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마지막 도전 "10년 준비했는데 2년 만에 무너졌다"

삼성그룹이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던 야심찬 도전은 결국 외환위기와 기업의 전략적 결단으로 르노자동차에 매각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995년 출범한 삼성자동차는 불과 4년 만에 법정관리에 들어갔으며, 2000년 르노에 인수되어 르노삼성자동차로 변모했다.

최근에는 삼성카드가 보유한 지분 19.9%까지 매각되면서 삼성과 자동차 산업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국내 최대 재벌이었던 삼성의 자동차 산업 도전과 좌절, 그리고 르노를 통한 변신의 역사는 한국 경제사의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삼성자동차의 야심찬 출발

1992년 7월, 삼성그룹은 승용차 사업 추진을 위한 전담팀을 발족시켰다. 당시 재계 서열 2~3위를 다투던 삼성그룹이 현대그룹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했으며,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 제조업에서 그 답을 찾았다. 자동차 마니아였던 그는 오랜 기간 자동차 산업을 연구했으며, 선대 회장이었던 이병철의 숙원사업이기도 했다는 점이 진출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4년 4월, 삼성은 일본 닛산과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하였고, 같은 해 12월 정부로부터 기술도입 인가를 받았다. 이는 당시 현대자동차가 미쓰비시로부터, 기아자동차가 마쓰다로부터 기술을 도입했던 것과 유사한 전략이었다. 1995년 3월 28일, 드디어 자본금 1,000억 원 규모의 삼성자동차가 공식 출범했다.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현대, 기아, 대우, 쌍용 등 이미 4개 완성차 업체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국내 시장에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산업연구원 같은 국책 연구기관도 신규 업체의 외국 기술 중심 진출이 국내 기술 자립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대해 삼성은 "연구 결과와 관계없이 계속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공장 건설과 초기 생산

삼성자동차의 생산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 신호공단에 55만 평 규모의 공장 건설이 시작되었다. 공장 부지는 매립지에 가까운 약한 지반이었기 때문에 기초공사에만 수천억 원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1996년 10월, 마침내 자동차 공장이 완공되었고, 부품 생산을 위해 삼성전기는 1997년 4월 부산 녹산공단에 공장을 설립했다.

2002년까지 4조 3,000억 원을 투자해 연간 50만 대 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2010년까지는 연간 150만 대 생산 규모의 세계적인 업체로 성장한다는 야심찬 계획이 수립되었다. 판매와 서비스는 삼성물산이 맡았다.

SM5 출시와 시장 반응

1998년 1월, 삼성자동차는 첫 모델인 SM5를 출시했다. 닛산 세피로(Cefiro)의 2세대 모델을 기반으로 한 중형 세단으로, 일본 닛산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우수한 품질과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며 시장에 진입했다. 이어서 삼성상용차는 1998년 11월 닛산 아틀라스를 베이스로 한 1톤 트럭 '야무진'을 출시했다.

SM5는 소비자들로부터 품질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불행히도 출시 시기가 외환위기와 맞물렸다는 점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자동차 제조는 대규모 초기 투자가 필요한 장치산업인데, 당시 아시아 금융 위기로 내수 경기가 위축된 데다 글로벌 '빅6'론이 대두되어 대규모 업체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장 환경이었다.

외환위기와 법정관리

삼성자동차는 생산 시작 첫해에 큰 위기에 직면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인한 경제 충격파는 삼성자동차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더욱이 당시 진행된 재벌 간의 소위 '빅딜(big deal)' 과정에서 1998년 12월 정부에 의해 삼성자동차는 대우전자와의 맞교환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맞교환은 결국 무산되었지만, 자금 압박과 수익성 악화로 1999년 6월 30일 삼성그룹은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건희 회장은 손실 보전을 위해 2조 8천억 원 상당의 보유 주식을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자동차 사업 진출을 위해 10년 가까이 준비해온 삼성의 야심찬 도전은 불과 2년 만에 좌절되었다.

르노자동차의 인수와 르노삼성의 탄생

위기에 처한 삼성자동차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2000년 7월 3일, 프랑스 르노그룹의 자회사인 르노그룹BV는 삼성카드와 삼성캐피탈과 합작투자계약을 체결했다. 7월 14일에는 '르노삼성자동차(주)'를 설립했고, 9월 1일 삼성자동차의 자동차사업을 공식 인수했다.

설립 당시 르노삼성의 지분 구조는 르노그룹BV가 70.1%, 삼성캐피탈과 삼성카드가 19.9%, 한빛은행 등 17개 삼성자동차 채권금융기관이 10%를 보유했다. 르노는 삼성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는 10년 단위 계약을 체결했으며, 삼성물산과 삼성카드는 영업이익이 발생하는 해에 매출의 0.8%를 상표권 사용료로 지급받는 조건이었다.

르노삼성의 경영과 변천사

르노삼성자동차의 경영 실적은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설립 초기 2년 동안은 적자를 기록했지만, 2002년부터 흑자로 전환했다. 2006년에는 2,200억 원 이상의 최고 당기순이익을 기록했으나, 이후 실적이 다시 악화되었다.

2004년에는 삼성의 지분(19.9%)이 모두 삼성카드로 넘어갔으며, 2006년에는 금융기관의 지분도 르노그룹BV로 이전되어 르노 80.1%, 삼성 19.9%의 지분 구조가 형성되었다. 2009년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르노삼성의 점유율은 9.3%로, GM대우(7.2%)와 쌍용(1.5%)보다는 높았지만 현대자동차(47.7%)와 기아자동차(28.2%)에 비해서는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

삼성과 르노의 결별과 새로운 전환점

2020년 르노삼성차와 삼성은 브랜드 이용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르노 입장에서는 국내 인지도가 상승한 데다 삼성에 지급하는 로열티도 부담이었고, 삼성은 르노 지분 보유로 인해 다른 자동차 회사와의 거래에 제약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2021년 8월, 삼성카드는 삼성증권을 매각주관사로 선정하고 르노삼성차 지분 19.9%를 매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1995년 삼성자동차를 출범시킨 지 26년 만에 자동차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결정이었다.

르노삼성차는 2022년 3월 '르노코리아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2023년부터는 '삼성' 브랜드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이건희 회장의 야심찬 도전으로 시작됐던 삼성의 자동차 사업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자동차 산업의 교훈과 미래 전망

삼성자동차의 흥망성쇠는 한국 경제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충분한 자금력과 기업 역량을 갖추고 있더라도 외부 환경 변화와 산업의 특성을 간과하면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자동차와 같은 장치산업은 대규모 초기 투자가 필요하고 수익 창출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외부 충격에 취약할 수 있다는 점도 시사한다.

현재 한국 자동차 시장은 현대차그룹이 주도하고 있으며, 르노코리아는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23년 이후 삼성 브랜드 없이 르노 단독 브랜드로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기업의 정체성 확립과 시장 점유율 확대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삼성그룹이 자동차 사업에서 철수했지만, 최근 전장 부품과 배터리 등 자동차 관련 산업에 다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미래 모빌리티 시장에서 삼성그룹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그리고 르노코리아자동차가 한국 시장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앞으로의 전개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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