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산의소'서 항일투쟁 진두지휘한 화순의 기개

임창균 2025. 8. 1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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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⑩ 양회일
국치 설욕 다짐하며 격고문 띄워
화순 중동마을 의병기지로 변모
유배형 받고 ‘거의’ 정당성 주장
옥중 순국 후 이백래가 뜻 이어
광복 80주년, 의병 유산 재조명
의병들의 위폐를 모신 쌍산의사 

화순군 이양면에는 특별한 사적지가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중리에 위치한 쌍봉사다. 국보57호로 지정된 철감선사탑이 있어 수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쌍봉사 외에 또 다른 가볼 만한 곳은 유명한 보물도, 오래된 건축물도 없는 곳이다. 바로 의병 전적지로는 드물게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쌍산의소'다.

예전부터 현지 주민들은 계당산 일대를 '쌍산'이라 불렀는데 의병장 양회일이 의병부대 주둔지로 머문 곳이 '쌍산의소'다. 양회일 의진을 비롯해 1908년 1월부터는 이백래를 주축으로 한 호남창의소가 설치돼 1909년까지 항일 투쟁을 펼쳤던 장소이다.
화순 이양면 쌍봉리 양회일 의병장 기념비

◆나라 위해 몸 바친 선비의 결의

양회일(1833∼1908) 의병장의 호는 행사(杏史)로, 화순군 능주 오류촌(현 화순군 이양면 속촌)에서 태어났다. 학문에 뜻이 있어 한양에 올라가 공부를 하던 그는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귀향했다. 그의 본래 성정은 당당하고 기품있는 선비였으나 나라의 위기는 그를 기나긴 무쟁 투쟁으로 이끌었다.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 입구 세워져 있는 양회일 의병장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선생은 10세에 '푸른 솔 높고 곧은 마디 가을인들 어찌하랴. 밝은 달 맑은 혼은 밤에도 훤하네'라고 노래했는데, 일생이 이와 같이 푸르고 높고 곧으며 밝고 맑았다. 계당산을 바라보며 '충의의 백성들이여 원수에게 잡혀 부림을 당하겠는가! 오직 죽음뿐이라' 한 선생의 맹서를 떠올리니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부끄러움에 글을 더할 수 없다.'

양회일의 행적은 행사의 창의 사실을 기리고자 유학자들이 1950년 펴낸 '행사실기'에 잘 드러나 있다.

귀향 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양회일은 산중에 들어가 5년 동안 은둔하며 제자를 키웠다. 이후 을사늑약이 일어나자 가산을 정리하고 친동생 양회룡을 비롯해 양열묵, 이동화, 박기년, 양상길, 정순학, 서필환, 양동진 등과 함께 항일 투쟁을 결의했다.

이 무렵 장성에서 거의를 한 고광순, 기삼연과 힘을 합하기로 한 양회일은 1907년 3월 3일'맹주 양모(梁某)'의 이름으로 '격고문(檄告文)'을 띄워 의병 모집에 나섰다.

격문에는 '군부(君父)가 훼손을 당하고 국모가 화를 입으면 인신(人臣)된 자는 마땅히 원수를 갚아야 하는 데 병자년 통상 이후 갑오년과 을미년의 멸의와 비통을 당했으며, 을사년의 변괴로 5백 년의 사직과 3천 리 강토가 다 무너졌고, 민영환, 조병세, 송병선, 최익현 등의 원로들이 순국했으니, 우리 모두 일어나서 왜적을 물리치고 역신들을 응징하기 위해 3월 상순에 쌍산의소에 참여하라'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양회일은 이광언·이백래·이항선·임창모 등 지사들과 격문을 보고 찾아온 의병 100여 명과 능주 계당산에 의진(쌍산의소)을 설치하고 다음 달인 1907년 4월 21일 거의했다.
쌍산의병 최초 결의장소
화순 이양면 쌍봉리 양회일 의병장 생가터

◆성벽 쌓으며 철저한 투쟁 준비

쌍산의소 결의는 당시 능주군 도림면 증동 마을 참봉 임노복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임노복은 일찍이 비분강개의 뜻을 품고 계당산에 은거하고 있다가 행사의 거의 제의에 흔쾌히 응했다. 증동 마을은 의병 기지로 변모했다. 대장간을 이용해 무기를 제작하거나 훈련에 열중했다. 이때 쌍산의진의 주요 직책은 맹주 양회일을 필두로 총무 양열묵, 참모 임상영·박중일·양수목, 서기 이병화, 도통장 이광언, 부통장 노현재, 선봉장 임창모, 부장 신재의, 중군장 안기환, 후군장 최기표, 호군장 임노복·안찬재, 포군장 유병순 등으로 편성됐다.

