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인 순간 들리는 선율 영화 속 명장면 심어지는 한 방 [심광도의 영화 속 클래식]

심광도 음악평론가 2025. 11. 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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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골 삽입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변주 작품 중 최고 걸작 평가
작품 의미·감정 전달 극대화

영화의 장면을 위하여 쓰인 클래식 중 가장 많이 쓰인 작곡가의 작품은 무엇일까? 언뜻 떠오르는 곡이라면 비발디의 사계다. 봄의 1악장, 겨울의 1악장(올드보이), 그리고 현대에 들어 여름의 3악장(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까지 '이제 그만'이라 외치고 싶을 정도다. 또 하나의 곡을 든다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이후 인터뷰에서 조심스레 도전을 약속했고, 올해 들어 통영 국제 음악제, 카네기 홀 투어, 베르비에 축제 등을 통해 선보이며 국내 팬들에게, 아니 전 세계 애호가들의 호평을 받는 중이다.

변주 양식 작품 중 최고의 위치에 자리한 걸작이란 평가를 받는 작품. 이러한 평가의 동곡이 등장한 영화를 떠올리자면 대충 세어도 10개를 쉬 넘으며 모두가 나름의 메시지를 지닌 명작이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영화의 (음악)감독들은 이 곡에 천착하는 것일까? 이는 곡이 지닌 상징성과 의미, 그리고 음악사적 가치에 힘입은바, 세상엔 많은 음악이 존재하고 모두가 나름의 존재가치를 부여받지만 골드베르크 변주곡만큼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 증폭하는 음악적 장치가 없기 때문일 것으로, 곡이 등장하는 장면 속 은유로 숨겨져 있기도 하며 주인공의 대사로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이제, 딱딱한 이론적 접근이 아닌, 곡이 등장한 여러 영화를 통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지닌 음악적 의미와 가치, 그리고 철학을 살펴본다면 어떨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 한 장면.

1. '시간의 반복, 양이 쌓여 질적 변화로' –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제1변주)

과학실 호두 탓에 마코토의 타임 리프 여행이 시작되었다. 시간의 미묘한 차이가 쌓였고 이로 인해 상황은 원래의 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좌충우돌 속에 마코토의 내면도 성장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아리아'로 문을 열고 30개의 변주를 지나 다시 한번 같은 선율의 '아리아'로 문을 닫는 구성이다. 마지막 들려오는 아리아는 분명히 처음의 것과 같은 선율임에도 다른 느낌이다. 마치 한단계 업그레이드한 또 하나의 객체가 등장한 것만 같다. 시간은 도는 것일까, 흐르는 것일까? 아니라면 돌면서 흐르는 것일까? 마지막 아리아가 흐를 때면 마치 긴 시간 여행을 지나온 것만 같다. 그리고 이때 아리아는 지시한다. '다시 처음으로'(Da Capo) 그렇게 시간을 쌓아 더 나은 내가 된다.
<양들의 침묵> 한 장면.

2. 인간이 쌓아 올린 최고의 지성 – 영화 <양들의 침묵>

연쇄 살인마 한니발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좋아한다. 영화의 후반 탈옥 장면에서 그가 듣던 곡(아리아)으로, 평화로운 선율로 오히려 장면의 잔혹함을 더했다. 그렇다면 왜? 한니발은 자신을 세상에 존재하는 누구보다도 지적인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수준에 부합하는 곡은 오직 골드베르크 변주곡뿐이다.
<지구가 멈추는 날> 한 장면.

3. 절대 질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 –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

외계인 클라투가 지구에 도착했다. 인간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다. 오랜 시간 지켜보며 기회를 줬지만, 인간은 지구와 공존하기엔 무질서하며 파괴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결론이다. 생각해볼 가치도 없던 바로 그 순간,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들려온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도 질서를 추구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이때 클라투의 귀에 들려오던 음악이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3백 년 전 살았던 한 인간이 온 인류를 구하는 순간이다.
<섀도우 헌터스 : 뼈의 도시> 한 장면.

4. 절대 악의 반대편 - 영화 <셰도우 헌터스: 뼈의 도시>, <검은 사제들>

세상에 인간과 인간의 모습을 지닌 악마가 뒤섞여 살아가고 있다. 이에 악마를 퇴치하는 임무를 맡은 헌터들도 함께이며 이들은 세대를 이어 내려져 오고 있다. 악마의 힘이 만만치 않으니 그들의 무기 또한 강력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바흐의 음악이다. 바흐는 3백 년 전 이미 헌터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찾아온 헌터에게 존재를 들키지 않으며 여유롭던 악마가 들려오는 바흐의 음악에 결국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만다.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악마는 바흐를 참을 수 없다. 영화 '검은 사제들'의 두 사제가 퇴마 의식을 위해 무기로 삼은 것 역시 바흐의 음악(칸타타)이었다. 깨어난 악마는 가장 먼저 이를 제거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빌어먹을 바흐!"
<설국열차> 한 장면.

5. 이성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 – 영화 <설국열차>

꼬리 칸의 커티스가 엔진 칸을 향해 나아간다. 혁명이다. 영화 속 열차는 거대한 은유의 공간으로 직선적 세계관, 발전만이 살길이라는 가치관에 대한 비아냥이다. '엔진은 위대하다?' 칸마다 놓인 문을 열 수 있는 남궁민수는 밖으로 나가자며 앞이 아닌 옆에 놓인 문을 바라본다. 하지만, 커티스는 오직 엔진 칸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 역시 열차에 남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열차는 인류 역사의 거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꼬리 칸을 벗어나 처음 맞이한 칸은 폭력으로 난무하다. 이는 인간 역시 동물과 다를 바 없던 수렵의 시대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 칸을 지나 만난 곳은 녹음(綠陰)으로 가득하다. 농경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약탈이 아닌 경작, 폭력이 아닌 이성의 시대. 모든 것이 이제야 평화로운 이곳,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가 흐른다.
<잉글리쉬 페이션트> 한 장면.

6. 어떠한 혼란도 다시 정돈하여 아름답게 –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

비행기 사고로 온몸에 화상을 입고 과거의 기억마저 잊은 영국식 억양의 환자. 헝가리계 귀족이었던 그의 이름은 알마시이며, 간호사 안나가 극진히 간호하는 가운데 조금씩 기억을 되찾는다. 소중히 간직된 수첩에 적힌 캐서린과의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의 추억들. 온몸에 상처를 입어 움직일 수 없는 캐서린을 사막의 동굴에 누인 알마시는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3일의 낮과 밤을 걸었다. 그녀를 살려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에 도착했건만 가로막힌 현실에 시간을 놓쳤고 영국 비행기에 독일 가솔린을 채운 채 겨우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캐서린은 마지막 순간, 랜턴의 불빛만큼이나 얼마 남지 않은 숨결을 두고 마지막 편지를 남겼고, 안나가 이를 눈물로 읽어주는 가운데 알마시는 눈을 감는다. 그녀의 곁으로 떠난 것이다.

극 중 안나는 천사다. 완벽히 이타적이며 자신 또한 전쟁의 와중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 서글프지만, 결코 대면한 혼란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안나가 이탈리아에 남아 병상을 수습하던 중 폐허가 된 건물 안에 놓인 피아노를 발견한다. 다리 한 편을 잃어 기울었지만 소리는 멀쩡했다. 그리고 이때 안나의 손끝에서 시작된 선율이 바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완벽한 균형과 질서인 것이다.

/심광도 음악평론가

※필자 소개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의 편안한 쉼터, 뮤직파라디소를 지키는 뮤파지기입니다. 문화가 물질을 이기는 세상을 꿈꿉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