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순 이후 42년…곽빈은 역사의 빗장을 풀 수 있을까

[베팬알기] 곽빈으로 본 베어스의 ‘한국인 투수 다승왕’ 도전사

박철순(왼쪽)과 곽빈. 배명고 선후배이자 베어스 선후배다. 곽빈이 박철순 이후 42년 만에 베어스 토종 다승왕에 도전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여기까지만 하자.”
“아닙니다. 더 던지겠습니다.”

에이스의 책임감과 결기가 느껴졌다. 두산 베어스의 박정배 투수코치는 난감한 표정으로 3루쪽 덕아웃을 바라봤다. 그러자 사령탑 이승엽 감독도 그냥 맡겨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박 코치는 에이스를 격려한 뒤 마운드를 내려왔다.

8월 17일 수원 kt위즈파크. 두산 선발투수 곽빈은 역투를 거듭했다. 역대급으로 무더운 날씨가 이어진 8월의 한복판. 곽빈은 3-1로 앞선 8회말 1사 후 대타 문상철과 5구 승부 끝에 볼넷을 내줬다.

투구수는 정확히 100개가 됐다. 다음 타자는 KBO리그 최정상급 타자 멜 로하스 주니어. 그래서 박 코치는 곽빈을 교체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갔던 것이다.

누가 봐도 타당한 교체 시점. 하지만 곽빈은 고개를 저으며 한사코 마운드에서 내려가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손으로 이닝을 마무리짓겠다는 의지였다. 그러자 박 코치는 덕아웃을 바라봤고, 이승엽 감독도 에이스가 이닝을 끝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곽빈은 로하스와 4구 승부 끝에 시속 121㎞ 커브로 삼진을 잡았다.

그런데 다음 타자 김민혁 타석 때 폭투를 범해 득점권에 주자를 보냈고, 김민혁의 빗맞은 타구가 중전 적시타로 이어지면서 실점을 하고 말았다. 스코어는 3-2.

결국 곽빈은 이병헌에게 마운드를 넘기고 교체됐다. 하지만 에이스의 책임감과 진심을 느낀 팬들은 강판하는 곽빈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뒤이어 마운드에 오른 이병헌이 실점 없이 8회를 매듭지었고, 9회엔 고졸 루키 특급 마무리 김택연이 경기를 매조지하면서 두산은 3-2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곽빈도 승리투수가 됐다. 8월 들어 처음 승수를 추가하며 시즌 11승째를 수확했다. 원태인(삼성), 엔마누엘 데 헤이수스(키움)와 다승 공동 1위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두산 에이스 곽빈. ⓒ두산베어스

토종 에이스의 다승왕. 베어스 팬들에겐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말이다. 1982년 원년 박철순 이후 지난 41년 동안 베어스 소속의 한국인 투수가 다승왕에 오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섣부른 예측을 할 수 없는 시점이지만, 올 시즌 베어스 구단 역사에서 의미 있는 도전이 이어지고 있기에 다승왕 싸움을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팬알기-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기록 이야기] 이번 주제는 베어스 투수들의 다승왕 역사와 도전 이야기다.

OB 베어스 박철순이 1982년 페넌트레이스 MVP를 차지한 뒤 부상으로 주어진 승용차에 탑승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1982년 24승…베어스 최초 다승왕 ‘불사조’ 박철순

『한국프로야구 첫해 페넌트레이스의 MVP(최우수선수)에 OB의 에이스 박철순이 뽑혔다. 첫 시즌에서 36게임에 등판, 22연승을 기록하며 통산 24승4패7세이브로 방어율(1.84), 최다승, 승률(0.857) 등 투수 성적 3개 부문을 휩쓴 박철순은 MVP로 뽑힘으로써 프로야구 첫해의 최고 선수가 되었다.』 <동아일보 1982년 10월 15일자>

KBO리그가 출범한 1982년 최고의 스타는 박철순이었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22연승 신화와 함께 24승을 기록하며 다승왕에 올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프로야구 원년은 팀당 80경기 체제였다는 사실이다. 전기리그 40경기와 후기리그 40경기를 치렀는데 박철순은 전기리그에서만 17연승을 포함해 무려 18승을 기록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한 시즌 144경기 체제인 요즘 다승왕도 하기 버거운 승수를 전기리그 40경기 만에 올려버렸다.

OB가 전기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획득했기 때문에 박철순은 후기리그에서는 그나마 휴식을 취하며 페이스 조절을 했다. 후기리그에서는 6승만 추가했을 뿐이다.

