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피치] 우리 시대의 마구, 포크볼(feat. 정명원 투수 코치)

애초 ‘머니피치’에서는 각 팀의 결정적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런데 팀의 결정적 순간은 대부분 우승의 순간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다양한 이야기를 얽히고설키게 한다고 해도 식상한 소재의 나열에 그칠 확률이 높다. 그래서 단순히 팀의 결정적 순간만이 아닌 선수나 지도자, 그리고 관계자의 모멘텀이 된 순간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KBO리그 역대 최고 포크볼로 손꼽히는 정명원 KIA 투수 코치의 포크볼 그립. (사진=머니피치)

KBO리그에서 노히터는 1984년 해태 방수원을 시작으로 해 15명의 투수가 달성했다. 그 가운데 정명원 KIA 투수 코치는 유일하게 포스트시즌, 그것도 한국시리즈에서 노히터라는 위업을 세웠다.

1996년 10월 20일, 인천 도원야구장에서 현대와 해태(현 KIA)와의 한국시리즈 4차전이 열렸다. 시리즈 전적 1승 2패로 뒤진 현대의 선발 투수는 정명원. 이해, 그는 세이브왕에 올랐지만 쌍방울과의 플레이오프에서 2경기에 나와 평균자책점 6.75를 기록하는 등 부진한 투구를 보였다. 다만 ‘연전연투’로 팀 마운드가 고갈된 상황 등도 있어 선발로 나서게 됐다.

“간절함밖에 없었다. 그 경기를 지면 팀이 벼랑 끝으로 몰리니까, 무조건 막는다는 생각으로 나섰다. 그래야 다음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 또 개인적으로도 마무리를 하다가 부진해 선발로 나선 상황이었다. 그런 팀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고, 여기서 결과를 못 내면 내 자리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런 간절함이, 제일 절실했던 것 같다.”

그런 절실함을 품고 마운드에 올랐지만 1회부터 위기를 맞이한다. 1번 타자 이종범에게 볼넷을 허용한 뒤, 2번 타자 동봉철은 몸 맞은 공을 내준 것. 이어 홍현우의 희생 번트로 1사 2, 3루의 실점 위기에 몰렸다. 여기서 4, 5번 타자를 잇따라 잡아내며 위기 탈출. 이후로는 딱히 위기나 안타성 타구도 거의 없이 4사구 3개만 내주며 노히터를 달성한다.

정명원 투수 코치가 노히터를 의식한 것은 “9회가 됐을 때”라고 한다. 해태 선발 이대진(현 한화 수석 코치)도 역투를 펼쳐 “8회까지는 점수가 나지 않아 전혀 의식을 못했다. 0-0으로 쭉 가다가, 우리가 8회 말에 점수를 내고 노히터 중이라는 걸 의식했다.”

선발 출장해 8회까지 함께한 포수는 김형남. 이해 입단한 신인(2차 6라운드)으로, 정규 시즌에는 고작 5경기에 대수비 등으로 출장하는 데 그쳤다. 그런 신인 포수와 처음 배터리를 이룬 만큼 호흡 문제도 있을 법한데, 정 코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금으로 치면 프레이밍 등 포수 수비가 뛰어났다. 또 투지도 좋았다. 여기에 구종 선택 등은 내가 했지만, 내 투구 리듬을 살려주는 리드를 했고, 그게 큰 도움이 됐다.”

현역 시절, 정명원 투수 코치는 강속구와 포크볼, 그리고 싸움닭 기질로 상대 타자를 압도했다. (사진=현대 제공)

9이닝을 완투하며 기록한 투구 수는 106구. “그날은 마음먹은 대로 공이 들어갔다”라며 “특히 빠른 공이 위력적이었다”라고 덧붙인다. 현역 시절 정 투수 코치의 주 무기는 빠른 공과 포크볼이었다. 양상문 SPOTV 해설위원은 “KBO리그에서 포크볼의 원조라고 해도 틀림없을 정도로 ‘급’이 달랐다. 속구처럼 날아오다가 떨어지는 정말 빠른 포크볼을 던졌다”라고 회상한다.

확실히 이날도 포크볼의 숨은 효과는 있었다. “평소 내 스타일대로 공격적인 투구를 펼쳤다. 또 상대인 해태 타자들도 주 무기인 포크볼을 의식해 이른 볼카운트에서 적극적으로 배트가 나왔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후, 포크볼을 활용하는 정도였다.”

