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벌적 손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가 먼저
표현의 자유 과도한 침해 소지
OECD 나라 중 한·일만 고수해

여당이 허위조작 정보(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 국회 처리를 11월로 미루면서 급박하게 진행되던 ‘속도전’ 분위기는 일단 숨 고르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명예훼손을 이유로 민사 배상뿐 아니라 형사 처벌까지 하는 법률 조항은 그대로 둔 채 배상액수만 높이는 건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허위조작이 아닌 사실을 적시한 행위도 범죄로 보아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형법과 정보통신망법 관련 조항이 폐지 대상 1호로 꼽힌다.
30일 언론 분야 교수와 변호사 등의 말을 종합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형사 처벌하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밖에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현행 형법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신문과 잡지, 방송의 경우엔 3년 이하 징역·금고 또는 7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해 처벌 수위가 더 높다. 정보통신망법도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실제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관행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해 대법원이 내놓은 ‘사법연감’을 보면, 각급 법원은 2023년에 형법상 명예훼손죄 사건을 2347건 처리했는데 이 가운데 130건(5.5%)이 징역이나 금고 유기형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집행유예가 184건, 재산형(벌금)이 1272건 등이었다. 적어도 세명 중 두명은 유죄판결에 이어 실질적 형사 처벌을 받은 셈이다. 물론 여기엔 사실적시 명예훼손뿐 아니라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 등까지 포함된 수치다.
언론계와 학계 일부는 이들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한다며 삭제를 요구해왔다. 김보라미 변호사(법률사무소 디케)는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을 형사 처벌하는 상황에서 허위조작 정보에 민사상 징벌적 배상제까지 도입하는 것도 지나친데,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형사 처벌하는 조항을 그대로 두는 건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억압하는 쪽으로 작동할 것”이라며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라도 먼저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종현 한국기자협회장, 이호찬 전국언론노조 위원장 등 언론 현업단체 4곳 대표는 지난 17일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면담한 자리에서 언론에 대한 ‘전략적 봉쇄소송’을 막기 위해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 대상에서 정치인과 기업인 등 권력자를 제외하고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도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앞서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21대에 이어 22대 국회 들어서도 형법과 정보통신망법 관련 조항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아예 삭제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내놨다. 박 의원 등은 지난 9월9일 발의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서 “허위 사실이 아님에도 ‘비방 목적’과 ‘명예훼손’을 이유로 특정 표현을 불법 정보의 하나로 규정해 정보통신망에서 유통을 금지하고 형사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할 소지가 크다”고 밝혔다. 개정안은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의 경우 피해자 고소가 있을 때만 수사를 시작하는 ‘친고죄’로 바꾸는 내용을 담았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지난 2022년 2월 형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5 대 4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위헌 선고가 나려면 헌법재판관 6명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당시 다수파는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되는 입법례와 달리 우리나라의 민사적 구제방법만으로는 형벌과 같은 예방 효과를 확보하기 어려우므로 입법 목적을 동일하게 달성하면서도 덜 침익적인 수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할 경우 이들 재판관 의견도 달라질 여지가 있는 셈이다.
위헌 의견을 낸 문형배·이석태·유남석·김기영 재판관은 헌법이 “언론·출판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한 때에는 피해자는 이에 대한 피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해 명예훼손의 구제수단으로 형사 처벌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판단의 근거로 들었다. 이들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친고죄가 아닌 탓에 “제3자의 고발에 따라 진실한 사실적시 표현 행위에 대해서도 형사 절차가 개시되도록 하는 ‘전략적 봉쇄소송’마저 가능하게 됐고…형사 절차에 휘말릴 가능성이 더욱 커짐에 따라 진실한 사실적시에 관한 표현의 자유는 심대하게 위축되게 됐다”고 짚었다. 이들은 “진실한 것으로서 사생활의 비밀에 해당하지 아니한 사실적시에 관한 부분”에 대해선 위헌을 선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도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가 6700만달러(약 940억원)를 물어낸 미국 케이블방송 ‘뉴스맥스’의 사례를 들면서 “형사 처벌보다는 돈을 물으라 얘기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게 제 생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언론법학회 회장인 심석태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는 한겨레에 “미국의 징벌적 배상액수가 큰 건 기본적으로 한국보다 언론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는 범위가 좁은 데다 명예훼손 소송을 건 이가 공적 인물인 경우엔 언론이 사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고의로 ‘현실적 악의’를 갖고 보도했다는 걸 입증해야 하는 등 한국보다 매우 제한적으로 적용하기 때문”이라며 “한국은 사실을 적시해도 형사 처벌한 뒤 이를 바탕으로 민사 소송을 거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짚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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