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당시 고3이었습니다. 1993년은 우리나라의 대학입학시험이 대학입학 학력고사에서 대입수학능력평가로 바뀐 원년이었는데 당시 원년에는 여름 수능(1993년 8월 20일)과 가을 수능(11월 16일)을 두 번 치렀기 때문에 여름 수능에서 대학입학을 위한 점수가 나온 이후 대부분의 학생들은 풀어졌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을 야구는 열렸고, 10월 18일부터는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가 코리안 시리즈에서 맞대결을 치르게 됐습니다.
1993년 10월 21일, 광주에서 2연전을 치르면서 1승 1패를 기록한 양 팀은 대구로 이동해서 3차전을 치르게 됐습니다. 저는 당시 T, S라는 친구들과 매일 붙어 다녔는데 그 친구들은 각각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의 열혈 팬이었습니다. T, S와 저는 학교에서 실시하는 야간 자율학습에 들어가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이 경기를 접했습니다. 저는 한쪽 손에 이어폰을 숨긴 채 귀에 대고 라디오 중계방송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야간 자율학습은 6시부터 8시 50분까지 진행이 됐는데, 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학생들은 대부분 풀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리에 조용히 앉아만 있으면 뭘 하건 크게 혼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신 저나 T, S 모두 경기를 좀 보고 싶었기 때문에 50분 자습-10분 휴식에서 50분 단위의 자율학습 시간이 끝나면 셋은 TV가 나오는 빈 교실로 모였습니다.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궁금했던 점들을 셋이 서로 이야기 하면서 복도를 지나고 잠깐이지만 교실에서 화면을 보면서 – 볼륨까지 높이지는 못했습니다. – 그 궁금했던 점들을 해소했습니다. 그렇게 학교의 빈 교실에서 10분 씩 야구를 보고, 저녁 8시 50분,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자마자 저희 셋은 뛰었습니다. 학교에서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작은 전파상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TV를 볼 수 있었거든요.
셋은 그 앞에 모여서 한 이닝 가까이 봤습니다. 그 때 나눴던 다른 대화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삼성 팬이었던 T의 이 한마디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박충식이야! 이길 수 있어!”
사실, 자율학습 1교시, 2교시를 마치고 빈 교실로 향할 때도 T는 계속 ‘우리는 박충식이 계속 마운드를 지키고 있어.’라고 하면서 그의 활약을 강조했습니다. 해태 팬인 S도 ‘우리는 벌써 선동열까지 나왔는데.’라면서 불안해했습니다.
아마 전파상 앞에서 셋이 화면을 볼 때, 해태가 투수가 송유석이었을 겁니다. 삼성 팬 T는 매우 흥분했습니다. 박충식의 투구에 대한 극찬과 이미 선동열을 쓰게 만든 점, 또 해태의 에이스급 투수 세 명을 모두 마운드에 올리도록 한 점등을 들면서 이 경기도 유리해졌지만 시리즈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제 삼성이 이길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해태 팬 S는 불안해했습니다. 특히 선동열이라는 국내 최고의 투수가 이미 내려가고 송유석의 공은 삼성 타자들이 선동열 보다는 쉽게 공략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표출했습니다.

우리는 삼성의 말 공격에서 균형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서로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을 했는데 세상에. 삼성 라이온즈의 마운드 위에는 여전히 박충식 선수가 있었습니다.
반면 해태 팬 S가 선동열 다음 투수라 불안해 했던 송유석은 호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역시 그는 고 하일성 위원의 단골 소개 멘트처럼
'송유석 선수는 투창 선수였기 때문에 투구에 힘을 실을 줄 알고, 그래서 타자들이 쳐도 멀리 안 가고 땅볼이 되는 선수'
였던 겁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됐는데 실은 그가 던지는 공이 투심이었다고 합니다.)
