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쿠스라는 이름이 차츰 희석됐고, G80, G70 같은 하위 라인업들이 속속 합류하면서 브랜드로서의 제네시스가 자리를 잡자 EQ900은 드디어 G90이라는 본명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는데, 2018년 출시된 페이스리프트 모델 G90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스파이샷이 돌아다닐 때부터 페이스리프트 치곤 뭔가 심상치 않다 싶더니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직전 모델이 어떻게 생겼는지 순간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외관이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보통 수선이 용이한 그릴이나 범퍼 휠 디자인을 선보이는데 그치는 반면 보닛부터 측면 팬더 트렁크 패널까지 부분 변경이라고 하는 게 어색할 정도로 대대적인 변화였습니다.

향후 제네시스의 새로운 얼굴이 될 오각형 크레스트들이 일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램프가 독특한 인상을 만들어내는 전면부, 측면은 헤드램프에서 뻗어 나와 펜더까지 길게 이어지는 방향지시등 클래식카에서나 볼법한 불판 형태의 휠로 존재감을 강조했습니다.

뒷모습도 독특했는데요 길쭉하게 뻗은 두 줄의 램프로 가로선이 더욱 강조되면서 차가 훨씬 낮고 넓게 느껴졌습니다. 방향지시등 켜면 의사 표현이 정말 확실하게 보입니다.

수소전기차 넥쏘에서 처음 선보인 보행자 안전 가이드가 추가된 후진등, 그릴에 맞춰 오각형으로 만든 머플러팁 등 깨알 같은 디테일도 돋보였습니다. 트렁크 리드의 스포일러 역할을 하는 엣지를 더해 무게감을 덜어낸 것도 좋았습니다.
또 날개 엠블럼 대신 중앙의 레터링을 새겨 넣었는데 아직 인지도가 낮은 만큼 브랜드의 이름을 분명하게 가긴 시킬 수 있는 레터링을 넣었고, 램프의 형상이 날개와 비슷해 하나의 거대한 엠블럼처럼 보이도록 유도했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습니다. 특히 다이아몬드의 빛을 비추었을 때 산란하는 형태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G-매트릭스 패턴을 적용해서 차에 이곳저곳 새겨 넣은 것도 신형 제네시스를 상징하는 디자인 포인트였죠

G90은 중후함과 약간의 스포티함이 공존했던 EQ900과 달리 아유 중후함의 모든 스탯을 찍은듯한 생김새로 타깃 고객의 연령대를 낮춰온 그동안의 행보와는 달리 오히려 연령대를 높여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나 마피아 보스가 타야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이 고풍스러운 분위기 때문인지 오래전 기억 속에 대우 아카디아나 링컨이 떠오른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제네시스만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반영해 초기 모델에 남아있던 현대스러움이 말끔하게 해소됐고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정말이지 브랜드의 기함 다운 포스를 뿜어내긴 했습니다만 멋진 디자인인가에 대한 물음에는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디자인을 갈아엎었다는 것 자체도 당시 지적을 피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TWO-LINE 패밀리룩이 완벽하게 자리 잡은 지금에야 과도기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나름 프리미엄 브랜드의 플래그십 모델인데 이전 모델의 인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달라졌다는 것은 아무리 헤리티지를 논할 수 없는 신생 브랜드라지만 줏대마저 없어 보였습니다. 국내에서나마 EQ900이라는 이름을 쓰던 차와 전혀 별개의 차처럼 느껴지니 한편으론 다행일 수도 있겠습니다.

환골탈태 수준으로 달라진 외관에 비해 실내의 변화는 미미했습니다. 호평받은 부분까지 굳이 수정하기보다는 편의 장치와 조작 편의성을 개선해 내실을 다지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직전 모델의 구성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버튼의 개수를 줄여 직관성을 높였고, 새로운 내장 소재와 컬러 마름모꼴이었던 가운데 송풍구를 부드럽게 다듬는 등 곳곳에 디테일을 손봐 신형이라는 느낌을 전달했습니다. 실제로 질감이나 컬러가 달라지니 전혀 다른 인테리어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날로그시계는 이번에도 메이저 브랜드와의 협업은 없었지만 제네시스 로고를 깨알같이 새겨 넣었습니다. 이외에도 제네시스 전용 UI를 적용해 현대차와 차별화된 그래픽을 제공했고, 센터 모니터의 풀 터치를 제공하는 등 전작에서의 지적을 수용해 발 빠르게 개선한 점도 칭찬할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터널이나 지하차도에 들어서기 전 자동으로 창문을 닫아 외기 유입을 막아주는 등 여전히 탑승객을 위한 배려가 엿보였고, 내비게이션은 무선 업데이트(OTA)를 지원했습니다. 호화로운 뒷좌석도 여전했습니다만 듀얼 모니터에 터치스크린과 각도를 전동으로 조절하는 기능은 이번에도 추가되지 않아 TV를 보고 싶으면 기사님에게 부탁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런 거 참 사소하지만 VIP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이 급의 차를 2% 부족해 보이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전반적으로 누가 집어주지 않는 이상 변화를 체감하긴 쉽지 않았지만 직전 EQ900에서도 세련됐다는 평가를 받았던 만큼 인테리어는 여전히 현역이었고, 중후해진 외관 디자인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다만 휘황 찰나는 불빛으로 소비자들의 눈길을 끄는 경쟁 차들과 달리 여전히 밝기의 인색한 앰비언트 라이트 아반떼와 비교해도 별반 차이가 없는 한없이 가벼운 방향지시등, 와이퍼 레버의 조작감, 하위 모델에는 3D 계기판까지 들어가는 마당에 꿋꿋이 아날로그 계기판을 고수하는 등 직전 모델의 아쉬움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 섭섭한 부분입니다.