박철순의 1982년 24승은 KBO리그 역대 단일 시즌 공동 5위 기록.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장명부가 30승으로 불멸의 기록을 세웠지만, 만약 OB가 전기리그 우승을 하지 못해 박철순이 후기리그에서도 전력투구를 했다면 장명부 이전에 30승 이상을 거뒀을지 모른다.

24승은 OB 시절을 포함해 두산 베어스 역사에서 최다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마운드가 분업화되고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는 현대 야구에서 선발투수는 한 시즌 30경기 안팎으로 등판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앞으로 베어스 구단에서 1982년 작성된 박철순의 24승을 깨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두산 베어스 시절의 더스틴 니퍼트의 투구 모습. 니퍼트는 2016년 22승으로 다승왕에 올랐지만 박철순의 24승 신화에는 미치지 못했다. ⓒ두산베어스

◆ 베어스 다승왕의 역사

1982년 박철순 이후 OB 베어스에서 더 이상 다승왕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 OB 베어스 시절 다승왕은 박철순이 유일하다.

1999년 두산 베어스로 이름이 바뀌고 계보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2004년 외국인 투수 게리 레스가 17승으로 삼성 배영수, KIA 다니엘 리오스와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박철순 이후 22년 만에 나온 베어스 구단의 다승왕이었다.

이어 2005년 7월에 트레이드를 통해 두산 유니폼을 입은 리오스가 2007년 22승을 거두며 베어스 역대 3번째 다승왕을 차지했다. 그리고 2016년 더스틴 니퍼트가 22승을 수확하면서 최다승 투수가 됐다.

그 이후 2018년엔 세스 후랭코프(18승), 2019년엔 조쉬 린드블럼(20승), 2020년엔 라울 알칸타라(20승)가 최다승을 거두면서 두산은 3년 연속 다승왕을 내놓았다. 특정 구단에서 3년 연속 다승왕을 배출한 것은 역대 두 번째 사례. 종전에 해태 타이거즈(1989~1991년)가 있었는데 투수 한 명이 3년 연속 다승왕을 독식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불세출의 투수 선동열이었다.

그러니까 한 팀의 외국인 투수가 3년 연속 승리왕을 차지한 것은 베어스 역사뿐만 아니라 KBO 최초의 일이었다.

재일교포 최일언은 1986년 19승을 올렸지만 다승 2위에 그쳤다. 19승은 박철순을 제외하면 역대 베어스 한국인 투수 최다승이다. ⓒ두산베어스

◆박철순 이후 전무…베어스 토종 투수들의 다승왕 도전기

베어스는 앞서 살펴본 대로 2023년까지 총 7명의 다승왕을 배출했다. 그러나 두산 시대 이후 다승왕 6명은 모두 외국인 투수였다. 한국인 투수가 다승왕에 오른 것은 아직까지 박철순이 유일하다.

박철순 이후 역대 베어스의 한국인 투수들이 승리왕 고지에 오르기 위해 분투를 펼쳐지만 하늘은 빗장을 걸고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우선 재일교포 최일언. 1986년 19승을 기록하며 롯데 최동원과 함께 다승 공동 2위가 됐다.

하지만 그해 다승왕은 24승의 해태 선동열. 선동열은 입단 2년째인 그해 생애 첫 다승왕에 올랐는데 24승은 해태와 KIA 타이거즈 구단 역사에서 한 시즌 최다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배트맨' 김상진은 1995년 17승으로 다승 2위에 오르며 박철순 이후 베어스 우완 정통파 에이스의 계보를 이었다. ⓒ두산베어스

김상진도 아쉽게 다승왕까지 가지는 못했다.

김상진은 1989년 배팅볼 투수로 입단한 뒤 성공 신화를 쓴 주인공. 박철순 이후 등장한 베어스 최고 우완 정통파 에이스였다. 1994년 14승으로 다승 6위, 1995년 17승으로 2위까지 치고 올라갔다.

1995년 다승왕은 20승의 LG 이상훈. 김상진과 이상훈은 그해 3차례 선발 맞대결을 펼쳤는데, 이상훈이 모두 승리하면서 다승왕의 운명이 갈라졌다.

