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섭의 2026년은 숫자 하나로 시작했다. “1년 1억.”
야구판에서 이 문장은 단순한 연봉 뉴스가 아니다. 존중이냐, 정리냐, 혹은 마지막 기회냐를 둘러싼 온갖 해석이 한꺼번에 달라붙는 말이다. 더구나 주인공이 손아섭이면, 그 무게는 몇 배로 커진다. KBO 통산 최다 안타 1위(2618안타). ‘언젠가 3000안타’라는 말이 꿈이 아니라 현실적인 목표로 보였던 선수. 그런 이름이 FA 시장에서 끝까지 남았다가, 결국 원소속팀 한화와 단년 계약을 했다. 그것도 “재계약”이라는 표현이 어색할 만큼, 사실상 ‘다시 증명하러 들어가는 계약’이다.

처음 소식이 나왔을 때 팬들이 느낀 감정은 두 갈래로 갈렸을 것이다. 한쪽은 “그래도 현역 연장이다”라는 안도, 다른 한쪽은 “이게 손아섭의 값이라고?”라는 씁쓸함. 둘 다 틀리지 않다. 다만 냉정하게 보면, 이번 계약이 말하는 건 딱 하나다. FA 시장에서 ‘이름값’만으로 지갑을 여는 시대가 더는 아니라는 것. 그리고 손아섭이 그 변화를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맞닥뜨렸다는 것.
이번 스토브리그 내내 손아섭을 둘러싼 관측은 복잡했다. ‘사인 앤드 트레이드’ 얘기도 돌았고, 보상 규모를 낮추는 방법까지 검토됐다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결론은 단순했다. 남는다. 한화에서 1년 더 뛴다. 이 결론이 의미하는 바는 오히려 깊다. “손아섭이 못 한다”가 아니라, “손아섭을 딱 그 용도만큼만 쓰겠다”는 계산이 더 강하게 작동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손아섭이 한화 유니폼을 입고 보여준 지난 시즌의 기록만 놓고 보면, 완전히 망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즌 막판 한화에 합류한 뒤 정규시즌에서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가 있었고, 장타력과 기동력, 수비 범위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도 계속 따라다녔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타율 0.333으로 존재감을 남겼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요즘 구단들은 “한두 달 반짝”이 아니라 “한 시즌 내내 팀 전술 안에서 어디에 박을 수 있나”를 더 따진다. 그리고 손아섭은 지금 그 질문에서 가장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선수다.

예전의 손아섭은 설명이 쉬웠다. 외야 한 자리를 맡기고, 타선 상위 타순에 꽂아두면 된다. 매일 나가서 출루하고, 안타를 치고, 분위기를 살린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선수의 역할이 바뀐다. 발이 느려지고, 수비 범위가 줄어들면, 팀은 자연스럽게 그 선수를 지명타자 쪽으로 옮긴다. 하지만 지명타자는 아무나 설 자리가 아니다. 특히 한화처럼 타선 보강을 크게 해놓은 팀일수록 더 그렇다. 공격력은 늘렸는데, 수비에서 불안한 자원이 많아지면 결국 지명타자 자리는 ‘조율용 자리’가 된다. 오늘은 누굴 쉬게 할지, 누굴 살릴지, 컨디션이 어떤지에 따라 매일 바뀐다. 그런 팀에서 손아섭이 “지명타자 고정”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일까?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니 계약도, 역할도, 결국 “증명부터”로 정리된 것이다.
이번 계약의 씁쓸함은 금액이 작아서만이 아니다. 손아섭이 1군 캠프가 아니라 일본 고치의 퓨처스 캠프로 간다는 결정이 훨씬 더 강한 메시지다. 이건 ‘징벌’이라는 말로 단정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구단 입장에선 “일단 상태를 보고, 경쟁을 통해 올라오라”는 선택이고, 선수 입장에선 “밑바닥부터라도 기회를 잡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팬들은 여기서 더 현실을 느낀다. 손아섭이 지금 팀 내에서 ‘확정 카드’가 아니라는 사실. 이름만으로 1군 자리를 예약해주던 시절이 끝났다는 사실.
