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에 충실한 당신이 놓친 것들[살며 생각하며]

2024. 9. 2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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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삶을 영원의 척도로 보자면
빛이 한순간 번쩍이는 찰나
뜻대로 안 된다고 한탄 대신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가 중요
멀리 보고 넓게 끌어안아야
사유의 쩨쩨함 벗을 수 있어

우주의 무한함에 견주자면 지구는 바늘 끝보다 더 작은 점만 한 행성이다. 광막한 우주에서는 그토록 존재감이 없는 지구지만, 온화한 환경에서 온갖 생명체를 품은 채로 골디락스 존(Goldilocks zone)의 궤도를 돈다. 고양이와 앵무새와 전갈과 함께 이 녹색 행성에서 사는 것은 놀라운 행운이고 경이로운 일이다. 아직 지구와 질량이 같고 유사한 생태계를 가진 쌍둥이 행성을 찾지 못한 채 우리는 계절의 순환을 겪으며 나날의 삶을 꾸린다. 이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의 생존자라는 증거이고, 감사할 만한 일이다. 우리는 그 감사함을 자주 잊은 채 지구가 더 뜨거워지고 태풍은 더 사나워진다고, 종잡을 수 없는 기후재난에 불만을 터뜨릴 뿐이다.

정오 무렵 원고를 끝내고 만족감에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책상 앞에서 일어난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끼니를 해결할 만한 식재료가 없다. 나는 먹는 건 삶의 불가결한 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이 우리 삶의 형태를 빚을 것이기 때문이다. 동네의 베트남 음식점을 가서 볶음면을 먹기로 한다. 주방장은 볶음면 조리를 위해 분주히 움직일 거다. 그 음식을 받을 때까지는 약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동안 시장기에 시달린다. 기다림 끝에 나온 볶음면을 젓가락으로 말아 올려 입으로 가져간다. 볶음면의 면발은 쫄깃쫄깃하고 간은 입맛에 딱 맞다.

볶음면을 먹는 동안 꼬마벌새라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를 떠올린다. 꼬마벌새는 몸무게가 2g쯤 되는 몸통이 아주 작은 새다. 이 벌새가 하루치 열량을 취하려고 날마다 1500송이의 꽃을 방문한다니 그 활동량에 감동한다. 꼬마벌새는 긴 혀를 써서 꽃 속의 꿀을 빨아먹는다. 수컷 꼬마벌새는 암컷 앞에서 초당 100회 이상 날갯짓을 하며 구애를 한다. 꼬마벌새는 에너지 소모를 막으려고 밤에는 심장 박동과 신진대사를 멈춘 채 휴면 상태에 든다. 아, 작은 새의 하루는 참 고단하구나!

벌새는 꿀을 위해 꽃 주위를 맴돌며 초당 80회 안팎으로 날개를 펄럭인다. 벌새가 30만 회 가까이 날갯짓하는 시간은 내가 음식점에서 볶음면을 주문하고 접시를 다 비우는 시간과 맞먹는다. 그와 똑같은 시간 동안 1977년에 나사(미 항공우주국)에서 발사한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는 목성과 토성을 지나 우주 성간으로 진입해 시속 5만5000㎞로 날아간다. 내가 베트남 음식점에서 볶음면을 먹는 데 드는 시간과 보이저 1호가 우주 성간을 가로지르는 시간은 똑같지만, 그 시간에 일어나는 두 사태의 물리적 거리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는 무한의 가장자리에서 날마다 무언가를 먹고 일을 한다. 그동안 이루어지는 식물 생태계의 성장은 굼뜨고 느린 탓에 우리는 초목의 자라남을 감지하지 못한다. 느린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하고, 나무들은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분유를 먹고 방바닥을 기어다니던 아기들은 부쩍 자라나서 제 갈 길을 찾아 떠나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늙는다. 그때 우리는 아, 세월은 참 빨리 흐르는구나 하며 탄식을 할 뿐이다.

인간 삶을 영원이란 척도로 보면, 누전으로 빛이 번쩍이는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이는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다. 이를테면 2억5000만 년이란 시간은 지구를 어떻게 바꿀까? 대륙붕은 지표면 아래에서 쉬지 않고 움직인다. 이 움직임이 느린 탓에 인간은 대륙붕의 이동을 눈치채지 못한다. 2억5000만 년은 긴 세월이고, 그간 누적된 대륙붕의 이동 거리는 실로 장대할 것이다. 지질학자들은 남북 아메리카대륙은 바다를 사이에 둔 채 멀어지고, 호주는 아시아대륙에 붙는단다. 태양은 지금보다 덜 뜨겁고, 달은 지구에서 멀어져 간조와 만조의 간격도 지금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70, 80년 안팎을 생의 주기로 삼으며 무언가를 도모하고 일상의 일들을 수행한다. 우리의 삶은 현재를 감각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현재는 나룻배의 뱃머리에서 고물까지 움직이는 데 드는 시간이라고 한다.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이고, 그 사이를 오가는 물리적 시간은 순간일 테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진 현재의 시공 속에 삶이 멈추고 머뭇거린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될 테다. 현재의 소소한 일들에 충실한 당신이 놓친 것을 보려면 현재를 넘어 더 멀리 보고 더 넓게 품어야 한다. 우주에서 일상 보기, 그렇게 멀리 보고 넓게 끌어안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삶이 짧고 비루하고 잔혹하다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삶이란 기적 속에서는 고통조차 빛나는 까닭에 어느 찰나 불행마저 아름답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사는 게 늘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다고들 한탄한다. 당연한 일이다. 세계가 허락하는 한에서 우리의 의지가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 그보다는 어떻게 올바르게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곧고 바른 삶은 도덕 감정을 키우고 더 넓은 데를 조망하며 살 때 그 보상으로 주어지리라 믿는다.

넓게 보기는 좁게 보기와는 다른 형태로 우리의 시각과 사유를 바꾼다. 전자가 시간과 사물을 우주적 인식을 품고 사는 일이라면, 후자는 우리를 현실의 작은 부분과 단선적 사고에 고착시킬 것이다. 멀리 보고 넓게 끌어안는 큰 그림을 그려보는 것, 즉 시야를 넓히고 사고를 유연하게 키우며, 조망의 너비를 점에서 공간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조망의 너비를 키우면 사유의 쩨쩨함에서 벗어나고 사사로운 이익에만 매달리지 않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격은 더 너그럽고 우리는 매사 더 원만하고 진득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테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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