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승부사, 혹은 잔혹한 학살자··‘초강대국’ 쥐락펴락한 네타냐후의 1년[가자전쟁 1년]
정치적 위기 때마다 ‘확전’ 카드로 기사회생
네타냐후에 끌려다닌 미국, 대선 영향 주목
이스라엘 안팎에서 ‘비비’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타고난 승부사’라는 평과 ‘잔혹한 학살자’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1996년 첫 임기를 시작한 5선 총리인 그는 총 네 명의 미국 대통령을 상대했다. 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1996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그와 회담한 뒤 자신의 보좌관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전했다. “도대체 누가 여기서 빌어먹을 초강대국(superpower)인 거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전례 없는 전쟁을 벌인 지난 1년은 클린턴 대통령의 이 말이 다시 회자될 정도로 네타냐후 총리가 ‘초강대국’ 미국조차 쥐락펴락한 한 해였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박에도 휴전 협상을 보란 듯이 걷어찼던 그는 이제 전선을 가자지구 밖으로 확대하며 전 세계의 관심사를 ‘휴전’이 아닌 ‘5차 중동전쟁’으로 만들어 버렸다.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해 10월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 이후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하마스 공격을 막지 못한 안보 실패에, 1년간 가자지구에서 ‘초토화’ 수준의 군사작전을 벌였음에도 하마스 궤멸·인질 전원 구출이란 전쟁 목표 무엇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전쟁 기간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이스라엘에 ‘제노사이드(집단학살) 방지’를 명령하고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사는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하는 등 이스라엘의 국제적 위상도 ‘전범 국가’ 수준으로 추락했다.
여기에 이미 여러 건의 부패 혐의로 기소됐던 네타냐후 총리로선 총리직에서 물러날 경우 곧바로 부패 혐의 재판은 물론 하마스 기습을 방어하지 못한 데 대한 정치적·법적 책임을 지게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전쟁 후 네타냐후 총리와 집권당인 리쿠드당 지지율도 바닥을 쳤다. 전쟁이 장기화되며 휴전협상을 통해 인질을 빨리 데려오라는 목소리가 커졌고, 급기야 지난달 초 인질 6명이 숨진 채 발견되자 70만명이 운집한 최대 규모 반정부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만에 상황이 급변했다. 지난달 17일 레바논 전역에서 무선호출기(삐삐) 폭발 공격을 시작으로 헤즈볼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파상공세가 시작되자 네타냐후 총리 지지율도 급등한 것이다.
폴 살렘 워싱턴 중동연구소 부소장은 “네타냐후가 9개 목숨을 다 썼다고 생각했으나, 뒷주머니에 목숨 몇 개를 더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확전’은 네타냐후가 위기에 몰릴 때마다 선택한 기사회생 전략이었다. 중동지역 긴장을 극적으로 고조시켜 국내적으로는 결집을 유도하고, 대외적으로는 미국 등 점차 이스라엘에 냉담해졌던 우방을 다시 이스라엘 편으로 묶어두려는 전략인 것이다.
일례로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 공격과 인도적 위기 문제로 네타냐후 총리가 조 바이든 정부와 크게 갈등했던 지난 3월, 미국 민주당 일인자이자 유대계인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는 “네타냐후가 이스라엘의 이익보다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앞세우고 있다”며 선거를 통해 그를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네타냐후는 이런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2주 뒤 시리아 소재 이란 영사관을 폭격하는 등 오히려 전선을 확대했다.
사실상 자국 영토를 공격받은 이란이 이스라엘에 보복하자 결국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우리의 방위 공약은 철통같다”며 이스라엘을 지원했고, 네타냐후는 지난 7월 미 의회에서 연설하며 52차례 기립 박수를 받았다. 불과 몇 개월 전 네타냐후 퇴진을 주장했던 슈머 역시 기립 박수를 보낸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이번에도 네타냐후는 미국의 반대에도 레바논을 융단폭격하며 이란을 대놓고 도발했고, 이에 이란이 지난 1일 이스라엘에 탄도미사일 공격을 단행하자 미국은 다시금 이스라엘에 대한 ‘철통 방위’를 약속했다. 이스라엘과 이란이 정면충돌한다면 미국은 여야를 막론하고 ‘이스라엘 지지’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바이든 정부의 중동 특사를 지낸 제프리 펠트먼은 “확전은 네타냐후의 무죄 석방 카드”라고 말했다.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전쟁 내내 네타냐후 총리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취임 직후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강행하며 중동 분쟁이란 ‘수렁’에서 손을 떼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그는 네타냐후의 가자전쟁과 엮이며 재차 수렁에 빠진 모양새다.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 1년 내내 최대 무기 지원국인 미국의 요구와 경고를 무시해 왔고, 이에 바이든 대통령이 일시적으로 무기 선적을 보류하는 ‘초강수’까지 뒀지만 소용없었다. 바이든 대통령이 여러 차례 ‘최후통첩’을 보내고, 심지어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고함까지 친 것으로 전해졌으나 네타냐후의 ‘마이웨이’ 행보는 계속됐다. 바이든 정부의 중동 정책이 실패했으며 미국이 중동에서 사실상 통제력을 잃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더 나아가 네타냐후 총리는 이제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미 대선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기세다. 이스라엘의 ‘재보복’ 카드로 이란 내 석유시설 또는 핵 시설 타격 가능성이 제기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또 바이든 정부를 무시하고 이란과 전면전을 택한다면 현 미 대선의 박빙 구도까지 뒤흔들릴 수 있다. FT는 “민주당 내에선 바이든이 네타냐후를 통제하지 못한 것이 박빙 선거 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네타냐후가 대부분의 미국 정치인보다 워싱턴의 게임을 더 잘 알고 있다”(이스라엘 전직 외교관 알론 핑카스)는 평가도 나온다.
문제는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앞세운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이런 ‘폭주’가 중동지역에 더 큰 인도주의적 재앙을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파와즈 게르게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국제관계학 교수는 가디언에 “네타냐후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벌인 전쟁은 모든 국가가 국제법에 따라 동등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을 영구적으로 훼손했다”면서 “이번 전쟁으로 국제 질서는 큰 전환점을 맞이했고, 이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지배적이었던 미국 주도의 국제 자유주의 자본주의 질서의 쇠퇴를 의미할 수 있다”고 짚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대량 학살 행위를 미국이 전폭적으로 옹호하면서 국제법이 미국과 그 동맹국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졌고, 이는 평화와 보편적 가치를 약속했지만 그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미국 주도의 질서를 종식시킨 파열로 기억될 것”이라며 “도덕적으로 파산하고 명백히 위선적인 질서는 오래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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