보닛 아래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세 가지 파워트레인 모두 달라진 외관에 걸맞은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주행 질감을 제공했습니다.

추가로 사이드미러에 달린 카메라로 사각지대를 비추는 후측방 카메라를 옵션으로 마련하고, 전방에 코너나 주의 구간을 미리 인식해 감속하는 내비게이션 기반 크루즈 컨트롤, 업그레이드된 고속도로 주행보조 시스템(HDA) 등 보다 진보한 ADAS를 기본 사양으로 탑재해 더욱 편안하고 안전한 차로 거듭났습니다.

뒤늦게 추가된 리무진 모델은 라디에이터클이 상단 패널을 두껍게 크롬 처리해 무게감을 더하고, 시트를 리무진 전용 패턴으로 꾸며 일반형 세단과 차별화했습니다. 이후 2020년에는 전자제어 서스펜션과 매트릭스를 전 트림 기본 적용하고, 무게감을 덜어낸 19인치 멀티 스포크 휠을 추가하는 등 상품성을 강화한 연식 변경 모델을 선보였습니다.

이때 한정판 스타더스트 에디션을 선보였는데, 최상위 모델인 5.0L 프레스티지 세단을 기반으로 수작업으로 도색한 전용 투톤 컬러 외장과 마찬가지로 수작업으로 빚은 전용 인테리어로 채워 50대 한정 판매했습니다. 지난 2017년 쇼카로 선보였던 스페셜 에디션에 비해 더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이왕 한정판으로 할 거면 이처럼 더 과감하게 했어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색상 대비가 명확하니 확실히 스페셜해 보였고, 이건 손수 붓으로 경계선을 칠한 코치라인까지 있었습니다. 만만치 않은 가격에도 불구 50대가 금세 팔려 나갔다고 합니다.

'첫 번째 G90' EQ900은 선대 에쿠스에 비해 모든 면에서 눈에 띄게 진보했고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를 대표하기에 충분한 상품성으로 무장한 모델이었습니다. 평균 판매 가격이 8~9,000만 원을 훌쩍 넘기는 초호화 세단임에도 출시 3개월 만에 누적 계약이 2만여 대, 페이스리프트는 G90은 사전계약만 6,700여 대가 계약됐을 정도로 화끈하게 팔렸습니다. 하지만 대대로 출시 시기를 연말로 잡은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업의 연말 인사 시즌에 맞춰 차를 선보일 정도로 그야말로 콘크리트 같은 수요층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한 판매량이었습니다. 따라서 안방 시장을 논하는 건 딱히 의미가 없습니다.

게임은 해외 무대죠 앞서 북미에 투입된 2세대 에쿠스가 가격 대비 품질 면에서는 만족스러우나 낮은 브랜드 밸류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만큼 프리미엄 브랜드로 선보여질 이 G90의 성과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와 관심을 보냈습니다. 이후 제네시스 브랜드의 북미 진출과 함께 G90도 야심차게 대비했고, 2016년 본격적으로 수출이 시작된 이후 이듬해 2017년 누적 판매량 4,400여대를 기록했습니다.

에쿠스의 북미 판매량이 절정에 달했던 2012년보다도 높은 수치였는데 V8 엔진 단일 사양으로 5만 불 후반에 시작했던 에쿠스와 달리 더 작은 엔진으로 더 비싼 가격이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분명 의미 있는 성과였습니다. 이후 판매량이 큰 폭으로 떨어지긴 했지만 매년 평균 2000여대 이상 꾸준히 팔려나가며 세그먼트 내에서 나름의 존재감을 유지했습니다. 흔히 독삼사로 불리는 독일 프리미엄 3사 렉서스와 경쟁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링컨과 인피니티, 재규어 등이 포진해 있는 2부 리그에서는 충분한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급의 플래그십들은 브랜드의 가치를 대변하는 얼굴마담 즉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실용과 가성비의 영역이 아닌 럭셔리 즉 사치의 영역에 있는 만큼 최고 가격을 끌어올리면 제네시스는 더욱 비싼 차를 파는 럭셔리 브랜드가 되는 것이고, 이는 브랜드 가치와 판매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사람들 보는 눈이 다 비슷한지 페이스리프트 이후 미국에서도 호불호는 갈렸지만 현지 전문매체와 소수의 오너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뒤이어 등장할 진정한 제네시스 라인업들과 이 모델을 선보이는데 훌륭한 발판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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