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깎지 말라’는 게 대법원 판례? 잘못 알려진 임금피크제의 진실

조문희 기자 2024. 10. 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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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 도입 이유로 무조건 임금 삭감하면 ‘부당’
업무 내용·근로시간 조정하고 복리후생 유지하면 ‘합당’

(시사저널=조문희 기자)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만을 이유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것은 무효다."

2022년 5월26일 나온 대법원 판례에 세상이 떠들썩했다. 한국전자기술연구원에 재직하던 A씨가 임금피크제 도입은 부당하다며 낸 소송으로, 8년에 걸친 분쟁 끝에 승소 판결을 받았다. A씨는 만 55세부터 정년인 61세까지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았는데, 업무 내용이나 목표 수준의 조정이 없었는데도 월 급여가 93만원에서 최대 283만원까지 깎였다. 대법원은 "연령을 이유로 한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에 해당한다"며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 이후 임금피크제 분쟁이 크게 늘어났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을 자세히 뜯어보면, 임금피크제 적용이 마냥 부당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 판결이 임금피크제와 관련해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고 보는 시각이 합당하다. 임금피크제 도입은 정년 연장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이니만큼, 특정 조건을 충족했다면 합리적이라는 판단이다. 합당한 임금피크제는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것일까.

2022년 6월8일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임금피크제 대법 판결 쟁점과 대응방안'을 주제로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임금피크제 분쟁 건수, 1년 만에 2배로

임금피크제는 말 그대로 특정 시기에 임금이 '피크(고점)'를 찍고 순차적으로 삭감되는 것을 말한다. 채용 당시 보장하기로 한 정년까지, 혹은 정년을 넘어서까지 근로자의 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조치다. 연차가 쌓일수록 자연스레 연봉이 높아지는 호봉제 성격을 띠는 한국의 임금체계에서, 정년이 다가온 근로자의 고용 불안을 줄이는 동시에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고안됐다.

임금피크제의 유형은 △정년을 보장하는지 △정년을 연장하는지 △퇴직 후 재고용하는지에 따라 3가지로 나뉜다. 몇 년 동안 얼마나 임금을 깎을지에 대한 기준은 노사 간 단체협약에 따라 논의될 수 있다. 노조가 없다면 근로자 과반의 의견을 청취하거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산업군마다, 회사 규모에 따라, 임금피크제 대상자 수 등에 따라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사례별 임금 감액률도 천차만별이다.

근로자 입장에서 장단점은 명확하다. 늘어난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다달이 받는 돈이 줄어든다. 특히 퇴직금 정산은 통상 퇴직 직전 3개월 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임금피크제로 인해 퇴직 전 임금이 낮아진 상태라면 더 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소송이 늘어난 것도 그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문 열람 시스템에 따르면, 2015년 23건에 불과하던 임금피크제 관련 소송은 2022년 131건, 2023년 243건으로 크게 늘어났다. 2016년부터 공공기관을 시작으로 법정 정년이 연장됐는데, 그 후로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은 퇴직자가 많아지면서 관련 분쟁도 늘어났다는 게 법조계의 해석이다. 특히 2022년 대법원의 '임금피크제 무효' 판결이 트리거가 됐다고 보고 있다.

소송에서 근로자들이 대부분 패소하는 게 현실이다. 노무법인 재일 소속 조성연 노무사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임금피크제가 부당하다고 보지 않는 게 사실"이라며 "임금을 깎되 보전할 수 있는 조치를 동반했다면 기업이 패소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근로자 대부분 패소"…임금피크제 '이 조건' 확인해야

단 '합당한' 임금피크제에는 '합리적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2022년 대법원 판례는 가이드라인으로 통한다. 당시 판결에서 재판부는 임금피크제의 전제조건으로 △도입 목적의 타당성 △대상 근로자의 불이익 정도 △임금 삭감에 대한 조치 △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재원 사용 목적 등을 제시했다. 바꿔 말하면, 임금 삭감에 따른 보전 조치가 합리적이지 않거나, 감액된 재원으로 신규채용 확대 등의 본래 계획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면 '차별적'이란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임금을 줄이되, 그에 맞게 근로시간을 줄이거나 목표 수준과 업무 내용을 조정했다면 '합리적 보전 조치'를 수반했다고 본다. 임금피크제 적용 근로자에게도 상여금 등 복지후생 정도를 똑같이 유지했다면 대부분 승소 판결을 받았다. 임금 감액 정도와 속도는 사례마다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성연 노무사의 설명에 따르면, 통상 임금 감액률이 60%를 넘으면 과도하다고 본다.

일례로 지난해 5월 KB신용정보의 전현직 직원 4명이 제기한 임금 및 퇴직금 청구 소송에서 사측이 패소했다. 재판부는 임금 총액 삭감 수준이 과도하다고 판단했다. 같은 시기 부산시설공단 퇴직자 43명이 제기한 소송에서도 근로자 측이 승소했다. 임금피크제에 따른 업무량 조절과 담당 업무 조정 등의 조치가 수반되지 않았다는 게 판결 이유였다. 반면 지난해 6월 KT는 대법원에서 확정 승소 판결을 받았다. 정년 연장 이전의 급여와 임금피크제 시행 이후의 급여를 비교했을 때 임금 총액이 오히려 늘어, 근로자의 불이익이 크지 않다고 봤기 때문이다. KT는 정년을 기존 58세에서 60세로 연장하면서 56세부터 10%씩 임금을 깎아왔다.

퇴직금의 경우에도 불이익을 최소화하려는 추세다. 2015년 관련 시행령 개정으로 퇴직금 중간 정산 요건이 완화돼, 임금피크제로 전환하는 근로자의 임금이 줄어드는 경우 중간 정산을 가능하게 했다. 임금이 감액되기 전을 기준으로 퇴직금을 사전 지급하는 방식이다.

임금피크제 제도 자체가 위법이라는 판례는 아직 없다. 다시 말해, 임금피크제 도입에 합당한 이유가 있고, 그에 따른 근로자의 불이익이 크지 않다면, 법정 싸움으로 번지더라도 구제될 가능성은 낮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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