사들의 의결권 행사 방향을 주주가치 훼손에 적극 대응하도록 바꾸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펀드매니저는 "의결권 자문기관이 반대를 권고하더라도 운용사는 찬성을 하는 경우도 많다"며 "상법 등으로 주주충실의무를 강제하지 않는다면 운용사 의결권행사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백지현 (jihyun100@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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