어느 리그에서나 이름을 떨친 투수나 지도자는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훌륭한 속구가 있으니까 변화구도 산다.” 아무리 뛰어난 변화구가 있다고 해도, 그 공만 ‘줄창’ 던져서는 타자를 제압하기는 어렵다. 타자의 눈에 익기 쉽고, 또한 타자의 노림수도 좁혀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투수는 속구의 위력을 높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의미다.

거꾸로 강력한 결정구로 변화구가 있으면, 타자는 1996년 한국시리즈 4차전의 해태 선수들처럼 이른 볼카운트에서 승부를 보려고 한다. 그만큼 투수가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

현역 시절, 정명원 투수 코치의 포크볼은, 타자에게는 넘을 수 없는 큰 벽이었다. 노리고 있어도 공략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철옹성. 그 포크볼을 앞세워 KBO리그 첫 40세이브 달성(1994년)을 비롯해 2차례 세이브왕과 선발로는 평균자책점 1위(1998년)에 올랐다. 통산 평균자책점은 2.56. 이것은 1,000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 가운데 선동열과 최동원에 이은 역대 3위에 해당한다. 그가 이런 대투수로 이름을 남긴 데는 포크볼을 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 포크볼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포크볼 그립은 선수마다 다 다른 것 같다. 나는 실밥에 걸치지 않았지만, 실밥 위에 손가락을 놓는 선수도 있고, 다양하다. 어쨌든 포크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높이와 속도인 것 같다. 포크볼이 제일 효과를 보려면, 떨어지는 공이니까 일단 팔 높이가 높아야 하고, 구속도 나와야 한다. 구속이 느리면 포크볼보다는 체인지업성 공으로 분류한다.

나는 다른 투수들보다 빠른 공을 던졌고, 포크볼도 꽤 빨랐다. 그렇기에 타자는 내 포크볼을 속구로 생각해 배트가 나온 듯하다. 그만큼 많이 속아준 거다.

사물에 대한 연구심과 향상심이 필요

내가 포크볼을 처음 배운 것은 1992년이다. 그때 태평양은 미국 플로리다에서 스프링캠프를 차렸는데, 존 세인이라는 인스트럭터가 함께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 투수 코치였는데, 투수들에게 서클체인지업과 포크볼을 이론적으로 가르쳐줬다. 그러면서 본인에게 맞는 것을 찾아보라고 조언했다. 그립 등을 이리저리 응용하며 던져보니까 나에게는 포크볼이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포크볼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특히, 세트 포지션에서 구사하기 어려워 애를 먹었다. 그래서 1992년에는 주자가 없을 때만 한 번씩 던졌다. 나름 포크볼을 자유자재로 던지게 된 것은 1994년부터다. 그 사이에 정말 많은 노력과 궁리를 했다. 그립이나 던지는 감각 등에 변화를 주면서 말이다.

정명원 투수 코치는 선수들에게 항상 연구심과 향상심을 가져라고 조언한다. (사진=KIA 제공)

사실 처음에는 내 포크볼의 구속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그런 포크볼이 1994년에 빨라진 데는 공 쥐는 법에 변화를 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손가락에 꽉 끼워서 던졌는데, 여러 시도 끝에 꽉 끼우지 않고 살짝 끼우는 형태로 변화를 준 게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지금 생각해보면 포크볼 그립에서 스플리터와 같은 형태가 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까 구속도 나오고, 속구처럼 빠르게 가다가 뚝 떨어지는 나만의 포크볼이 완성됐다.

현역 시절도 그렇고, 지도자 생활을 하며 포크볼을 던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를 물을 때마다 꾹 누르듯이 던지는 데 있다고 말해준다. 흔히들 투수가 속구를 던질 때 뿌리듯이 던진다고 하는데, 좀 눌러줘야 한다. 공을 끼운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에 같은 힘으로 꾹 눌러주면 속구처럼 빠르게 날아가다가 뚝 떨어진다.

포크볼을 손가락에서 빼는 느낌으로 던지는 투수도 있지만, 나는 스냅(손목을 안쪽으로 빠르게 꺾는 동작)을 주듯 꾹 눌러준다는 느낌으로 던졌다. 또 나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실밥을 잡지 않았으니까 무회전으로 간다. 이 무회전에 공을 눌러주는 게 더해져 남들보다 빠른 포크볼을 던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히터를 달성할 때의 영상을 봐도 알 수 있듯 내 포크볼은 잘 제구가 됐다. 일찍 떨어져 땅바닥에 패대기 치는 공을 던진 적이 없다. 즉, 포수가 도저히 블로킹 등으로 막을 수 없을 때가 없었다. 속구처럼 똑바로 오다가 타자 앞에서 떨어지니까 적어도 포구를 못해도 몸으로 막을 수는 있었다.

