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성의 외국 기업 이야기 <3> 인텔 몰락의 4가지 이유] 기술 모르는 마케팅·재무통 CEO들, 오픈AI 투자 기회도 날렸다
“반도체 산업의 중심이 지난 2~3년 동안 인공지능(AI) 분야로 이동한 것이 그들(인텔)의 관뚜껑에 못을 박아버린 꼴이 됐다.”
미국 투자 분석 기관 CFRA 리서치의 테크 애널리스트 안젤로 지노가 얼마 전 ‘반도체 제국’ 인텔의 몰락에 대해 언급하며 한 말이다. 1970년대부터 반도체 신기술을 선도하며 PC 시대를 호령했던 인텔은 최근 실적 부진으로 인한 대규모 감원 움직임 속에서 인수합병(M&A) 시장의 매물로 거론되는 굴욕을 겪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9월 20일(이하 현지시각)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이 인텔에 매수 제안을 했다고 보도했다. 퀄컴은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분야의 세계 최강자다. 인텔을 인수하게 되면 PC용·서버용 반도체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할 것으로 보인다.
인텔의 시가총액은 10월 9일 종가 기준 1001억달러(약 134조7046억원)로, 성사될 경우 최근 수년간 이뤄진 M&A 중 가장 큰 규모가 될 전망이다. 같은 날 퀄컴의 시가총액은 인텔의 두 배 가까운 1896억3000만달러(약 255조1850억원)였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인텔은 소위 ‘윈텔(윈도+인텔)’로 불린 MS와 연합을 바탕으로 전 세계 PC 시장을 지배했다. PC와 노트북마다 붙어 있던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라는 파란색 스티커는 품질 보증서 역할을 했다. 공동 창업자 고든 무어가 내세운 ‘무어의 법칙(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이 2년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는 가설)’은 반도체 발전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그랬던 인텔은 어느덧 적자 규모가 올해 1분기 3억8100만달러(약 5005억원)에서 2분기 16억1000만달러(약 2조1666억원)로 불어났다. 인텔은 충격적이었던 2분기 실적 발표 직후 전체 직원의 15%인 1만5000명을 해고하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부를 분사하는 등의 구조조정안을 내놨다. 1992년 이후 지급해 온 배당금 지급도 중단하기로 했고, 9월 개최 예정이던 기술 콘퍼런스도 취소했다. 한때 ‘외계인을 납치해 기술을 개발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월등한 기술력을 자랑했던 인텔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실패 원인 1│PC 성공에 도취, 모바일 시장 기회 놓쳐
PC 시장의 성공에 도취한 인텔은 모바일 칩 사업 확장 기회를 날려버렸다. 2010년 무렵 스마트폰 대중화 이후 뒤늦게 스마트폰용 반도체 시장으로 확장을 노렸지만, 적자만 쌓은 채 2016년 관련 사업에서 철수했다. 반면 퀄컴은 2000년대 들어 모바일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며 ‘인텔 시대’의 종언을 앞당겼다. 두 회사는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하는 ‘미국 제조 부흥’을 위해 손을 잡기도 했다. 퀄컴이 인텔의 최첨단 파운드리 공정에 반도체 제조를 맡기는 방안을 추진한 것. 하지만 퀄컴이 테스트 과정에서 인텔의 생산 품질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둘의 동맹은 없던 일이 됐다.
실패 원인 2│기술 잘 모르는 마케팅·재무 출신 CEO들
테크 업계에는 인텔의 위기가 마케팅과 재무 전문가 출신 최고경영자(CEO)가 인텔을 이끌면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반도체 전문가였던 무어와 앤디 그로브, 크레이그 배럿이 인텔 CEO로 기술혁신을 이끌며 전성기를 일궜는데, 마케팅 전문가 출신으로 2005~2013년에 CEO로 재임한 폴 오텔리니와 최고운영책임자(COO) 출신인 브라이언 크르자니크(2013~2019년 재임)가 인텔을 이끌면서 쇠락이 시작됐다는 설명이다. 원가 절감에 목을 맨 크르자니크는 투자와 연구개발(R&D)에 소극적이었다. 모바일 전용 반도체로 넘어가던 시기에 인텔은 경쟁사보다 뒤떨어진 14㎚(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공정만을 고집해 원성을 사기도 했다. 최고재무책임자(CFO) 출신인 밥 스완은 투자 비용 회수를 따지다 오픈AI에 투자할 기회를 걷어찼다. 결국 인텔은 2021년 스완을 경질하고 현 최고 기술 전문가인 팻 겔싱어 현 CEO를 회사로 다시 불러들였지만 한발 늦었다는 평을 받았다.