그 경기의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4시간 30분의 혈투 끝에 양 팀은 연장 15회 2:2 무승부를 기록했습니다. 박충식의 181구는 투혼으로 포장이 됐고, 해태는 문희수, 선동열, 송유석, 이 세 명의 투수가 던지면서 이 경기를 대등하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T는 득의양양했습니다. 이번 코리안시리즈는 다를 것이라고, 박충식이 너무 큰 일을 해줬다고, 비록 무승부였지만 이미 기운이 삼성 라이온즈 쪽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해태 팬인 S조차도 크게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의미를 부여했고, 박충식의 호투에 대해서는 셋이 함께 입을 모아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습니다. 특히 그가 던진 싱커의 궤적을 손으로 따라 하면서 마구(魔球)라고 칭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결과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1993년 한국시리즈 우승팀은 해태 타이거즈였습니다. 2차전 경기에서 에이스급 투수 세 명을 썼지만, 해태에는 여전히 팔색조 조계현이 있었고, 핵잠수함 이강철이 있었고, 가을까치 김정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삼성도 김상엽과 김태한 등의 젊은 에이스들로 맞불을 놨지만 2차전에서 3명의 투수가 나눠서 던진 것은 추후 이어지는 경기들에서 해태에 큰 도움이 됐고, 힘을 아낀 선동열은 이후 시리즈의 후반을 압도적인 투구를 이어가게 됩니다. 반면, 2차전에서 3:1의 외로운 싸움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던 박충식은 이어진 7차전 등판에서 2차전보다는 아쉬운 투구를 보이면서 7차전의 패전투수로 기록됩니다.
저와 T, S는 1년에 한 번 정도 만납니다. 우리 셋에게 이 시리즈는 여전히 안줏거리입니다. 이후 30년 동안 매년, 만날 때마다 이 시리즈의 박충식, 선동열, 송유석을 이야기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아마 올 겨울에 만남을 가지더라도 이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그냥 그런 강력한 느낌이 듭니다. 특히 박충식이 그 경기에서 던졌던 마구에 대해서는 지금도 감탄하면서 모두가 그 기억을 떠올립니다.

오죽하면 그 당시 동네야구를 했던 꼬마들은 다저스의 박찬호의 등장 전까지 모두 언더핸드로 던졌습니다.
“내가 박충식이다!”
라면서 말이죠.
사실 이 경기는 이후 야구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 경기와 박충식 선수의 181구를 놓고 2000년대 이후부터 ‘혹사’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됩니다. 냉정하게 말씀드려서 그 당시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 당시는 그걸 낭만과 투혼으로 포장했고, 우리는 그에 열광했습니다. 사실 혹사의 개념조차 서있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MBC스포츠+에 몸담았던 시절, ‘The Legend’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박충식 선수를 만났습니다. 당시는 호주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고, 선수협 사무총장이 되기 직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박충식 선수는 그 당시 181구를 혹사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때 그렇게 던진 이후에 바로 아팠다면 모르겠는데, 이후에도 제가 10승을 몇 번을 더 했어요. 은퇴는 한참 후에 했고요.(2002년 시즌 종료 후) 저는 그 당시 181구를 던진 것이 혹사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회상 그대로입니다. 1993년 데뷔 시즌 14승을 기록한 박충식은 그해 가을 181구 투혼을 보여주고 그 시리즈에도 7차전에 선발로 한 번 더 나왔고, 이듬해에 또 14승을 기록했다. 투구 이닝은 1994 시즌이 최다로 203.1이닝을 소화했습니다. 공익근무 시 홈에서만 등판하면서 8승, 9승에 머물지만 전역 이후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하면서 데뷔 후 여섯 시즌은 말 그대로 솔리드 한 선발투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던 박충식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기자 중 한 명인 제프 파산은 투수들의 팔에 대해서 매우 정밀하게 연구하면서 ‘The Arm’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책의 큰 주제는 이렇습니다.
‘야구의 가장 큰 자산인 젊은 투수들의 팔을 보호해야 한다.’
책에 따르면 사람의 몸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투수 개개인 별로 부상이 오는 시점은 다를 수 있지만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겁니다. 첫 번째는 어린 시절의 과사용, 두 번째는 구속의 증가입니다.

1990년대 초반 박충식은 사이드암 투구폼으로 시속 130km후반에서 140km대 초반의 속구를 던졌는데 이는 지금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빠른 축에 속합니다. 현재 사이드암으로 선발 역할을 소화하고 있는 두산 최원준의 포심 시즌 평균 구속은 시속 137km이고, SSG 박종훈은 올시즌 포심 134km, 투심 132km였습니다. 리그를 대표하는 사이드암 선발투수 KT 고영표의 포심과 투심 구속도 시속 134km이니 당시 박충식 선수는 사이드암, 언더핸드 계열의 투수로는 지금을 기준으로 놓고 보더라도 강속구를 던지는 선수였습니다.
