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페루산 녹두·팥 추징세액 1000억원대 전망..농산물 원산지 위반 역대 최대
원산지 속인 페루산 녹두·팥
업체 40여곳 중 9곳 미증빙
관세청, 협정세율 배제 통보
“나머지 업체들도 조사 진행”
올해 두차례 현지실사 통해
‘동남부지역 재배’ 거짓 확인
페루 당국 보유자료도 미비
4년전 페루산 브라질너트도
관세 낮아진 후 수입량 폭증
“선제적 대응 왜 못하나” 비판
관세청이 지난해 페루산 녹두·팥을 수입한 국내 업체들에 대한 관세 추징 절차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본지가 제기했던 페루산 녹두·팥의 원산지 위반 의혹(9월21일자 1·5면 보도)이 사실로 밝혀진 것으로, 관세 추징액만 최대 1000억원대에 달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또 2017∼2018년에도 페루산 브라질너트에서 원산지 위반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관세청의 늑장 대응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 관세청, 원산지 증빙 못한 수입업체 협정세율 배제 통보=최근 관세청이 지난해 1∼6월 페루에서 녹두·팥을 수입한 국내 업체 9곳에 한·페루 자유무역협정(FTA) 협정세율 배제 통지서를 보내고 관세 추징 절차에 들어간 것으로 본지 취재 결과 확인됐다.
녹두·팥의 관세는 각각 607.5%·420.8%이지만 한·페루 FTA 발효로 2020년 철폐됐다. 이에 따라 국내 업체들이 페루산 녹두·팥을 수입하면 0%의 관세를 적용받게 된 상황이다.
하지만 관세청은 지난해 국내 업체들이 수입한 페루산 녹두·팥 상당수가 원산지 증빙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수입업자들이 감면받은 관세 추징에 나선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페루산 녹두·팥을 수입한 전체 업체수는 40여곳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페루산 녹두·팥 수입규모는 각각 8561.2t·371.4t으로 수입금액은 1970만3000달러·91만3000달러에 달한다.
관세청이 밝히지 않아 정확한 규모 파악은 어렵지만 녹두와 팥은 고관세 품목이기 때문에 이번 추징액 또한 적게는 수백억원에서 많게는 1000억원대에 달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원산지 위반으로 관세를 추징한 사례 가운데 농산물분야에선 역대 최대 규모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다만 관세 추징이 최종 확정되기까지는 시일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다. 통보받은 업체들은 약 한달간 이의 제기를 할 수 있고, 최종 고지서를 받기 전에도 불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관세청 원산지검증과 관계자는 “한·페루 FTA 협정에 따른 원산지 증빙을 못한 업체들에 협정세율 배제 통지서를 보냈다”며 “나머지 업체에 대한 조사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한편 관세 추징을 통보받은 국내 업체들 사이에선 대규모 소송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포착돼 원산지 위반 의혹이 법적 공방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 수입업체 관계자는 “지난해 대규모로 페루산 녹두·팥을 수입한 업체가 100억원대 관세 추징을 통보받아 법무법인 선임 등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소규모 수입업체들도 공동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 관세청 현지 조사 후 “산악지역 상업적 생산 불가” 결론…현지 유통인 서류 증빙 못해=이번 관세청 조치에는 페루 현지 조사 결과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된다.
박대출 국민의힘 의원(경남 진주갑)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관세청은 올 4월 지난해 수입이 급증한 페루산 녹두·팥 원산지 위반 의혹과 관련해 현지 실사를 다녀왔다.
관세청은 장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원산지조사와 별도로, 정보 수집은 물론 페루 관세당국과 원산지조사를 협의하고자 방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문 결과 관세청은 북서부 해안지역은 일부 대규모 농장에서 상업적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나, 동남부 산악지역은 해발 2500m 고산지대로 경작지역이 제한적이고 녹두 재배장소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관세청이 방문한 지역은 북서부 해안지역인 람바예케(Lambayeque)주와 라리베르타드(La libertad)주, 동남부 산악지역인 쿠스코(Cuzco) 등이다.
이는 본지가 파악했던 페루의 녹두·팥 재배현황과도 일치하는 결과다. 현지 교민들과 수입업체들을 취재한 결과 페루 북서부 해안지역에선 한국인들이 계약재배 등을 통해 녹두·팥을 일부 생산하고 있었으나, 쿠스코를 비롯한 동남부 지역에선 기후 등의 영향으로 재배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본지는 페루의 수출업체들이 동남부 지역에서 생산했다고 주장한 녹두·팥이 실제로는 볼리비아나 브라질에서 밀수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원산지 위반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또 관세청은 페루의 지역농업관개부를 방문한 결과 토지 임대차 상황, 재배작물 현황 등이 관리되지 않았고, 지역조세청도 녹두 등 경작물에 대한 기초자료를 보유하지 않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페루 측은 2021년 수출한 녹두의 생산관리 부족과 자료 미비를 인정하며 구매영수증 또는 관련 통계를 통해 원산지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를 관세청에 문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관세청은 8월에 2차로 페루를 방문해 원산지조사를 했다. 조사 과정에서 관세청은 현지 유통인과 농민들을 만나 증언을 받고, 서류 증빙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세청 관계자는 “현지 조사 중 중간 수집상들이 회계장부를 열람해줘야 했는데 안 보여준 부분들이 있었다”며 “다만 페루 측은 밀수된 녹두·팥은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밝혔다.
◆ 2018년에도 페루산 브라질너트 원산지 위반…녹두·팥 사태 예견 못했나=한편 2018년에도 페루산 브라질너트의 원산지 위반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관세청이 이번 사태를 미리 대비했어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브라질너트는 한·페루 FTA 협정으로 관세(기본세율 30%)가 철폐되는 품목 중 하나로, 2012년부터 단계적으로 관세가 축소돼 2020년 무관세로 전환됐다.
페루산 브라질너트 수입량은 2011년 협정 발효 후에도 거의 없다가 관세가 9%로 낮아진 2017년 1790.5t으로 급증했다. 직전연도(71.3t)와 비교하면 25배나 늘어난 수치다.
2018년에도 3817.8t이 수입되자 관세청은 수입물량에 대한 원산지 검증에 나섰고, 이에 볼리비아·브라질산 브라질너트가 페루산으로 둔갑돼 수출된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브라질너트는 아마존 밀림 속 수십년 된 나무에서 채집하는 등 제한적인 방식으로만 생산이 가능한데, 당시 관세청은 페루의 공식 생산량보다 국내 수입량이 많아지는 등 원산지 위반 혐의가 짙어지자 현지 조사를 했다.
관세청 관계자는 “수입물량 기준 상위 수입자를 대상으로 원산지 증빙을 못한 업체에 관세 추징을 했다”며 “이후로는 원산지 검증을 강화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번 페루산 녹두·팥 사태와 유사한 사례가 불과 4년 전 벌어졌음에도 관세청이 선제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송기호 법무법인 수륜아시아 변호사는 “2018년 대규모 원산지 위반 사태가 있었다면 우리 농업기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민감품목의 관세가 철폐되기 전 원산지 위반 가능성을 미리 점검했어야 했다”며 “사전에 공지하고 계도할 법적 근거나 조항이 있음에도 사실상 권한을 방기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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