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 충전에 390km를 달릴 수 있는 EV 픽업트럭이 3,000만 원도 안 한다면 어떨까? 심지어 중국산 EV도 아닌데 말이다. 꿈만 같던 일이 제프 베조스의 지원에 힘입어 현실이 되기 일보 직전이다.

현재 EV 시장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캐즘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미국 발 관세 전쟁과 미국의 EV 보조금 축소 등 시장을 위축되게 하는 악재들이 새롭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의 국면을 타계하려면 결국 지금의 내연기관과 비슷한 가격의 EV가 등장해야만 한다. 하지만 EV 가격이 내연기관만큼 내려가길 기대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며칠 전, 불가능해 보였던 것을 현실로 바꾸는 EV가 등장했다. 그것도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며, 매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장르인 픽업트럭으로 말이다. 심지어 이 차는 중국산 EV도 아니다.

슬레이트라는 이 회사에서 공개한 픽업트럭은 사이즈로 보면 콜로라도보다는 많이 작은, 소형 일렉트릭 픽업이다. 소형 해치백만 한 크기이며, 당연히 현재 미국에서 판매 중인 중, 소형 픽업트럭보다 짧고 낮다. 적재 공간은 1.5m 정도인데, 프렁크까지 있어서 이 사이즈에서 기대하는 것 이상의 적재 용량은 갖고 있다.

한편 디자인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한두 세대 전, 80년대의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디자인이어서 오히려 회사 로고를 붙인다거나 나만의 커스터마이징을 가미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취향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에게는 차라리 이렇게 여백이 가득한 디자인이 낫다. 물론 여백이라는 측면만 보자면 테슬라 사이버트럭도 비슷하긴 하지만, 이 차는 적어도 현실 세계의 픽업에 한없이 가깝기 때문에 형태 자체만으로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휠도 보는 것처럼 일명 깡통 휠이라 불리는 스틸 휠이다. 브레이크 사용량이 적은 전기차라면 이런 휠 디자인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클래식 픽업 특유의 레트로 감성을 부여하기 쉬워 어떤 소비자들에게는 꽤 선호될만한 디자인이다. 그래서인지 이 회사는 플랫 베드에 씌울 베드 캡을 비롯해 다양한 액세서리 라인업도 이미 개발 중이라 전했다. 도어 핸들도 영락없는 80년대 스타일이다. 플러시 타입처럼 화려한 액션이 없어도 상관없다. 오히려 몇천 번을 열고 닫아도 절대 망가질 것 같지 않은 기계적인 맛이 있어 매력적이다.

이렇게 화려한 장식을 억제한 건 실내도 마찬가지다. 일단 오늘날 자동차의 실내에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모니터가 없다. 그러니까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없다는 뜻이다. 대신 스마트폰으로 모든 걸 확인하고 제어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기본적인 주행 정보는 스티어링 휠 앞에 있는 작은 모니터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훌륭한 사운드를 들려줄 순 없겠지만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해줄 정도의 음질을 갖고 있는 스피커도 탑재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모니터가 없는 것만큼이나 이 차의 실내에는 버튼도 몇 개 없다. 센터페시아에 세 개의 에어컨 다이얼과 대시보드 왼쪽 구석에 몇 개의 버튼이 고작이며, 스티어링 휠 위에도 버튼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파워 윈도 버튼도 없다. 대신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윈도 크랭크가 달렸다. 그러고 보니 단순한 디자인의 에어벤트도 어딘가 모르게 80년대 감성이다.

그렇다면 픽업트럭으로써의 성능은 어떨까? 우선 전체 중량은 1,600kg으로 EV치고는 상당히 가벼운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50kg의 적재 용량을 갖고 있으며 견인 하중도 453kg이나 된다. 웬만한 소형 카라반 정도는 끌고 다니기 충분하다. 적재 용량도 가벼운 상용차로 쓰기에는 적당한 수준.

배터리 사양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일단 1회 충전에 약 390km나 달릴 수 있다고 했다. 가속력도 나쁘지 않아서 0-100km/h까지 8초 정도다. 그리고 최고 속도는 145km/h 수준. 그러니까 픽업트럭으로서는 준수한 편에 속한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겠지만 이 차의 목표 가격을 들어보면 대부분 납득할 수밖에 없다. 보조금 포함, 2만 달러 그러니까 약 3천만 원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이 회사에 관심을 가진 유명한 인물 중 하나는 바로 제프 베조스다. 물론 아마존에서 이 트럭을 대량 매입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세계에서 손꼽히는 자산가의 투자를 통해 본격 양산까지는 순항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실제 인도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요즘 거의 모든 종류의 EV들이 눈에 보이는 화려한 기능과 사양을 내세우며 좀처럼 가격을 낮출 생각을 하지 않는 가운데, 진짜로 실용성만을 고려한 EV가 태동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소식임에 틀림없다.

이쯤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자. 10인치를 훌쩍 넘는 모니터가 정말 탄소 배출 저감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현란한 라이팅 액션이 우리의 삶에 지속가능성을 가져다줄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우리의 일상에 꼭 필요한 차는 차라리 슬레이트의 픽업처럼 저렴하고 합리적이며, 만만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이동성을 확실히 보장하며 자동차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이런 차가 아닐까?
오토뷰 | 뉴스팀 (news@autoview.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