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48> 진주화반(晉州花飯)
- 기생 교육·관리한 옛 교방청서
- 연회음식으로 내 놓던 비빔밥
- 가까운 우시장서 육회 떼 얹어
- 나물 고기 고추장 한데 어울려
- 마치 음양오행 오방색 품은듯
- 얼큰한 선짓국 곁들여 여운을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우면 꽃밥일까? 먹는 내내 그윽한 향기가 날 것 같고, 밥상을 물릴 때까지 화사한 꽃밭을 거닐 것 같은 음식. 진주비빔밥 이야기이다. 진주비빔밥을 일컬어 한때 꽃밥, 화반(花飯)이라고 불렀다. 음식을 담은 자태가 너무 아름다워, 꽃장식 소반을 연상케 해 화반(花盤)이라고도 한다.
주로 제철에 나는 색색의 나물이나 해조류를 흰밥 위에 정갈하게 얹고, 그 위에 붉디붉은 소고기로 꽃봉오리처럼 마무리 장식을 한다. 이 때문에 갖은 맛깔이 알록달록 피어오르는 일곱 가지 보석을 거느린 꽃밥, 칠보화반(七寶花飯)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 음식에 바치는 이름으로는 최대의 찬사라 하겠다.
그래서 진주비빔밥을 비비다 보면 우리 산하의 사계절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난분분 난분분, 춘흥에 못 이긴 강아지 마냥 봄의 꽃잎이 봄바람에 흩날리고, 푸릇푸릇 짙은 녹음 속 쟁쟁한 풀벌레 소리를 내도록 듣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새 가을 단풍에 제 마음마저 붉게 물드는 여인의 마음을 읽어내기도 하고, 흰 눈발 날리는 겨울 눈길을 묵묵히 걷는 나그네의 발길을 좇기도 하는 것. 이런 산수화 같은 우리 전통의 맛깔을 들여다보는 묘미, 진주비빔밥을 먹는 시간이다.
▮겸양·상생·조화의 음식
비빔밥만큼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잘 담은 음식이 있을까? 밥 위에 어떤 찬과 비벼도 잘 어울리는 음식, 앉아서 먹든 서서 먹든 어디서든 설렁설렁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식사, 여럿이서 둘러앉아 식구(食口)처럼 함께 먹던 공동식, 그리고 노동의 시간에 짬을 내어 허벅허벅 먹는 노동식. 그래서 비빔밥은 우리 민족에게는 다양한 용도로 소용되던 음식이었다.
예로부터 비빔밥은 ‘3대 미덕’의 음식이라 했다. 나물이면 나물, 육회면 육회, 고명이면 고명… 음식 재료들이 서로 제각각의 맛깔을 내므로 ‘개성’의 음식이다. 그리고 각각의 개성적인 맛이 고루고루 모여, ‘비빔밥’이라는 한 가지의 특성을 구현하기에 ‘화합’의 음식이다. 또한 개개의 맛과 성정들이, 하나의 맛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순화하므로 ‘순화’의 음식이다.
그래서 ‘비빔밥’은 ‘겸양의 음식’이자 ‘상생의 음식’이다. 우리네 민족 정서를 닮은 ‘배려와 다양성’의 음식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골동반(骨董飯), 여러 음식이 ‘한데 섞여’ 맛과 영양의 조화가 서로 돋보이는 ‘조화로움’의 음식이기도 하다.
비빔밥 중에서도 최고의 호사는 소고기 육회를 얹은 것이겠다. 각색의 제철 나물을 넣고 비빈 비빔밥이 서민의 음식이었다면, 붉은 소고기 육회 넉넉히 올려 비벼 먹던 소고기 육회 비빔밥은 상류 계층의 귀족 음식으로 분류됐다.
전국에서 소고기 육회를 고명으로 올려 만든 비빔밥 중 대표적인 것이 경남 진주 칠보화반과 전북 전주 육회비빔밥, 전남 함평 생고기비빔밥 등이다. 세 지역은 오래전부터 주변에 큰 우시장이 있던 곳으로, 각각의 음식문화에 맞게 독특한 형식의 소고기 비빔밥을 발전시켜 왔다. 그중에서도 진주비빔밥은 비빔밥에 올라간 색색의 고명들이 마치 꽃처럼 아름답고 맛이 뛰어나 조선 시대 당시 진주 교방청의 대표 음식이기도 했다.
