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중해의 파란 바다 아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총성도 없고 연기도 없지만, 수천억 유로가 걸린 이 싸움은 어떤 전장보다 치열합니다.
그리스 해군이 노후화된 잠수함을 교체하기 위해 신형 잠수함 4척을 자국내 건조 방식으로 조달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세계 주요 방산 강국들이 일제히 그리스를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한화오션, 프랑스의 나발 그룹, 독일의 TKMS, 스웨덴의 사브, 이탈리아의 핀칸티에리까지. 그리스의 선택 하나가 유럽 재군비 시대의 판도를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수주 전쟁의 승자는 누가 될까요?
그리스가 원하는 잠수함, 조건이 만만치 않다
그리스 해군이 요구하는 조건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영국에서 개최된 'Surface Fleet Technology' 행사에서 그리스 해군이 직접 공개한 필수 요건들을 보면 그 야심찬 수준이 느껴집니다.
기본 중의 기본인 AIP(공기 불요 추진) 기관 탑재는 물론, 고도의 자동화 기능, 특수부대 수용 공간, 어뢰와 대함 미사일, 대지 미사일까지 갖춰야 합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드킬과 소프트킬로 구성된 대어뢰 방어 시스템, 대공 미사일, 심지어 수중 발사식 무인항공기 운용 능력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리튬이온 배터리 채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납산 배터리 대비 에너지 밀도가 높고 충전 속도가 빠른 리튬이온 배터리는 현대 잠수함의 핵심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죠.
그리스 해군이 검토 중인 후보 설계는 프랑스 스콜페누와 바라쿠다급, 독일 218급과 209NG급, 한국 KSS-III급, 스웨덴 A26 등으로 알려졌으며, 이 중 어느 설계가 최종 선택을 받을지가 이번 수주전의 핵심입니다.
한화오션의 승부수, 잠수함만이 아니다
한국이 그리스에 제안한 내용은 단순한 잠수함 수출이 아닙니다.
2025년 8월, 그리스 매체 《프로토 테마》가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한국은 그야말로 '패키지 딜'을 들고 그리스 문을 두드렸습니다.
한화오션의 제안에는 신형 잠수함 건조와 함께 그리스 해군이 현재 운용 중인 214형 잠수함의 업그레이드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당국은 한국의 잠수함 기술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구체적인 조건들을 요구했습니다.
그리스 국내에서의 잠수함 건조 조건, 214형 업그레이드의 세부 내용, 그리고 잠수함 건조와 업그레이드 과정에 그리스 기업이 최소 25% 이상 참여해야 한다는 요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국이 제안한 세 번째 카드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노후화된 그리스 육군의 전술 차량 갱신 사업까지 공동 생산으로 묶어 제안한 것이죠.
잠수함 하나만 팔겠다는 게 아니라, 그리스 방위 산업 전체를 파트너로 삼겠다는 전략적 접근이라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반격, 블랙소드 바라쿠다를 꺼내다
프랑스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나발 그룹은 2025년 말 그리스 해군이 발행한 정보 제공 의뢰(RFI)를 받아 자신들의 주력 잠수함인 '블랙소드 바라쿠다'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이 잠수함의 제원을 보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잠항이 가능한 상태에서 최고 속도 약 20노트, 최대 항속거리 15,000해리, 승무원 약 35명에 특수부대원 5~6명과 추가 인원을 위한 거주 설비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탄약고에는 F21 중어뢰, 엑소세 SM40, JSM-SL, MdCN/NCM 등 최대 30발의 무장을 탑재할 수 있는 것이죠.

나발 그룹이 그리스에 제안한 블랙소드 바라쿠다는 네덜란드 해군이 이미 채택한 것과 동일한 모델로 알려졌습니다.
이미 실전 발주가 이루어진 설계라는 점에서 신뢰성을 강조하는 전략으로 보입니다.
납기의 경우 계약 체결 후 5~6년 이내로 예상되지만, 건조 방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4척 전부를 그리스 국내에서 건조하는지, 1번함만 프랑스에서 짓고 나머지를 그리스에서 건조하는지, 또 AIP 기관을 탑재하는지 리튬이온 배터리만 쓰는지에 따라 납기와 비용이 크게 변동하는 구조입니다.
나발 그룹의 숨겨진 카드, 그리스 산업 생태계 구축
나발 그룹 제안의 핵심은 단순히 '프랑스제 잠수함'이 아닙니다.
그리스 산업계의 참여를 전면에 내세운 '생태계 구축 전략'이 진짜 승부수입니다.
나발 그룹은 이미 FDI 프리게이트 건조 프로그램을 통해 그리스 산업계와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인프라를 잠수함 사업에도 그대로 연결하겠다는 계획이죠.

구체적으로는 스칼라만 가스 조선소가 최종 조립을 담당하고, 메트렌이 선체 일부를 건조하는 방식으로 그리스 산업계의 참여 비율을 높이겠다는 구상입니다.
나발 그룹은 단순히 잠수함을 팔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가 자국 내에서 잠수함을 건조하고 정비할 수 있는 장기적인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 주겠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보 분야에서 그리스와 프랑스의 긴밀한 관계를 감안하면, 나발 그룹이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유럽 재군비의 물결, 한국이 노리는 더 큰 그림
이번 그리스 잠수함 사업이 단순한 4척 수주전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이 그리스에 공을 들이는 배경에는 유럽 재군비라는 거대한 흐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향후 수년간 무려 8,000억 유로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유럽의 재군비 계획에서 그리스는 중요한 교두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에서의 성공이 곧 유럽 전체 시장 진출의 발판이 되는 구조입니다.

물론 나발 그룹도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나발 그룹 스스로 "TKMS, 사브, 한화오션, 핀칸티에리와의 경쟁이 예상되며 치열한 수주전이 될 것"이라고 인정할 만큼 이번 경쟁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독일제 잠수함을 오랫동안 운용해온 그리스 해군이 프랑스제로 전환하는 데 따른 훈련과 적응의 문제도 넘어야 할 산입니다.
나발 그룹도 이 부분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장 인력의 수용성 문제"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결국 이 싸움은 성능과 가격, 기술 이전 조건, 그리고 정치적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총력전입니다.
한화오션이 패키지 딜로 그리스의 마음을 잡을지, 나발 그룹이 정치적 유대와 산업 생태계로 역전할지, 지중해의 파도가 그 답을 알려줄 날이 머지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