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이다…나를 믿고 거세하라” JMS 뺨때리는 ‘그놈들’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3. 18.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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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에 자극적인 사진과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19세 미만이거나, 심약하신 분들에겐 일독을 권하지 않습니다.

[사색-13]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을 증명하세요.”

“어떻게 하면 되죠?”

“‘성기’를 자르십시오. 그것은 죄악의 징표입니다.”

“...알겠습니다. 신의 나라로 갈 수 있다면.”

이곳은 1760년 러시아 서부의 오룔입니다. 평화롭던 마을에 홀연히 한 남자가 나타납니다. 바가지 머리를 한 남자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이렇게 외쳤지요. “나를 따르라, 천국으로 들어갈지니.”

성기를 자른 뒤 찬양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그림.
말쑥하게 잘 차려 입은 남자에 마을 사람들은 점점 빠져듭니다. 귀족들의 착취, 농사의 고단함, 삶의 무료함이 맞물려 점점 그를 추종하게 되었지요. 농민들에는 그가 보장하는 천국만이 유일한 삶의 위안이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세가 제법 불어났을 무렵. 그가 사람들에게 성경의 한 구절을 반복해 읽게 합니다. 마태복음 19장 12절입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그리고는 외쳤지요. “성경의 말씀 대로, 거세할지어다. 신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분명 해괴한 말이었지만, 신도들은 어느새 그에게 빠져듭니다. 기어이 스스로 성기를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저...저기...무서운데 닌텐도 좀 주시면 안될까요”. 스콥시 신도들의 고환제거술을 묘사한 그림.
남자들은 고환과 음경을, 여성들은 가슴을 스스로 도려냈지요. 울면서 그들은 고함칩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습니다.” 러시아의 종교집단 스콥시(Skoptsy)의 시작이었습니다. JMS 뺨치는, 어쩌면 그들을 뛰어넘는 사이비 교주들이 있었지요. 그 추악한 역사를 사색합니다.
성기를 절제한 스콥시 신도들 사진들. 남자는 성기를, 여성은 가슴을 절제해야 죄를 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성기절제를 교리로 삼은 ‘스콥시’
“예수님도 거세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응당 그 분의 뜻을 따라야지요.”

스콥시를 주창한 남자는 18세기 러시아 서부 지역에 살았던 콘드라티 이바노비치 셀리바노프. 농민이었지만 종교에 관심이 많던 그는 성경을 독창적으로 해석하는 경지까지 이르렀습니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진 구절은 앞서 말한 마태복음의 19장 12절이었습니다. 짬이 날 때 마다 성경을 읽고 자신만의 ‘공상’을 펼쳤지요.

“어여어여 자르고 회개하자고.” 스콥시를 주창한 콘드라티 이바노비치 셀리바노프. 19세기 그림. 작자 미상.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셀리바노프는 인간의 생식기가 원죄의 상징이라는 교리를 완성해 나갑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몸에 붙여 고환과 가슴이 형성된 것이라는 스토리도 접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거세해 완전한 성인이 됐고, 초기 기독교 성도들 역시 이를 따랐다고 주장했지요. 성기를 제거해야만 원죄 이전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던 것이었습니다.
“저..저기요, 우리 성기는 그런 뜻 아니거든요?” 피터 폴 루벤스의 ‘인간의 타락’(1628년)에서 묘사된 아담과 이브.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고단한 농민들 파고든 스콥시...러시아 당국의 탄압
“완전 거세는 무섭지요? 그러면 고환만 제거하시지요.”

극단적인 성기 절제가 신도 확장에 어렵다는 판단이 들자, 남자의 경우는 고환만 제거하거나, 여성은 유두만 제거하는 방식도 허용합니다. 여전히 극단적인 교리였지만 셀리바노프의 언변에 신도들은 늘어가기만 했습니다.

삶이 고단한 농민과 가난한 도시민이 표적이었습니다. 수년 만에 5000명에 가까운 신도들이 모였지요. 사회적으로 묵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도 스콥시 종파의 사람들이 묘사돼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 놈들 얘기 쓰면 100만뷰..아니 100만부 각 나오겠는데” 대문호 도스토엡스키는 ‘카르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스콥시 종파를 묘사했다. 러시아 화가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 1872년작
“저 미친놈들을 잡아들여라.”

결국 사법 당국이 나섰습니다. 1772년 셀리바노프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지만, 그는 도망쳤지요. 정신병원에도 가둬보지만 1802년 끝끝내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그 사이 신도들은 불어났지요. 추종자들은 셀리바노프가 예수처럼 수난을 받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재림”이자 러시아 황제인 ”차르“로 칭했습니다. JMS 정명석이 성범죄로 감옥에 갇힌 것을 예수의 수난으로 비유했다고 하지요. 사이비 교주들의 논리는 하나같이 닮았습니다.