진주는 조선 시대 진주목(晋州牧)이 소재했던 경남의 행정 군사 문화 중심지였다. 그러했기에 기생을 교육·관리하는 교방청(敎坊廳)이 설치됐고, 교방청에서 비롯된 교방 문화가 현재 진주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중 하나가 교방 음식문화인데, 조선 시대에는 중앙관리가 한양에서 내려오면 이들을 접대하기 위한 연회가 베풀어지곤 했다. 이때 기생들의 가무와 함께 진주 교방청의 연회 음식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그 중심에 ‘칠보화반’이라 일컫는 ‘진주비빔밥’, 해물 육수 향이 진한 ‘진주냉면’ 등 교방 상차림 음식이 있었다.
▮자부심 ‘화관’ 얹듯, 다채로운 맛
원래 진주비빔밥의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군관민이 소를 잡아 다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설과 교방청의 연향 음식으로 시작됐다는 설, 농번기 때 함께 먹던 두레음식에서 시작됐다는 설 등 다양하다.
그러나 현존하는 진주비빔밥 가게는 3대에 걸쳐 100년 안팎의 가업을 이어오는 한 노포가 국내 최고 오래된 비빔밥집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 식당을 통해 그나마 진주비빔밥 문화의 저간을 찾아볼 수가 있겠다.
진주비빔밥 한 상 받는다. 넓은 그릇에 흰 쌀밥을 담고 애호박 고사리 숙주 얼갈이배추 마른김 자반(속대기) 등을 보기 좋게 얹었다. 그릇 앞쪽으로 조물조물 잘 양념한 육회가 자리하고, 비빔밥 그릇 중앙에는 직접 담근 고추장을 올려 마무리했다.
비빔밥의 고명이 마치 우리 민족의 음양오행 사상을 대표하는 상서로운 색, 오방색을 품고 있는 듯하다. 희고 검고 붉고 푸르고 노란색의 대비. 각각의 색깔마다 방위와 기운을 나타내고 계절을 품고 있기도 하다. 이 오방색을 비빔밥 속에 다 구현해 놓았으니, 그 음식의 함의가 참 대단한 것이다.
젓가락으로 몽글몽글 밥을 비빈다. 각각의 재료가 섞이고, 각각의 맛이 하나가 된다. 알록달록한 음식 재료들이 각각의 맛과 식감으로 풍성하다. 한 숟갈 크게 입에 넣는다. 구수하다. 연이어 다양한 식감의 향연이 펼쳐진다. 여기에다 비빔밥의 맛과 풍미를 올려주는 보탕국을 넣어 제맛을 더해준다. 보탕국은 바지락이나 홍합 등 조개류를 참기름에 볶아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진주비빔밥은 고소하면서도 촉촉하고, 담담하면서도 진득하다. 비빔밥 한 숟가락 뜰 때마다 들큼하고, 맵싸하고, 짭짤하고, 쌉싸래하고, 부드럽고, 아삭하고, 푸들하고, 고들하고… 모든 맛이 하나같이 개성적이면서도 튀지 않고 잘 어울린다.
진주비빔밥에는 얼큰한 선짓국이 함께 나온다.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서 고기는 육회로 올리고, 나머지 내장 및 부산물로 선짓국을 끓여내는 것이다. 일반 선짓국보다 맑은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살코기와 선지 간 허파 천엽 내장을 넣고 푹 끓여낸 국물에 사박사박 썬 무와 콩나물 대파가 들어가고, 그 중간에 큼지막한 선지가 한 덩이 자리를 차지한다. 한 술에 심심하면서 깔끔한 국물 맛이 입맛을 부드럽게 해주고, 곧이어 진하고 시원한 맛이 올라오더니 칼칼한 뒷맛으로 여운을 남긴다.
비빔밥 식사 후에는 간단히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을 위해 소고기 석쇠불고기를 한 접시 더할 수도 있다. 석쇠에 구워서 진한 불 향이 입맛을 돋우고, 고기마다 육즙을 가득 머금어 고소하고 진한 풍미가 제대로이다. 비빔밥과 함께 곁들여 먹어도 좋겠다.
오랜 세월 진주 사람들의 음식문화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음식, 진주비빔밥. 진주 사람들은 그들 음식의 자부심을, 그들의 음식 이름에 화관(花冠) 얹듯이 올려놓았다. 말 그대로 ‘꽃밥’ ‘진주화반’이다. 그들의 음식 사랑이 참 부럽고 기꺼울 따름이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