실패 원인 3│턱없이 뒤처진 AI 경쟁력
스완이 오픈AI 투자 기회를 걷어찬 것은 AI 분야에서 인텔의 입지를 약화한 뼈아픈 패착이었다. 인텔은 2017년과 2018년 몇 개월 동안 오픈AI 지분 15%를 현금 10억달러(약 1조3400억원)에 인수하는 방안을 놓고 협상을 진행했다. 이와 더불어 오픈AI에 하드웨어 제공 대가로 지분 15%를 추가 매입하는 방안도 함께 논의했다. 하지만 스완은 생성 AI가 이른 시일 내에 시장에 나오지는 못할 것이란 판단에 따라 투자 계획을 포기했다. 인텔도 최신 AI 칩 ‘가우디 3’를 최근 출시하는 등 AI 반도체 시장에서 엔비디아와 경쟁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하지만 두 기업 간 경쟁력 격차는 이미 크게 벌어졌다. 인텔은 올해 자사의 가우디 AI 칩 5억달러(약 6700억원)어치를 판매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엔비디아는 매년 200억달러(약 26조9100억원) 상당의 AI 칩을 판매한다. AI 반도체는 칩만 잘 만들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문제다. 엔비디아의 경우 수만 개의 프로세서를 연결하는 네트워크 장치를 판매한다. 2006년 개발한 소프트웨어 개발 생태계 ‘쿠다(CUDA)’를 기반으로 했다. 쿠다는 그래픽처리장치(GPU)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엔비디아 AI 경쟁력의 핵심이다.
실패 원인 4│경직된 기업 문화와 인재 유출
관료주의적이고 경직된 문화도 인텔이 AI로 인한 상황 변화에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한 원인으로 꼽힌다. 최근 물러난 한 인텔 이사회 멤버는 “인텔의 위험 회피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문화에 실망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인텔의 문화가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중요한 파운드리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첨단 기술기업이 혁신 동력을 잃는 순간 인재 유출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겪게 된다. 인텔도 예외는 아니다. 사업 성과 부진에 조직 개편 등이 겹치자, 수석 아키텍트로 GPU 사업부를 맡았던 라자 코두리 부사장이 2023년 퇴사했고, 데이터센터용 CPU 담당 부사장 리사 스펠만은 지난 7월 인텔을 떠났다.
퀄컴의 인텔 인수가 실제 성사될지는 미지수다. 독점 문제로 세계 각국의 시장 경쟁 당국의 반대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지난 6개월 사이 40% 가까이 빠질 만큼 좋지 않은 주가 흐름이 어려움을 더한다.
Plus Point
사과문까지 낸 삼성,
“인텔 전철 밟나” 위기감 고조삼성 반도체 수장인 전영현 DS부문장(부회장)이 올 3분기 실적 발표 후 이례적으로 고객과 투자자, 임직원을 대상으로 사과문을 냈다. 전 부회장은 “많은 분께서 삼성의 위기를 말씀하신다”며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인정한 뒤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 복원’을 당면 최대 과제로 꼽았다. 그는 “완벽한 품질 경쟁력만이 삼성이 재도약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삼성전자의 올 3분기 영업이익은 9조1000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전년 동기 대비 274.5% 늘었지만, 직전 분기와 비교하면 12.8% 줄었다. 시장 전망치(10조7719억원)를 15.5% 밑돌았다.
전 세계 주요 반도체 회사 중 설계와 최첨단 제조 공정을 모두 하는 종합 반도체 기업(IDM)은 인텔과 삼성전자뿐이다. ‘지금 위기인 건 인텔인가, IDM 자체인가’라는 질문이 나오는 이유다.
삼성의 경우 AI 반도체인 고대역폭메모리의 엔비디아 납품이 늦어지면서 위기감이 커졌다. 지난 5월 반도체 CEO가 경질된 지 5개월이 지났는데도 개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목표 주가를 반 토막으로 낮춘 증권사가 나올 정도로 시장 신뢰를 잃었다. 대중국 수출 물량도 중국 CXMT(창신메모리) 등에 잠식당하면서 PC용 D램 등 범용 제품 판매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사상 첫 파업까지 일어나는 등 조직 문화도 예전 같지 않다. 삼성 위기론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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