스콥시는 계속해서 세를 불려 1900년대 초반 10만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한 소련 사회주의 정권에 의해 스콥시는 마침내 쪼그라들었지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불행이라고 해야할까요. 이 종파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고스란합니다. 성기절제를 욕망하는 심리를 가리키는 ‘스콥틱 증후군’이 이들 명칭에서 따왔기 때문입니다.

“거시기 없는 놈들이 수만명이라고? 다 쓸어버리게”.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의 지도자로서 종교를 탄압했다. 10만명 교인을 자랑하던 스콥시 역시 이같은 스탈린의 강압정책에 사그라졌다.
중세 유럽에 사이비 논쟁이 적었던 이유
왜 이런 극단적인 사이비종교들이 출현했을까요. 기원을 탐색해봅니다. 기독교의 사이비 종교 역사는 깊지 않습니다. 500년전 종교개혁 이후에서야 서서히 나타났지요. 종교의 유구함에 비한다면, 그 역사가 일천합니다.

가톨릭이 유럽 사회를 지배하는 시기에는 사이비 종교가 나타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교황-주교-신부로 이어지는 철저한 수직체계가 다른 교리를 주장할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성경 해석에 이견이 있을 경우 성직자들의 대회의 격인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한번 공의회 판단이 나오면, 유럽 전역 성직자들은 이를 곧이 곧대로 따랐습니다.

“자 오늘부터 예수님 부활하신 날짜는 이날로 합니다.”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묘사한 모습. 콘스탄티누스 대제(가운데)가 직접 개최해 기독교 교리를 신학자들과 의논해 정했다. 이후부터 가톨릭은 공의회를 통해 주요 논점들을 정리해 나갔다.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거나 ‘파문’을 당하는 구조였습니다. 일부 지역에서 사이비 종교가 나타나더라도 교황청의 해석을 기반으로 그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일종의 안전장치가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정통 가톨릭과 해석을 달리하는 교단이 세를 넓혀가도 금세 정화가 됐었지요. 각국의 군주들이 무력으로 이를 진압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중세의 ‘성왕’ 루이9세는 카다리파를 집단 학살하기도 했었지요.

“너네 이단 사이비지? 이 성에서 다 나가.” 1209년 프랑스 남부 카르카손에서 추방당하는 카다리파 신도들. 이들은 가톨릭과 다른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이단으로 낙인 찍혔다. 15세기 작품. 대영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이단의 시작...종교의 자유와 함께 싹튼 ‘역설’
상황은 종교개혁 이후부터 급변합니다. 루터가 가톨릭을 정면 비판하면서 개신교들이 세를 불려갔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그동안 가톨릭에 불만이 있던 세력들이 개신교로 넘어갔지요.

개신교는 교황청이 독점하던 ‘성경의 해석’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만인사제설’을 꺼내들었지요. 하느님 과 인간을 이어줄 중간 버팀목으로서의 성직자 개념을 버렸던 것입니다. 일종의 ‘종교적 민주주의’가 이뤄진 셈이었습니다.

“내 맘대로 살거야, 말리지마.”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 그는 면벌부를 판매하는 교황청을 ‘95개조 논제’를 통해 비판했다.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마르틴 루터 초상화. 1528년 작품.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각자 성경을 알아서 해석하다보니, 교단이 너무나도 다양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거리를 걷다보면 장로회니, 성공회니, 감리회니, 침례회니, 루터교회니 수 많은 교회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모두 개신교의 교파들이지요. 가톨릭의 천주교가 단일한 집단으로 구성되는 것과는 다른 모양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 ‘선지자’라면서 개인 숭배를 내세우는 JMS같은 조직 역시 이같은 성경해석의 자유로부터 생겨납니다. 이들 또한 성경을 자신들만의 논리로 해석해 사람들의 마음(과 몸과 돈)을 빼앗았습니다.

스콥시 또한 러시아의 성군으로 통한 표트르 대제가 분파주의자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부여하면서 생겨났지요. 사이비종교가 ‘자유’에 기생해 암약한 지독한 아이러니였습니다.

러시아의 국교인 정교회도 18세기 본격 분열을 시작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스콥시 같은 극단적 교파들이 탄생한 배경이었다. 러시아 화가 바실리 페로프의 1881년 그림. 러시아 종교인들이 서로 격렬히 토론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개인숭배, 집단자살...극단으로 치닫는 사이비종교
사이비종교는 선량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경지에 도달합니다. 극단성은 점입가경이지요. 미국에서는 ‘존스타운’이 유명한 사건입니다.

짐 존스라는 1954년 ‘인민사원’(People’s temple)이라는 종교 집단을 창교했습니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사회주의와 기독교를 교묘히 섞은 종교단체였지요.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신앙을 결합한 종교 인민의사원을 창교한 짐 존스. 1977년 1월 사진. <저작권자=낸시 웡>
그의 시작은 깨끗했고, 평등했으며, 올곧았습니다. 인종 차별에 반대 목소리를 냈고, 평등과 자유, 빈민 구제에도 적극적이었지요. 당시 미국은 흑인 차별이 심각한 나라였기에 짐 존스의 목소리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회주의와 기독교를 섞은 ‘인민사원’
“모두가 평등하게, 그러나 신의 사도인 나는 예외입니다.”

