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축음기와 디지털 자율주행 자동차
저는 10년쯤 전에 인도에서 만들어진 축음기(蓄音機, gramophone)을 하나 구해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인도에서 산 건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산 것이었습니다. 축음기는 다른 말로는 유성기(留聲機)라고도 불립니다.
유성기는 마치 나팔꽃 모양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확성기와 뾰족한 바늘이 끼워진 픽업(pickup) 장치 등으로 구성돼 있고, LP 또는 SP라고 불리는 아날로그 방식 레코드 판의 표면에 새겨진 굴곡을 바늘로 긁어서 소리를 재생하는 음향 기기입니다.
그런데 축음기 하면 떠오르는 것이 축음기의 나팔을 신기한 듯이 들여다 보고 있는 반려견의 모습인데요, 알려진 바에 의하면, 프란시스 바라우드(Francis Barraud; 1856-1924)라는 영국의 화가가 1898년 겨울에 자신의 집에서 축음기의 소리를 신기하게 듣고 있는 그의 형이 기르던 반려견 니퍼(Nipper)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축음기를 만들던 빅터(Victor Talking Machine Company)라는 회사가 1900년에 축음기의 상표로 HMV(His Master's Voice)에 이 그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국내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LP 판을 만드는 곳이 다시 생겨났다고 합니다. 물론 축음기에 쓰는 음반과 턴 테이블용 LP음반은 외관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LP판이 훨씬 더 섬세합니다. 그래서 축음기에 LP판을 올려놓고 돌리면 축음기 바늘이 LP판을 다 깎아 먹어 버립니다. 축음기의 바늘은 상당히 굵고 강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는 축음기를 만드는 곳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10년 전에 축음기를 사게 된 것은 겨울방학 때마다 인도(India)에 자동차 디자인 특강을 하기 위해 가곤 하면서 인도 현지에서 우연히 보았던 축음기가 무척 신기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인도에서 보았던 것이나 제가 국내에서 구입한 인도제 축음기의 물리적 품질이나 만듦새는 그다지 깔끔하지 못하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동은 그럭저럭 잘 될뿐더러, 신기하게도 전기를 전혀 쓰지 않는 데도 상당히 큰 소리로 음향이 재생되는 게 정말로 신기합니다.
축음기를 인도에서 처음 실물로 보았을 때 신기하다고 느끼긴 했어도 그걸 살 생각은 못했습니다. 제법 덩치가 커서 인도에서 가져올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웹 서핑을 하던 중 우연히 우리나라에서 축음기를 판매하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돼서, 그곳을 방문해서 축음기를 보곤 그 자리에서 샀었습니다.
2009년에 처음으로 인도에 갔을 때 축음기를 실물로 처음 접하고 나서 정말로 신기했던 것은 아무런 전기 장치도 연결돼 있지 않은 축음기에서 정말로 큰 소리로 음악이 연주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잡음이 있고, 태엽을 감아서 돌아가는 턴테이블은 회전속도가 일정하지 않아서 소리가 늘어지기도 했지만, 아무런 전기장치 없이 그렇게 큰 소리를 낸다는 게 정말로 신기합니다.
음향기기로서의 축음기는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1877년 11월 21일에 자신의 발명이라고 발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에디슨이 만든 축음기는 동(銅)으로 만든 파이프를 바늘로 긁어 홈을 파서 소리를 기록하고, 그것을 돌리면서 바늘로 다시 홈을 따라 읽는 원리의 것으로, 납작한 음반을 쓰는 것과는 다른 형태이지만, 아날로그적 진동으로 소리를 내는 원리는 같다고 합니다. 19세기는 그야말로 발명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그날 구입한 축음기는 새 것임에도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것이라 새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덩치가 제법 큰 축음기를 분해해서 집으로 가져와서는 여러 부품의 먼지를 닦아서 다시 조립해 작동시켜 보니, 아날로그적 감성 가득한 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요즘의 디지털 음악의 소리는 당연히 잡음 하나 없이 깨끗하지만, 어딘가 모르는 차가움이 있는 반면에, 축음기에서 나오는 소리는 두터운 공기의 두께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따뜻함도 있는 듯 했습니다. 게다가 인도에서 만든 축음기에 얹혀 있던 LP 음반 역시 인도 음악, 힌디 뮤직(Hindi Music)이라는 장르로 분류되는 연주가 수록된 것이었는데요, 연주돼 나오는 인도의 음악은 마치 영혼을 울리는 듯 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허풍이 심하다고 느끼실 지도 모릅니다만, 힌디 뮤직으로 검색해보시면 들어 보실 수 잇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17~19세기에 이르는 근대(近代) 시대는 무수히 많은 제품들이 발명된 시기였습니다. 물론 인류 역사 전체가 발명의 역사라고 해도 틀리지 않겠지만, 근대에 발명된 수많은 도구들이 현대문명의 기반이 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축음기와 자동차는 역사의 궤(軌)를 같이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최초의 축음기와 초기의 내연기관 자동차는 전기 동력을 쓰지 않은 완전한 아날로그 기술의 제품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디지털 기술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입니다. 음향기기는 물론이고, 얼마 전에 테슬라에서는 드디어 완전 자율주행 차량을 발표하고 2027년부터 판매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연히 디지털 기술에 의한 전자장비를 가득 싣고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스티어링 휠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자율주행 차량을 시판하려는 것이 요즘의 기술이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들이 만나는 자동차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아날로그 기술과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디지털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디지털 기술의 목표는 아날로그를 닮는 데 있다는 역설이 존재하듯이, 자동차 기술이 고도화되고, 디자인 감성이 디지털에 의한 변화를 맞는다고 해도, 그 근본은 아날로그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틀림 없으며, 첨단기술을 통해 가장 아날로그적 감성의 제품을 완성하는 것에 목표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놀랍게도 테슬라는 반려견과 함께 캠핑 중인 사이버 밴의 이미지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1921년에 제시된 축음기를 들여다보는 반려견 니퍼의 그림이 생각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100년 사이의 기술 변화가 이런 걸까요?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테슬라의 사이버 캡과 사이버 밴의 디자인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요소가 있는지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