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기록으로만 설명되는 스포츠가 아니다. 숫자 뒤에는 늘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선택과 흔들림,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시간이 겹쳐 있다. 한화 이글스 하주석의 지난 1년이 딱 그렇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는 “야구를 그만둘까”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만큼 벼랑 끝에 서 있었다. FA 자격을 얻고도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고, 계약서는 기대와 달리 초라했다. 1년 총액 1억 1000만 원. 주전 유격수였던 선수에게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숫자였다. 더구나 팀은 동시에 심우준을 4년 최대 50억 원에 영입했다. 비교는 잔인했고, 하주석의 입지는 순식간에 좁아졌다.

스프링캠프도 1군이 아닌 퓨처스리그에서 시작했다. 개막 엔트리에서도 이름이 빠졌다. 선수 인생에서 가장 춥고 길게 느껴지는 겨울이었다. 이쯤 되면 많은 선수들이 마음속으로 한 번쯤은 배트를 내려놓는 상상을 한다. 하주석도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야구를 계속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털어놨다. 그 순간, 그의 곁에서 손을 잡아준 사람이 있었다. 지금의 아내, 김연정이다.
김연정은 화려한 무대 위의 치어리더로만 알려져 있지만, 하주석에게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자였다. “당신은 잘못한 사람이 아닌데, 이렇게 끝나면 너무 아쉽지 않냐.” 이 말은 위로 같았지만, 동시에 직설적이었다. 도망치지 말고 한 번 더 부딪혀보라는 메시지였다. 하주석은 훗날 이 말을 떠올리며 “그 한마디가 다시 야구를 붙잡게 했다”고 말했다. 사랑이 사람을 살린다는 말은 흔하지만, 그 사랑이 이렇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주석은 변명을 줄이고,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 환경을 탓하지 않았고, 역할을 가리지 않았다. 유격수가 아닌 2루수로 나가도 불평하지 않았고, 희생번트와 같은 작전 수행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예전 같았으면 자존심이 상했을 선택이었지만, 그는 이제 팀 안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기회가 왔다. 4월 콜업, 다시 2군행, 그리고 5월 중순 재콜업. 이 과정에서 포기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차이였다.
성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2025시즌 하주석은 95경기에 출전해 타율 0.297을 기록했다. 최근 10년 사이 가장 날카로운 타격이었다. 전반기에도 준수했지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타율은 0.314까지 올라갔다. 플레이오프에서는 타율 0.350, 한국시리즈에서도 0.313. 큰 무대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한화가 오랜만에 가을야구를 넘어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가는 과정에서 하주석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연봉과 이름값을 떠나, 그라운드 위에서 필요한 선수였다.
이 과정에서 김연정의 존재는 계속해서 언급됐다. 하주석은 “내가 못하면 아내가 욕을 먹는다”는 말을 남겼다. 단순한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더 이상 혼자만의 야구가 아니라는 인식,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생긴 뒤의 변화였다. 그는 집에 돌아가면 누군가 기다린다는 사실이 큰 안정감을 준다고 했다. 이 안정감은 성적표에는 찍히지 않지만, 선수의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다.

결혼은 하주석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 5년의 열애 끝에 김연정과 부부가 되었고,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다시 배트를 잡았다. 예전처럼 욕심을 앞세우기보다는, “안 아프고 1년을 잘 보내고 싶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이 말은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야구를 더 길게 보고 있다는 뜻에 가깝다. 한 시즌 반짝이기보다, 팀과 함께 끝까지 가겠다는 태도다.
연봉 협상 자리에서도 분위기는 달라졌다. 구체적인 액수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하주석은 “구단이 신경 써준 걸 느꼈다”며 웃었다. 1년 전의 1억 1000만 원과는 분명히 다른 평가였다. 숫자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팀은 하주석의 헌신과 반등을 인정했고, 선수는 그 신뢰를 다시 성적으로 증명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야구에서 가장 건강한 관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하주석의 이야기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성적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실패를 숨기지 않았고, 흔들렸던 시간을 부정하지 않았다. 은퇴를 고민했던 순간, FA 시장의 냉대, 2군에서의 시작. 이 모든 과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사람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김연정의 조언은 기적이 아니었다. 다만, 포기하지 않도록 붙잡아준 현실적인 사랑이었다.

이제 하주석의 목표는 분명하다. 개인 기록보다 팀 우승이다. 지난 시즌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아쉬움을 누구보다 크게 느꼈고, 그래서 다음 시즌을 더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 예전처럼 모든 걸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팀이 필요로 할 때 제 역할을 하는 선수가 되겠다고 말한다. 야구 인생의 후반부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이 태도는 오히려 더 무섭다.
하주석의 지난 1년은 “결혼 버프”라는 가벼운 말로 정리하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은퇴 위기에서 반등까지, 그리고 그 옆을 지킨 한 사람의 존재. 야구는 여전히 냉정한 세계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은 사람에게 버팀목이 된다. 하주석이 다시 배트를 들 수 있었던 이유는, 성적표 이전에 그 사실을 믿게 해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스포츠 뉴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다시 방향을 찾는 기록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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