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섬, 월미도] 2. 폭탄·총알 세례…원주민 '희생양' 내몰려
상륙 작전 앞두고 무차별 폭격
사선 넘은 주민도 귀향길 막혀


1950년 9월10일 오전 6시50분쯤.
평소 주말 아침처럼 고요한 인천 월미도 상공에 미 해병대 전투기들이 날아들었다. 이윽고 빗발친 폭탄과 총알 세례에 마을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한국전쟁 당시 불리했던 전세를 역전시켜 구국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 인천상륙작전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월미도 폭격이었다. 미군 기습 때 마을에는 120가구에 600여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 관문인 월미도는 인천상륙작전 성패를 좌우한 핵심 거점이었다. 평균 7m에 달하는 극심한 조수 간만의 차와 높은 해벽으로 무장한 천연 요새로 평가받았다. 인천 내륙으로 통하는 해역이 내려다보이는 월미산에 북한군은 참호를 파고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폭격에 앞서 미군 정찰기가 월미도와 인천항 상공을 오갔다. 항공 사진을 바탕으로 대공포와 군수 물자 저장소 등 무기 시설 위치를 상세히 그린 지도가 제작됐다. 미군은 당시 월미도에 북한군과 민간인이 500여명씩 머물고 있던 것으로 파악했다.
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미군이 상륙을 위해 민간인 거주지에도 예외 없이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 월미도를 무력화한 작전"이라며 "한국전쟁 시기를 놓고 보면 인천상륙작전 시점부터 1951년 3월까지 융단 폭격이 계속됐다. 미군 폭격 양상이 인천상륙작전 이전과 이후로 나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천상륙작전 개시를 닷새 앞두고 세 차례에 걸친 월미도 폭격으로 북한군 방어 시설은 완전히 파괴됐다. 연합군 261척 함정과 7만5000여명 병력은 '5000분의 1'에 불과한 성공 확률을 딛고 인천 해안에 상륙했다.
일제강점기 두 차례 강제 이주 끝에 삶의 터전을 일궈가던 월미도 원주민들은 연합군이 상륙했던 바다로 내몰렸다. 전투기 폭격과 기총소사를 피해 갯벌을 건넜고, 그 뒤로는 잿더미로 변한 마을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후 미군 기지가 들어선 월미도는 원주민들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땅이 돼 버렸다.
"이 위령비는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엔군 소속 미군 폭격으로 월미도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원주민들 넋을 기리기 위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권고에 따라 건립했다."
2021년 원주민 마을이 있던 월미공원에 위령비가 세워졌다. 월미도 폭격으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0명에 불과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100여명으로 추산했다. '불가피한 희생'이라는 미명에 가려진 채 고향을 잃은 월미도 원주민들에겐 폭격의 상흔이 아직 남아 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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