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는 부모가 만든다고?”…여동생 눈 멀게 한 오빠, 이유는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4. 9. 29.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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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프레소-135] 영화 ‘케빈에 대하여’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 육아에 관해 가장 널리 퍼진 믿음은 ‘부모가 사랑으로 훈육하면 아이가 어긋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 믿음, 또는 미신은 ‘버릇없는 아이’의 목격담이 곳곳에서 나오면서 나날이 강화하고 있다. 육아 전문가가 나오는 각종 TV 프로그램에서는 예의 없는 아이의 수많은 문제 행동을 보여준 후, 그 원인으로 아이를 향한 애정이 부족한 부모를 지목하는 고정된 패턴을 반복한다. 부모가 자기 잘못을 교정한 뒤 아이가 나아지는 모습으로 결론지으며 시청자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역시 부모 때문이었어.’

아마 많은 경우 그럴 것이다. 부모 될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은 사람이 출산 후 자녀를 보살피지 않으면서 아이는 상처 입고, 또 세상에 상처 입히는 어른으로 자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쉬운 일반화가 아닐까. 어떤 경우에도 맞아떨어지는 공식인 것일까. ‘케빈에 대하여’(2012)는 양육과 모성에 관한 이와 같은 신화가 놓치는 부분을 날카롭게 찌르며 지적한다. 문제아의 책임을 오롯이 부모의 사랑과 교육 부족으로 돌리는 태도로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없다고 말이다.

케빈을 낳은 뒤 에바의 삶은 확실히 불행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것은 교감할 수 없는 상대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우울이다. [티캐스트]
‘손장난’ 중에 엄마와 눈 마주쳤는데 멈추지도 않는 아들
내용을 살짝 들여다보자면 케빈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랐다. 울음을 멈추지 않는가 하면, 아주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긴 시간 대소변을 가리지 않았다. ‘못했다’가 아닌 ‘않았다’인 이유는 거기엔 아이의 악의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 같은데도 하지 않고, 가릴 만한 능력을 갖춘 것 같은데도 일부러 바지에 실수한다. 그러다 일정한 계기가 생기면 어느 날 갑자기 말하고, 느닷없이 기저귀를 떼는 식이다. 그동안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하는 부분이다.
물론 에바 역시 케빈에게 미안한 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녀는 케빈의 탄생에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출산 후 행복감에 젖은 남편의 표정과 절망에 빠진 그녀의 얼굴이 대조된다. [티캐스트]
물론 에바가 아주 좋은 엄마였느냐면 그렇지는 않다. 에바는 원래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었는데 아이가 생기면서 인생의 경로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존재를 은근히 원망했던 것이다. 그녀는 어른으로서 갖춰야 할 자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들에게 그런 속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의무감으로 아들을 보살피긴 했지만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쳐다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들로서는 엄마로부터 상처받는 게 자연스러운 환경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는 도중에 부지불식간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케빈은 자기도 모르는 채 남을 해치는 게 아니다. 케빈에겐 엄마, 그리고 세상에 상처를 주고 싶다는 의지가 분명하다. [티캐스트]
그러나 모든 상처받은 영혼이 타인을 해치려는 욕망으로 들끓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케빈의 여동생은 케빈에게서 학대받은 정황이 있지만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케빈은 자신이 엄마에게서 입은 생채기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어떻게든 세상에 남기려는 듯하다. 어쩌면 엄마의 무관심으로 생긴 내면의 공허는 세상을 공격해야만 하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그가 만든 핑계일지도 모른다.

그는 사회 구성원이라면 갖춰야 할 평균 수준의 수치심과 죄책감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일례로 화장실에서 자위하던 청소년기의 케빈은 실수로 문을 연 엄마와 눈을 마주치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이것은 엄마에게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된 단락)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케빈은 여동생의 한 쪽 눈을 멀게 한 듯하다. 여동생을 사랑하는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런 사이코패스를 낳은 것도 부모 책임일까. [티캐스트]
영화가 던지는 주요한 질문은 ‘아이가 사이코패스인 것도 부모의 사랑 부족 때문인가’로 요약할 수 있다. 케빈은 급기야 아버지와 여동생을 살해하고, 활과 화살을 들고 학교에 가 학생들을 죽인다. 그가 체포된 뒤에 에바는 세상의 비난을 받는다. 에바의 뒤에서 수군대는 사람이 있는 건 물론이고, 대놓고 폭행하는 사람도 있다. 학살범은 그녀가 아님에도 사람들은 에바에게 당연한 듯 손가락질한다. 아마 ‘아이를 제대로 못 키운 죗값을 받으라’는 근거로 폭력을 합리화했을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이를 받아들이는 에바의 태도다. 케빈을 낳고 기르게 된 운명을 늘 지겨워하던 에바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돌을 담담하게 받아낸다. 마치 ‘이건 나의 몫’이라는 듯한 결연함이 느껴진다. 에바는 케빈이 수감되고 2년 후에 아들을 찾아가 “왜 그랬냐”고 물어보고, 아들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다”는 답을 돌려준다. 에바는 아들을 안아주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 여기엔 희망을 전하는 어떤 감동적인 연출도 없다. 에바 본인도 ‘왜 이런 인생을 살게 됐는지 모르지만’ 다시 자기 삶으로 돌아갈 뿐이다.

왜 그런 끔찍한 짓을 벌였느냐고 물어보는 에바의 질문에 케빈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에바 또한 자신이 왜 이런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이 됐는지 잘 모른다. 그냥 살아갈 뿐이다. [티캐스트]
모성애보다 중요한 건 아이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아닐까
충격적 전개로 점철된 이 영화가 하는 이야기는 단순하다. 아이가 하는 모든 행동의 원인을 부모에게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에바는 부모로서 부족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건 많은 이가 갖는 인간적 결함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부모가 인간적으로 흠결이 있다고 해서 자녀가 범죄자가 된다면 애초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사람이 몇 명 없을 것이다. 모든 외아들이 이기적이지 않고, 형제와 같이 자란 사람이 전부 이타적이지 않듯, 외부 자극에 사람이 반응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결국 자녀가 돌출된 특성을 갖게 되는 데는 아이의 개별적 특성이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은 것이다.

아들딸을 키울 때 부성애와 모성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 부모가 사랑과 정성을 다해 키웠는데도 아이는 양육자가 통제할 수 없는 이유로 비뚤어질 수 있다. 부모가 책임감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은 바로 그때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르게 양육하고 최고의 환경을 제공했음에도 생기고야만 아이의 결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녀와 동행해야 하는 이유는 아이가 예쁘거나 내가 잘 키울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저 내가 낳았기 때문임을 수긍하는 것이다. 결국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는 ‘왜’라는 질문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내 아이임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양육은 결국 아이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으로 완성됨을 영화는 보여준다.

‘케빈에 대하여’ 포스터 [티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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