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그라운드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승패가 결정된 장면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황당한 실수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라운드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순간도 다양할 것이다. 1군 마운드에 처음 올라간 순간, 첫 안타를 친 순간 등등.
오랜 시간 그라운드를 지켜보면서 살고 있는 나에게도 잊지 못할 순간이 있다.
수많은 명승부를 지켜봤지만 경기 장면이 아닌 찰나의 순간이 기억에 남아있다.
야구의 도시 광주에서 태어났고, 야구를 사랑한 아빠 덕분에 무등경기장은 집처럼 익숙한 곳이었다. 무등경기장은 나의 유일한 야구장이기도 했다.
내 인생의 또 다른 야구장, 잠실구장에 처음 갔던 날을 잊지 못한다.
무등경기장이 전부였던 내가 경기장 출입구를 찾기 위해 한참을 걸어야 했던 그날. 넓은 복도 위에서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내가 알던 야구장이, 나에게는 큰 세상이었던 곳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던 그날. 꿈같은 장면을 마주했다.
그늘진 통로를 지나 관중석으로 걸어가던 순간, 내 눈앞에 그라운드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숨도 멈췄던 것 같다. ‘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찌 그라운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시즌이 끝난 다음날 아침에는 이별한 사람처럼 가슴이 시리곤 했다.
“비시즌을 어떻게 보내냐”는 걱정 속에 그라운드와 작별하지만 신기하게도 매년 “벌써 또 시작이네”라는 생각을 하면서 새 시즌을 맞는다. 올해도 그랬다.
언제 기다렸냐는 듯 다시 마주하고 있는 그라운드. 며칠 전 KIA 좌완 윤영철과 이야기를 하다가 설레였던 그라운드를 다시 떠올리게 됐다.
윤영철은 “언젠가 개막전 선발을 해보고 싶다”며 웃었다. 개막전 선발의 꿈을 꾸게 한 꿈같은 ‘순간’이 있었다.
“첫해 때 4월 1일 개막이었는데, 2군에서 경기를 던지고 와서 4월 2일에 합류를 했어요. 랜더스 필드를 갔는데, 만화 보면 빛이 엄청 하얗다가 밝아지는 것 있잖아요. 야구장을 들어갈 때 그게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거에요. ‘와’하면서 보는 데 관중석에 사람들이 꽉 차 있고, 뒤에 나무가 초록초록하고. 나중에 개막전 선발 한번 던져보고 싶다. 그때부터 그 생각했던 것 같아요.”
프로에 처음 뛰어든 2023년 4월 2일 ‘루키’ 윤영철은 가슴 뛰게 하는 그라운드를 만났다. 야구 인생의 새로운 목표가 생긴 순간이었다.
꿈꾸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윤영철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윤영철은 올 시즌을 앞두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힘을 더 제대로 앞으로 사용할 수 있게 메커니즘을 고민하고 변화를 준비했다.
본무대에 앞서 모든 게 순조로운 것 같았다. 차근차근 준비한 것들이 익어가면서 공에 힘도 실렸고, 스피드도 더 나왔다.
윤영철은 기분 좋게 ‘유지’를 이야기하면서 3월 26일 키움 히어로즈를 상대로 2025시즌을 열었지만 야구는 역시 어렵다.
“올 시즌 규정이닝만 생각하고 있다”던 윤영철의 시즌 첫 등판은 2이닝에서 끝났다. “내 승리가 아니더라도 팀이 많이 이기면 좋겠다”던 바람도 이루지 못했다.
이 경기에서 총 34개의 안타가 쏟아졌고, 20개의 볼넷도 기록됐다. 경기는 10-17, KIA의 패배로 끝났다.
윤영철은 시즌 첫 등판에서 패전투수가 됐다. 유격수로 나선 윤도현의 아쉬운 실수가 있었다고 하지만 윤영철은 준비한 것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윤영철에게는 잊고 싶은 경기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시즌은 길다. 리그를 호령하고 있는 선수들에게도 지우고 싶은 순간들이 많다.
‘대투수’ 양현종도 179승을 하는 동안 119경기에서 패전투수가 됐다. 양현종 역시 김태균에게 홈런을 맞고 경기장에서 눈물을 쏟던 어린 선수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윤영철은 프로 첫해부터 KIA의 선발진에 이름을 올렸고, 올해도 당연한 선발로 시즌을 준비하고 시작했다.
올 시즌 KBO 개막전 선발 라인업은 모두 외국인 투수로 채워졌다. 이름난 외국인 투수들이 버티고 있는 KBO 마운드, 그래서 ‘토종선발’의 큰 꿈을 더 응원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남다른 배포의 윤영철은 자신의 약점이 아닌 강점에 주목하면서 프로의 벽을 넘어 ‘선발’이라는 이름을 지키고 있다. 또 다른 벽을 넘고, 넘고 또 넘다 보면 만화처럼 보였던 그라운드에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본무대에서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을 경험한 윤영철, KIA의 미래를 이끌어 갈 또 다른 ‘토종 선발’ 김도현도 개막에 앞서 아찔한 순간을 보냈다.
김도현은 지난 21일 삼성과의 퓨처스리그 경기에서 개막에 앞서 마지막 점검 무대를 가졌다. 캠프 때부터 시범경기까지 물 흐르듯 5선발 싸움을 했고 원하던 자리를 얻은 김도현이었지만, 이날 결과는 좋지 못했다.
김도현은 5이닝 동안 10개의 안타를 맞았고, 이 중 3개의 공은 담장 밖으로 넘어가면서 9실점을 했다. 이 경기에 앞서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됐던 만큼 혹독한 리허설이었다.
“솔직하게 자신감이 떨어졌다”라는 김도현은 “야구라는 스포츠가 정말 어려운 것 같다”며 다시 한번 실감한 야구의 높은 벽을 이야기했다.
김도현은 기다렸던 시즌 출발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기회를 흐지부지 놓칠까 봐 두려움도 느꼈다. 동시에 다시 한번 책임감을 생각하게 됐다.
“선발을 하면서 책임감이 더 커졌던 것 같아요. 마운드는 내 무대이고 나 혼자니까 내가 해내야 해요. 내가 최고라는 생각으로 해야 해요. 솔직하게 이번 결과로 자신감이 떨어졌는데 코치님들이 그동안 페이스가 너무 좋았다고 하셨어요. 그런 경험을 해본 게 나쁘지 않다고 하셔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정재훈 코치님이 해주신 말씀이 우리나라에 30명 밖에 없는 자리라고 하셨어요. 그 생각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하라고 하셨어요.”
“원래 말도 없고 숫기도 없어요. 트레이드되고 나서 밥도 못 먹었어요. 긴장도 많이 하고 그때 7~8㎏가 빠졌어요.”
낯설고 어려웠던 시간을 지나 김도현은 새로운 팀에서 한국시리즈 무대까지 밟았다. 지난해 이맘때쯤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2025시즌에는 우승팀 선발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마운드에 오르게 된다.
쟁쟁한 선발 후보들이 있고 이의리도 복귀를 준비하고 있는 만큼 조급한 마음이 앞설 수도 있다. 하지만 기다렸던 순간을 즐기다 보면,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순간을 선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라운드에 다시 봄이 찾아왔다. 올 시즌에도 성공과 실패의 순간들이 쌓여 또 다른 야구 이야기가 완성될 것이다. 고난과 시련이 없다면 해피 엔딩도 없다. 그냥 엔딩일 뿐.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