조직이 커지자, 그 역시 변해갑니다. 신도의 소득과 재산을 모두 바치게끔 해 평등하게 나눠가지는 급진적인 교리를 내세운 것이었습니다. 흑인의 총기소지를 주장하는 흑표당과 협력하거나, 찬송가로 공산주의 노래인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지요. 미국 사회에서 인민사원을 향한 비판이 거세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인민사원은 흑인 차별을 반대했기에 많은 흑인들이 신도로 활동했다. 1977년 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인민사원 신도들. <사진 저작권자=Nancy Wong>
짐 존스는 새로운 꿈을 꿨습니다. 자신의 인민을 데리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처럼 말이지요. 남아메리카 가이아나가 목적지였습니다. 1974년 그곳에서 그는 ‘존스타운’을 세우고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공공연히 비난합니다. 신도들의 삶을 철저히 통제하는 건 기본이었고요. 그의 극단성 때문에 신도들의 탈출 시도가 줄을 이었지요. 그는 무장경비병을 세워 신도들을 감시합니다.

미국 의회가 존스타운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하원 의원이었던 레오 라이언이 진상 조사를 위해 가이아나로 향했지요.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구출해달라“는 여러 신도를 목도합니다.

1979년 가이아나에 건립된 존스타운.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개인숭배가 부른 끔찍한 집단 자살
“저들을 죽여라, 그리고 우리도 천국으로 간다.”

라이언 의원과 진상 조사단이 그곳을 떠나려 하자, 무차별 학살이 시작됩니다. 무장한 신도들이 조사단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습니다. 라이언 의원과 그의 보좌관, NBC 기자 돈 해리스 등 5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레오 라이언 하원의원은 존스타운의 인권침해 문제를 조사하고자 가이아나 존스타운에 방문했다. <사진 출처=미국 하원 홈페이지>
존스 타운의 ‘신’ 짐 존스가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지요. 907명에게 모두 음독 자살을 명한 것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신도들은 그의 뜻을 순순히 따랐습니다. 차분하게 자신의 자녀에게 청산가리를 탄 음료를 먹게 한 뒤, 그들 스스로도 이 음료를 마셨지요. 저항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짐 존스는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시신이 발견됐지요. 부검 결과 그 역시 이 음료를 먹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망자는 918명, 이 중 어린이가 276명이었습니다. 9.11테러 이전까지 최다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었지요. 광신의 끝은 죽음이었음을 증명한 셈이었습니다.

가이아나에 마련된 존스타운 입구. 이곳에서 900여명이 죽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사이비 종교가 초래한 비극이었다. <사진 저작권=존스타운 인스티튜트>
건강한 이성만이 사이비종교 빠지지 않는 길
사이비 종교는 언제나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 듭니다. 남루한 삶에 한줄기 빛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지요. 구원과 진리를 발견한 느낌도 들테고요. 그럴 때 일수록, 이성의 눈을 감지 말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범죄자들을 기억하자. 이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범죄를 저지른 한낱 범죄자에 불과하다. 넷플릭스 ‘나는 신이다-신이 배반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사이비 종교 교주들의 범죄를 다룬다. <사진 제공=넷플릭스>
개인숭배는 종교일수도, 진리일 수도 없습니다. 성폭행과 폭력을 저지른 이들은 저급한 범죄자일 뿐이지, ‘메시아’따위가 아닙니다. 어쪄면 맹신의 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끝없는 ‘사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존경해 마지 않는 과학자 칼 세이건의 명언을 꺼내듭니다. 우리 모두가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한 시민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자신에게, 그리고 권위 있는 다른 이들의 생각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애국자는 항상 문제를 제기합니다.”

<네줄요약>

ㅇ과거 가톨릭이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는 사이비종교가 거의 없었다. 교황의 말씀을 무조건 따랐기 때문이다.

ㅇ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교파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이단도 독버섯처럼 번졌다.

ㅇ18세기 러시아에서 유행한 기독교의 한 종파인 스콥시는 ‘성기를 절단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ㅇ이성과 끝임없는 ‘사색’만이 사이비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정X석 X새끼.

<참고문헌>

ㅇ나이토 히로후미, 기독교로 읽는 세계사-바티칸은 어떻게 역사에 군림했는가, 역사산책, 2021년

ㅇ니콜라스 V.랴자놉스키· 마크 D. 스타인버그, 러시아의 역사, 까치, 2011년

ㅇ로라 엔젤슈타인, 이단에서 해악까지-후기 짜르 러시아의 자기거세자들, 2019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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