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전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긴장감이 있다. ‘질 수 없다’는 마음과 ‘이겨야 한다’는 부담이 한데 뒤엉키는 무대. 10월 19일 방송된 MBC ‘신인감독 김연경’ 4회는 그 긴장감을 초반부터 끝까지 곤두세웠다. 상대는 일본 고교 최강 슈지츠 고등학교. 애니메이션 ‘하이큐!!’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인터하이를 직접 찾아가 전력 분석을 했다는 김연경 감독은 일본 원정 스카우팅을 마치자마자 곧장 체육관으로 돌아와 선수단을 모아놓고 전술 브리핑부터 시작했다. 핵심은 간단했다. “슈지츠는 지옥 같은 수비와 긴 랠리로 흔드는 팀이다. 우리도 버텨야 한다.” 랠리 지속, 첫 수비(디그) 집중, 전환 속도, 이 세 가지가 훈련 키워드로 못박혔다.

훈련은 ‘강도’라는 단어로는 모자랄 정도였다. 세터 이나연·이진·구솔에게는 토스 높낮이와 궤적, 세컨드볼 판단, 미들 블로커와의 속도 맞춤을 세밀하게 주문했고, 레프트 표승주·인쿠시에겐 고스윙으로 블록을 맞고 나가게 하는 처리, 크로스와 라인 코스 전환, 파이프 연결을 반복 점검했다. 라이트(아포짓) 윤영인에게는 트랜지션 상황에서의 백어택 속도와 라이트 측 미스매치 공략을, 리베로 라인에겐 서브 리시브 라인 정렬과 콜(볼 콜) 선명도를 계속 강조했다. ‘지옥 수비’에 맞서려면 결국 첫 터치의 질과 체력, 그리고 지치지 않는 소통이 답이라는 메시지였다.
경기 당일, 일본 응원단의 함성은 말 그대로 벽처럼 밀려왔다. 필승 원더독스는 1세트 시작과 동시에 0-5로 끌려가며 얼어붙었다. 김연경 감독은 빠르게 타임아웃을 불렀다. “첫 수비부터 잡아. 세컨드볼 정돈하고, 콜 크게!” 벤치에서 날아든 짧은 지시가 코트에 닿자, 세터가 중앙을 한두 번 더 쓰며 블로킹 타이밍을 흔들기 시작했다. 김연경은 상대 주패턴을 읽자 과감히 3인 블로킹을 지정했고, 이 선택이 몇 차례 랠리에서 바로 적중하면서 분위기가 살아났다.

이날 1세트의 키워드는 표승주였다. 도쿄 올림픽 때 김연경 주장 아래에서 뛰던 그가, 이번엔 필승 원더독스의 주장으로 가장 먼저 팀을 붙들었다. 서브로 상대 리시브 라인을 흔들고, 사이드 라인을 겨냥한 날카로운 공격으로 득점을 쌓았다. 안정적인 수비까지 더해 ‘양면 에이스’의 면모를 보여줬다. 공식 기록으로 1세트에서만 8득점, 공격 성공률 55%. 숫자는 담담하지만, 흐름을 바꾸는 힘은 분명했다. 팀이 초반 잃어버린 5점을 실제로 되찾아 올 만큼 표승주의 서브 흐름도 길게 이어졌다. 김연경이 라인 밖에서 블로킹 포지션을 몇 차례 손짓으로 미세 조정해준 뒤부터는 팀 전체의 수비 간격도 확연히 정돈됐다. 그렇게 원더독스는 1세트를 잡았다.
2세트는 지능 싸움이었다. 김연경은 슈지츠의 수비가 후위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포인트를 정확히 집어냈다. “푸시(푸싱)로 빈 공간을 찔러.” 단어 하나가 전술이 됐다. 표승주는 그 주문을 정확히 이행했다. 강타만이 답이 아니라는 듯, 순간적으로 속도를 죽여 블록과 수비의 중간지점을 밀어 넣는 푸시로 14-14를 만들었다. 상대 수비 라인이 잠깐 허물어진 그 틈에 원더독스는 다시 속도를 올렸다. 이나연의 공간이 잠깐 열리며 흔들리자 김연경은 지체 없이 구솔을 투입했다. 구솔은 들어오자마자 블로킹 라인을 한 칸 높이고, 토스를 과감하게 올렸다. ‘비주전’이라는 꼬리표를 단 선수에게는 쉽지 않은 역할이었지만, 이날만큼은 그 경계가 무색했다. 토스가 정확해지니 미들 속공과 사이드 공격이 다시 박자를 찾았고, 벤치·중계진 모두가 박수를 보낼 만큼 흐름 전환이 깔끔했다. 원더독스는 2세트까지 연달아 가져가며 승기를 잡았다.