2011년에는 메이저리그 출신의 김선우가 16승을 올렸지만 KIA 윤석민(17승)에 1승이 모자라 2위에 그쳤다. 2015년 유희관은 18승을 거뒀지만 역시 NC 에릭 해커(19승)에 1승이 부족해 왕관을 쓰지 못했다. 유희관의 18승은 베어스 역대 좌완 한 시즌 최다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선우 ⓒ두산베어스
유희관 ⓒ두산베어스

2016년에는 유희관이 16승으로 장원준과 다승 공동 3위가 됐는데 공교롭게도 그해 1위가 더스틴 니퍼트(22승), 2위가 마이클 보우덴(18승)이었다. 두산 소속 외국인 투수들에게 밀린 결과였다.

이들 4명은 ‘판타스틱4’로 불리면서 베어스 구단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끌었다. 한 시즌에 한 팀에서 4명 투수가 15승 이상 거둔 것은 KBO 역사상 최초였다.

2018년 이용찬(15승)과 2019년 이영하(17승)도 아쉽게 다승 2위에 그쳤다. 역시 집안의 외국인 투수들에게 밀렸다. 앞서 설명한 대로 2018년 다승왕은 후랭코프(19승), 2019년 다승왕은 린드블럼(20승)이 차지했다.

1982년 박철순은 포수 김경문과 배터리를 이뤄 다승왕에 올랐다. ⓒ두산베어스

◆ 배명고 선후배 박철순과 곽빈…42년 만에 역사의 빗장이 열릴까

1956년생 박철순과 1999년생 곽빈. 43년 세월의 간격을 두고 태어난 배명고 선후배 사이다.

곽빈은 2018년 1차지명을 받고 박철순의 뒤를 이어 베어스 유니폼을 입었다.

187㎝, 95㎏의 건장한 체격. 최고 구속 154㎞/h의 강력한 구위. 박철순만큼 시원시원한 투구를 펼치며 베어스의 우완 정통파 에이스의 계보를 잇는 투수로 발전하고 있다.

지난해 12승7패(평균자책점 2.90)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만들었고, 베어스를 넘어 국가대표 주축 투수로 자리 잡았다. 올 시즌 후 펼쳐질 ‘2024 WBSC 프리미어 12’에서도 삼성 원태인과 함께 국가대표 원투펀치를 이룰 후보로 주목받고 있다.

두산 베어스 곽빈은 2024년 최고 포수 양의지와 배터리를 이루면서 다승왕에 도전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곽빈의 올 시즌 출발은 좋지 않았다. 개막 이후 6번째 등판까지 승리 없이 4패만 찍었다. 시즌 첫 승을 거둔 게 4월 30일 잠실 삼성전(6이닝 1실점). 이때까지만 해도 곽빈이 올해 다승왕 싸움을 펼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첫 승을 기점으로 5월말까지 6경기 등판에서 5연승을 올리는 파죽지세로 에이스 모드로 돌아왔다. 이어 7월 30일 광주 KIA전에서 6이닝 2실점 호투로 3연승과 함께 2년 연속 10승 고지를 밟았다.

극심한 ‘타고투저’ 현상 속에 올 시즌 투수들의 승수쌓기 페이스도 더딘 상황.

그런 가운데 곽빈은 올 시즌 24경기에 등판해 15차례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다. 국내 투수 중 최다 퀄리티스타트 기록이다.

지난 17일 kt전에서도 에이스의 책임감으로 7.2이닝을 버티면서 2실점으로 '하이 퀄리티 스타트(7이닝 이상 2실점 이하)'를 작성했다. 그러면서 시즌 11승째를 수확해 다승 공동 1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원태인이 20일 포항구장에서 열린 두산전에서 승리투수가 되면서 먼저 시즌 12승 고지를 밟으며 단독 1위로 치고 나갔다. 이제 1승 차이로 곽빈, 헤이수스, 제임스 네일(KIA)이 공동 2위 그룹을 형성해 추격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다.

향후 스케줄을 보면 곽빈은 6경기 정도 선발등판이 예상된다.

페넌트레이스 팀 순위싸움도 그렇지만 다승왕 역시 아직은 안갯속 레이스. 막판 퍼포먼스에서 다승왕의 운명이 판가름날 전망이다. 다승 상위 그룹에 다수의 투수들이 촘촘하게 포진해 있기에 올 시즌 공동 다승왕이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박철순 이후 열리지 않고 있는 베어스 토종 다승왕의 문. 하늘이 좀처럼 허락하지 않고 있는 역사의 빗장을 풀기 위해 곽빈이 42년 만에 의미 있는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두산 베어스 곽빈이 글러브로 공을 움켜쥐고 있다. 곽빈이 42년 만에 베어스 토종 다승왕까지 움켜쥘 수 있을까. ⓒ두산베어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