그런 강속구 투수가 1년차에 155.2inn을 던지고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그것도 전력투구를 기본으로 하는 코리안시리즈에서 15이닝 동안 181구를 던졌습니다. 심지어 한국시리즈의 등판은 플레이오프에서 11이닝을 소화하고 나서였고, 7차전에 나서서는 4.2이닝을 더 던졌습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1994년에는 203.1inn을 던졌으니 만 23세, 24세의 투수의 어깨로는 분명한 과사용이었습니다.
그 이후 이어진 방위병 복무시절의 홈경기 출전은 나름 그의 팔에 휴식을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2년 동안 또 200이닝이 넘는 이닝을 소화합니다. 1996년에는 방위병의 홈경기 투입도 금지가 되면서 전반기는 휴식을 취했지만 제대 이후 또 선발과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89.2이닝을 던지면서 8승에 12세이브를 기록했습니다. 1994년부터 LG 트윈스 이광환 감독이 스타 시스템을 통해 KBO에 선발 로테이션이라는 5선발 시스템을 뿌리내리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는 했지만, 그 과도기에 박충식은 거의 매년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등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은퇴 이후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부터, 그의 15이닝 181구는 여러 측면에서 재평가됐습니다. 비록 당사자는 당시의 투구를 ‘혹사가 아니었다.’고 말할지 몰라도 이후 벌어진 유사 사례들이 등장하면서 당시의 181구는 혹사로 봐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이죠.
- 바로 이듬해였던 1994년 한국시리즈, 태평양의 국가대표 출신 좌투수 김홍집은 1차전에서 141구 완투를 하다 김선진에게 홈런을 허용하고 패전투수가 됐습니다. 역시 역대급 명승부 중 하나였으나 그 141구 이후 김홍집은 다시 빛나지 못했습니다.
대학 시절 구대성, 이상훈과 함께 3대 좌완으로 꼽혔던 그는 1994년 승률왕 타이틀이 프로에서의 유일한 타이틀이 됐습니다. 김홍집은 2003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했습니다.
- 2004년 코리안시리즈 삼성 배영수는 완투는 아니었지만 10이닝 116구 노히트노런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수립했습니다. 물론 이후 투수가 교체되면서 정식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아직까지도 야구팬들의 기억에 선명한 어마어마한 투구를 했죠. 당시 배영수의 투구는 이 경기만 기억이 날 수도 있지만 그는 그 해의 한국시리즈에서 무려 23이닝을 던졌습니다. 선발로 3경기, 불펜으로 한 경기를 나갔습니다.
이후 배영수는 2007년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기 전까지 팔꿈치통증을 앉고 살아야 했습니다.
“재활 이후 구위 회복에 있어서는 수술을 받을 당시의 팔꿈치 상태도 중요한데 당시 집도했던 의사에 따르면 너무 늦게 왔다고 했어요.”
물론 배영수는 이후 2019년까지 선수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선발로서 시속 150km를 넘는 불꽃을 던지던 배영수는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현대 야구에서 이제 이런 투혼의 투구를 강요하는 팀은 없습니다. 기록으로만 살펴보면 1994년 김홍집의 141구 이후에는 코리안시리즈에서 한 경기 130구 이상의 투구수를 기록한 선수도 2016시즌 두산 베어스의 보우덴이 유일했습니다. 심지어 그 보우덴 또한 2017시즌 어깨충돌증후군으로 한국과 작별을 고했습니다.
이제는 포스트시즌 투수 교체의 타이밍은 빠른 것이 좋다는 것이 일반론처럼 자리 잡고 있고, 2024년에 지금까지 벌어졌던 대부분의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각 팀은 불펜진의 물량공세라는 비슷한 양상의 투수교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원태인 선수의 어깨 부상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21일 66구 투구 이후 4일 휴식, 26일 78구 투구. 이 투구수 자체로만 보면 큰 무리가 되지 않아 보이지만 26일 경기의 투구수를 뜯어보면 1회 32구, 2회 23구, 3회 23구로 마운드에 오르는 이닝 마다 투구수가 많았습니다.
원태인 선수는 MRI 검진을 했고 그 결과 우측 어깨 관전 와순 손상, 관절 내 출혈과 붓기 증상, 어깨 회전근의 힘줄염까지 동반되어서 4~6주 재활이 필요한 상태라고 합니다.
원태인 선수의 부상이 큰 부상이 아니길 바랍니다. 또 양 팀 31년만의 코리안 시리즈 남아있는 경기들이 더 이상의 부상 없이 명승부 경기들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