하지만 슈지츠는 ‘지옥 수비’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팀이 아니다. 3세트는 일본식 조직력이 제대로 드러났다. 첫 번째 디그가 기계처럼 떠올라가고, 커버가 끊기지 않았다. 원더독스는 사이드에서 연속해서 막히며 득점이 말랐다. 이때 김연경 감독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어디 때려야 해!” 인쿠시에게 날아간 일갈이었다. 무작정 세게만 때리는 스윙이 아니라, 지금 이 상대 블록과 수비 배열을 보고 ‘공간’을 겨냥하라는 주문. 그 한마디는 꾸짖음이었지만 동시에 방향 제시였다. 이후 인쿠시는 코스 선택을 바꾸려 애썼고, 팀도 블로킹을 강화해 다시 몸을 세웠다. 세트 후반 추격의 불씨가 붙을 만큼 분위기를 끌어올렸지만, 슈지츠의 사이드 공격은 여전히 거셌고, 원더독스는 세트 중반 이후 급격히 밀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버텨 준 덕분에 다음 회차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감은 더 커졌다. 방송은 딱 그 지점에서 멈춰섰다. 결과는 다음 주 공개라는 예고와 함께.
이날 경기를 관통하는 흐름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초반 흔들림—빠른 교정’의 반복. 0-5 스타트는 최악이었지만, 타임아웃 하나에 팀 전체의 약속이 되살아났다. 둘째, ‘세터 템포 다변화—중앙 활용—사이드 공간 확보’라는 공격 구조의 복원. 이진이 중심을 잡고, 구솔이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토스의 높이와 속도가 살아났다. 미들이 중앙에서 블록을 붙들어주니 레프트·라이트가 1대1 상황을 더 자주 만들 수 있었다. 셋째, ‘주장 표승주의 존재감’. 서브로 흐름을 바꾸고, 사이드에서 마무리하고, 수비에서 버티는 세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수치로 보이는 8득점·55%보다 중요한 건 세트의 기류를 끌어오는 타이밍 감각이었다.

감독 김연경의 리더십 역시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일본 현장 스카우팅으로 시작해, 전술 브리핑과 고강도 훈련, 소음 적응까지 과정을 밟은 뒤, 경기장에서는 타임아웃 한두 마디로 핵심만 찔렀다. “첫 수비 잡아라, 세컨드볼 정리해라, 콜 크게” 같은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한일전 같은 큰 무대에선 그 기본이 가장 먼저 무너진다. 김연경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속된 플레이를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블로킹 포지션을 손짓으로 미세 조정하며, 서브 타게팅을 수시로 바꿨다. 그리고 필요할 땐 따끔하게 질렀다.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리려는 인쿠시에게 날아간 “어디 때려야 해!”는 팀 전체에 ‘지금은 전술의 시간’이라는 메시지를 또렷이 새겼다.
방송 바깥의 반응도 뜨거웠다. 2049 시청률 2.6%로 일요일 전체 1위, 분당 최고 시청률 5.6%까지 치솟았다. 수도권 가구 시청률도 4.1%. 보여주기식 예능이 아니라 ‘진짜 경기’의 호흡과 땀, 눈물을 담아냈다는 점이 통했다. 무엇보다도 주전·비주전의 경계를 허무는 장면들이 좋았다. 구솔이 그랬고, 표승주가 그랬다. 누가 코트에 서느냐가 아니라, 서는 순간 어떤 역할을 해내느냐가 전부인 세계. 김연경 감독은 그 세계의 문턱을 선수들에게 정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한 세트(혹은 그 이상)의 마무리다. 슈지츠의 지옥 수비를 끝내 뚫어내려면, 2세트에서 효과를 봤던 푸시와 속공 타이밍을 한 번 더 섞을 필요가 있다. 서브는 네 곳을 번갈아 공략하되, 리시브 에이스에게 집중적으로 체력을 빼놓는 것이 좋다. 블로킹은 손 위치를 조금 더 낮게 출발해 마지막 순간에 올려 ‘맞블록’이 아니라 ‘터치 아웃’을 유도하는 편이 안전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1세트 초반처럼 흔들려도 다시 약속대로 정렬하는 그 속도다. 이미 증명했다. 원더독스는 흔들려도 금방 바로 선다는 것을.

4회는 경기의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과정의 땀을 더 많이 보여줬다. 선수들이 어떤 말을 듣고, 어떤 훈련을 하고, 어떤 표정으로 코트에 나서는지. 그래서 더 기대가 된다. 다음 회, 그 마지막 공 하나가 어디에 꽂힐지. 장담하건대, 그 공은 단순한 1점이 아니라, 이 팀이 앞으로 어떤 팀이 될지를 말해줄 문장 같은 점일 것이다. 한일전은 늘 부담스럽지만, 그런 경기에서 배운 것들은 다음 시즌 내내 팀을 지탱한다. 필승 원더독스가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리고 그 길목마다, 김연경의 단호한 한마디와 표승주의 단단한 표정, 구솔의 담대한 손끝이 함께 서 있다. 결과가 어떻든, 이 팀은 이미 ‘지려야 지는 방법’을 잊어가고 있다. 이만하면 다음 주를 기다릴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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