쌍산의소의 의병들은 막사를 짓고 그 주변에 둘레 1㎞의 의병성을 건설했다. 주변에 무기 제작을 위한 대장간을 마련하고, 탄약의 재료인 유황을 생산해 굴을 파고 이를 저장했다.

양회일은, 을사오적을 섬멸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국가의 수치를 설욕할 것과 엄정하게 행동할 것을 맹서하는 '서고군중문(誓告軍中文)'을 발표했다.

의병들에게 밝히는 맹서문의 전문(前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무릇 맹세를 같이한 사람들은 모두 나의 말을 들어라. 국가의 대세가 위험하도다! 이에 이르러 당당하고 충성스러우며 의로운 백성으로서 차마 원수들이 부리는 대로 살육이 되는 비참한 꼴을 당해야만 하겠는가! 이렇게 됨은 죽음만 있을 뿐이니 사로잡혀 우리 백성이 멸망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해 대란을 토평하지 않으리오. 이에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 하니, 원컨대 각자 마음을 가다듬고 임을 합해 임금님께 나아가 명을 청해 오적(五賊)을 섬멸하고, 이등박문을 죽여 국치를 설욕하고 천하의 대의를 밝힌다면 매우 다행할 것이다.'

이밖에도 군자금은 양회일이 준비했으므로 이를 빙자해 백성들에게 침탈하지 말 것, 의병은 대의명분이 중요하므로 평민들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 선봉, 중군, 후군의 지휘관은 각자의 임무를 유념할 것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양회일은 거병할 때 명분을 매우 중시했고, 부대원들의 일사분란한 지휘체계 확립을 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쌍산의소 의병성과 막사터.화순군 제공
쌍산의소 의병성과 막사터.화순군 제공

◆항전 불씨 이어간 기개와 희생

양회일이 조직한 의진에는 이미 명망이 있던 하동 출신 이광언이 도통장을 맡고 있었다. 여기에 광양 출신 유병우가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합류하자 부대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4월 22일에는 양회일이 의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능주군아와 일본 헌병분파소를 습격해 총기 6정, 군도 3자루, 실탄 500여발을 노획했다. 이 같은 전과는 '행사실기'뿐만 아니라 일본측 기록인 '전남폭도사'에도 기록돼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 전투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얻었으나 양회일 의진은 추격해 오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아끼는 의병 정세현이 전사하고, 양회일·임창모·이백래·안찬재·유태경·신태환 등 6명의 의병 지도자가 체포됐다. 이 전투지가 화순과 광주 경계를 이룬 너릿재로 추정되고 있다.

6명의 지도자는 재판에 회부됐는데, 양회일과 임창모는 유형 15년, 이백래·안찬재·유태경·신태환은 유형 10년이 선고됐다. 유배지는 신안 지도였다. 유배된 지 5개월 만인 1907년 12월 3일 순종황제의 즉위 기념 사면 조칙에 따라 석방됐다.

석방된 후에도 양회일은 거의의 정당성을 주장하다 1908년 5월 강진분견소, 6월 장흥분견소에 압송돼 기혹한 조사를 받았다. 장흥 분견소에서 있었던 고문에 항의하는 단식을 하다 단식 7일 만에 6월 24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양회일은 마지막 순간 일본 헌병에게 "내가 비록 죽는다 해도 천하의 의사들을 너희가 모조리 죽일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

6의사 가운데 한명인 이백래는 유배지에서 돌아오자 다시 거의를 위해 노력했다. 1908년 1월 21일 기존 쌍산의진 의병과 전남 동북부 지역 의병을 규합해 호남창의소를 구성했으며 같은 보성 출신 안규홍이 결성한 의진과 연합작전을 펼쳤다. 1908년 2월 21일 장흥경찰서를 습격했고, 9월 20일에는 보성 복내의 헌병 분파소를 습격했다. 하지만 그는 장흥 배산 헌병분파소의 습격을 받아 1909년 5월 17일 피체됐다. 5월 20일 피살, 순국했다.

정부는 양회일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백래에게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지난 12일 전남도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도민공모를 통해 '항일독립유산' 8건을 도 지정 문화유산으로 짖어했는데 여기에는 '화순 양회일 항일 의병 유산'도 포함됐다. 화순 양회일 항일 의병 유산은 순의비, 옥중 간찰, 문집 등으로 구성돼 의병사와 문학사에서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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