타깃은 기본적으로 스트라이크존을 삼았다. 스트라이크존에서 볼존으로, 그것도 수직으로 떨어지게끔 던졌다. 물론, 이것은 결정구일 때 이야기이고, 이른 카운트에서 스트라이크를 잡을 때는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떨어지게끔 조절했지만. 요컨대 포크볼을 원하는 곳에 던질 줄 알았던 거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제대로 포크볼을 던지는 투수는 NC (이)용찬이 정도밖에 없다. 사실 포크볼만이 아니라 좋은 공을 던지는 투수가 드물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정명원 투수 코치는 근육의 기억을 중시하는 지도자다. 근육이 투구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반복 연습은 필요한 법이다. (사진=KIA 제공)

하나의 구종을 익히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린다. 아주 예외적으로 금방 배워서 실전에서 써먹는 선수도 있지만 대개 2~3년은 연습해야 한다. 여기서 구종을 익힌다는 것은 그냥 던질 줄 안다는 게 아니라, 볼카운트 3-2에서도 자신 있게 던질 수 있는 수준을 뜻한다. 그런데 최근 젊은 투수는 공 몇 개 던지면 딱 끝낸다. 몸을 푸는 정도로 공을 던지곤 하루 할당량을 채웠다는 듯이 그만 던진다.

그러다 보니 기술 습득이 더디고 체력도 약하다. 게다가, 일정 수준 이상의 부화를 견뎌내는 힘, 즉 멘탈도 약할 수밖에 없다. 분명히 투수의 어깨는 관리되어야 하지만 과보호만 받아서는 좋은 공을 던지기는 어렵다. 맨날 50m만 던지고 있는데 어떻게 50m를 넘어 60m를 던질 수 있겠는가.

새로운 구종을, 혹은 현재 던지고 있지만 그 완성도를 더 높이려면 연습을 통해 감각을 익히고 더 좋은 공을 던지기 위해 이리저리 궁리하는 탐구심이 있어야 한다. 그 지난한 과정을 견뎌내면서 체력은 물론이고, 멘탈도 강해진다. 그런 노력과 향상심이 있을 때 더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명원 투수 코치에게 포크볼은 어떤 공일까? 그 물음에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공”이라고 잘라 말한다. “프로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인가 특출함이 있어야 한다. 공이 빠르거나 제구가 좋거나 하는, 그런 점에서 나는 포크볼이 특출했다고 생각한다. 그 포크볼이 있어 오랫동안 마음껏 야구를 했고, 유니폼을 벗은 후로는 지도자 생활을 쭉 해올 수 있었다.”

정 코치가 한국야구를 상징하는 대투수인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과 선동열 전 감독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데는 포크볼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고교 2학년 때까지는 키도 지금처럼 크지 않아 동네 편의점처럼 흔한 평범한 투수였다. 그러다가 고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철 연습에서 발목을 다친 후 키가 크게 자랐다고 한다. 체격이 커지며 타자로 탈바꿈해 타격 실력 하나로 원광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다만 원광대에서도 수비를 못해 대학교 3학년 때, 이번에는 야수에서 다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게 됐다. 애초 프로는 기대도 하지 않고 실업팀(농협)에 입단할 예정이었지만 빠른 공과 성장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태평양이 1989년 드래프트에서 2차 2라운드에 지명해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입단 첫 해 스윙맨처럼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11승을 올렸고, 1991년에는 두자릿수 승리와 세이브를 올리는 진기록도 세웠다. 이후, 어깨 부상으로 2년 간 거의 개점휴업.

그 밑바닥에서 다시 최고의 위치로 끌어올린 주 무기가 포크볼이다. “1991년까지는 슬라이더 각이 밋밋해 왼손 타자를 상대할 때 어려움을 겪었다. 오른손 타자는 투심이 있어 슬라이더도 살 수 있었지만 왼손 타자에게는 자신 있게 던질 공이 없었다. 그 해결책으로 찾은 게 포크볼이며, 나를 최고의 반열로 올려준 공이기도 하다.”

관련 링크 : 우리 시대의 마구, 포크볼(feat. 정재훈 코치)

* 이 칼럼은 프로야구 OB모임인 사단법인 일구회의 협조를 받아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