그렇다고 해서 이 계약이 손아섭에게 ‘끝’을 의미하느냐 하면, 꼭 그렇진 않다. 오히려 반대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단년 계약의 장점은 딱 하나, 선수가 직접 판을 뒤집을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야구는 이상하게도, ‘한 번 증명하면’ 분위기가 확 바뀌는 스포츠다. 캠프에서 상태가 좋다는 평가가 나오고, 시범경기에서 타구 질이 달라지고, 시즌 초반 1군에서 몇 번 결정적인 안타를 치면 여론은 금방 바뀐다. 손아섭 스스로도 “어린 선수들과 경쟁이 아직 버겁지 않다”고 말했다. 이 말이 허세로 들리지 않게 만드는 건, 손아섭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방식 때문이다. 그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홈런이 아니라 정확한 타격과 루틴, 그리고 경기 감각이다. 발과 수비가 예전 같지 않아도, 타격이 살아있으면 그는 여전히 쓸모가 있다. 특히 시즌이 길어질수록, 젊은 타자들이 흔들릴 때 ‘한 타석을 안정적으로 끝내는 베테랑’은 분명히 필요해진다.
다만 ‘쓸모’와 ‘주전’은 다르다. 손아섭이 2026년에 진짜 원하는 게 3000안타라면, 가장 중요한 건 두 가지다. 첫째, 꾸준한 출전 기회. 둘째, 그 출전 기회를 잡기 위한 명확한 역할이다. 여기서 손아섭이 현실적으로 노릴 수 있는 길은 몇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대타-대기”로 시작해, 팀 타선이 흔들릴 때 자리를 넓히는 방식이다. 초반에는 기회를 많이 못 받아도, 결과로 밀어붙이면 결국 감독은 쓰게 돼 있다. 다른 하나는 “상대 투수 유형에 맞춘 플래툰”이다. 특정 유형의 투수에 강한 타자가 있으면, 시즌은 그를 계속 필요로 한다. 마지막은 “가을야구를 노리는 팀에서 필요한 한 조각”으로 시즌 중반 이후 가치가 올라가는 경우다. 시즌 중 트레이드 얘기가 다시 나올 가능성도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다. 선수는 팀 안에서 자리를 증명하고, 팀은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한다. 야구는 늘 그렇게 움직였다.
한화 입장에서도 이번 재계약이 ‘감정’으로만 이뤄졌다고 보긴 어렵다. 한화는 이미 강백호 같은 큰 영입을 했고, 타선 전체를 업그레이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 팀이 베테랑에게 큰돈을 쓰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손아섭을 완전히 놓기도 부담스럽다. 손아섭은 여전히 ‘하나의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타자이고, 팀 내부 경쟁을 끌어올릴 수 있는 이름이다. 그래서 1년 1억은 냉정하지만, 동시에 절묘한 선택이다. 팀은 부담을 최소화하고, 선수는 기회를 이어간다. 그리고 결과가 좋으면, 내년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결국 이 계약은 ‘정답’이 아니라 ‘승부수’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핵심은, 손아섭 개인을 넘어 KBO 시장의 분위기 변화에 있다. 이제는 기록이 많아도, 전성기가 길어도, “현재의 쓰임새”가 명확하지 않으면 시장이 차갑다. 특히 수비·주루·포지션 유연성이 떨어진 타자는 더 그렇다. 팬 입장에서는 야박해 보이지만, 구단 입장에서는 계산이 더 정확해진 시대다. 손아섭은 그 변화의 한복판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형태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말이 이상하게도 ‘끝’이 아니라 ‘시작’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마 야구팬들이 손아섭에게 기대하는 장면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누군가는 “역대 최다안타 1위가 1억이라니”라고 말하겠지만, 또 누군가는 “그래서 더 무섭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절벽 끝에서 가장 단단해지기도 하니까. 손아섭의 2026년은 아마 이렇게 요약될 것이다. 자존심이 아니라, 생존으로 뛰는 시즌.
그리고 그 생존은 때때로, 가장 뜨거운 이야기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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