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지운 ‘천안문 사태’ 37주년...美국무 “어떤 검열도 과거를 지울 수 없다”
친중 집회 전시장으로 변해...“기념일엔 천안문 광장보다도 조용”
4일은 중국의 민주화 시위인 천안문(톈안먼) 사태가 중국인민해방군의 발포로 유혈 진압된 지 37년이 되는 날이다.
이 행사를 기념하는 것은 중국 본토와 홍콩에선 금지됐고, 중국 정부는 그동안 1989년 4월 중순부터 6월4일까지 약 7주간 전개된 천안문 광장 민주화 시위에 대한 강경 군사 진압을 대중의 기억에서 지우는 캠페인을 강화해왔다. 희생자에 대한 모든 추모 자체가 금지됐다. 인민해방군이 천안문 광장에 모인 시위대를 진압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학생과 시민 수백~수천 명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희생자 수는 지금도 발표된 적이 없다.

AP 통신은 중국 공안이 천안문 사태 피해자 유가족 모임인 ‘천안문 어머니들(天安门母亲)’에 이날 베이징의 희생자 묘지를 방문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고 전했다. 유가족들은 그동안 매년 기념일에 묘지를 방문해 추모 성명을 낭독했고, 공안은 이를 감시하는 방식으로 동행했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군 투입을 결정한 것은 이후 중국 현대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천안문 사태 강경 진압을 통해, 중국 정부는 나중에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는 시장 개혁을 하면서도 정치적 자유화는 결코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홍콩 시민들은 중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전인 2019년까지는 매년 수만 명이 빅토리아 공원에 모여 추모 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 방역을 이유로 금지됐고 이후 모든 관련 행사가 금지됐다.
라디오프리아시아(RFA)는 “평화적인 민주화 운동의 진앙이었던 빅토리아 공원은 이제 친중(親中) 집회 전시장이 됐고, 4일은 천안문 광장보다 더 조용하다”고 전했다. 성을 ‘첸’이라고만 밝힌 한 홍콩 언론인은 RFA에 “이날을 기억하지 못해서도 아니고, 이제 아무도 감히 이 주제를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은 3일 일부 공연예술가들이 백화점 앞에서 물음표 모양의 풍선을 잠시 들고 있었으나, 경찰에 단속됐다고 보도했다.
마르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천안문 민주화운동의 유혈 탄압 37주년을 맞아 “어떠한 검열도 과거를 지울 수 없다. 자유로운 표현과 평화적 집회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언젠가 반드시 인정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라이칭더(賴清德) 타이완 총통도 4일 “중국이 37년 6ㆍ4 사건을 직시하고, 진실을 인정하며, 고통을 치유하고, 화해와 대화의 문을 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천안문 어머니’ 회는 올해 107명이 서명한 성명을 통해 천안문 사건의 전면적인 공개와 피해자ㆍ유가족에 대한 보상, 책임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촉구했다.

국제 인권단체인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의 세러 브룩스 아시아 부국장은 성명을 내고 “중국 당국의 추모 억압이 더욱 심화되는 것으로 보인다”며 “천안문 진압 희생자 유가족이 묘지를 방문하는 것까지 금지하는 것은 비인도적인 행위”라고 밝혔다.
◇천안문 사태 일지
1988년 중국은 30%에 가까운 인플레이션으로 극심한 사재기와 경제적 혼란에 빠졌다. 이듬해 4월 15일 개혁가로 간주되던 전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은 개혁의 더딘 진행과 공산당ㆍ정부 지도층의 부패, 국영기업ㆍ자원 배분의 비공정성, 소득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다.
4월17일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들이 민주주의와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고, 이는 10만 명까지 늘어났다. 이어 4월22일 후야오방 추도식을 맞아 학생들은 인민대회당 앞으로 집결을 시도했고, 이후 텐안먼 광장에서 추모와 시위가 점점 확산됐다. 세 명의 학생이 중국 정부에 시위대의 요구 사항이 담긴 청원서를 전달하려고 했으나 묵살당했다.
4월24일 베이징 학생들이 수업 거부 시위를 했고, 27일에는 약 5만 명의 학생들이 중국 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천안문 광장으로 행진했다. 지지자 수는 100만 명에 달했다.
5월 2일에는 상하이에서 1만 명의 시위대가 시청으로 행진했고, 5월 4일에는 1919년의 5·4 운동 기념일과 맞물려 대규모 시위가 다시 발생했다. 5·4 운동은 당시 학생과 지식인들이 주도한 반(反)제국주의ㆍ민족주의 운동이었다. 이후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주도한 시위는 상하이ㆍ텐진ㆍ시안ㆍ광저우ㆍ난징ㆍ우한ㆍ청두ㆍ선양 등 중국 여러 대도시로 번졌고, 시위대는 언론 자유와 부패 반대를 외쳤다.
4월 13일 수백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5월 19일, 개혁ㆍ대화 노선을 주장하던 자오쯔양(趙紫陽) 공산당 총서기와 강경파 국무원 총리인 리펑(李鹏) 등이 텐안먼 광장의 학생 시위대를 만나 해산을 요청했지만 거부됐다. 자오쯔양은 당시 “우리가 너무 늦게 왔다”고 발언했지만, 이때를 마지막으로 이후 모습이 공개되지 않았고 가택 연금되고 실각했다.
5월20일 리펑은 베이징 일부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군 투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리펑은 서방 언론매체에서 ‘베이징의 도살자(Beijing Butcher)’라는 별명을 얻었다. 학생들은 5월30일 천안문 광장에 자유의 여신상을 본 딴 10m 높이의 ‘민주주의의 여신상’을 만들어 공개했다.

시민과 학생들은 6월3일부터 진격하는 수천 명의 군인들과 충돌하기 시작했고, 4일 새벽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차와 장갑차가 광장으로 들이닥쳐 동틀 무렵에는 텐안먼 광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민이 죽고 다친 것으로 알려졌다. 4시간 뒤, 중국군은 광장 주변에 재집결한 비무장 시민들에게 발포했다.
5일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한 중국 남성이 텐안먼 광장을 떠나는 전차 행렬 앞을 가로 막았고, ‘탱크 맨(Tank Man)’으로 알려진 이 장면은 중국 공산당의 민주화 시위 탄압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됐다.
중국 정부는 6일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는 약 300명으로, 대부분 군인이고 학생 시위대 사망자는 23명이라고 밝혔다. 국제 인권단체는 사망자를 수백~수천 명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 사망자 숫자는 지금까지도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이 없다.
당시 중국의 최고실권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ㆍ공식직함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군 투입과 진압을 승인했으며, 6월9일 시위를 ‘반혁명 세력의 소행’으로 규정해 군의 진압 결정을 정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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