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오덴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코트는 뜨거웠다. 안세영이 야마구치 아카네를 다시 만났고, 이번엔 웃었다. 1게임을 먼저 내주고도 2, 3게임을 가볍게 가져와 2-1로 뒤집었다. 지난달 수원 코리아오픈 결승에서 당한 일격을 꼭 한 달도 안 돼 되갚은 셈이다. 결과만 보면 ‘설욕’ 두 글자로 끝나지만, 내용은 훨씬 더 또렷했다. 1게임 내주고 들어간 2게임부터 안세영은 발이 한 박자 빨라졌고, 셔틀콕이 라인 끝만 정확히 밟았다. 긴 랠리에서 먼저 무너지던 그림이 싹 사라졌다. 21-10, 21-9. 숫자만 봐도 흐름이 완전히 뒤집혔다는 걸 알 수 있다. 관중석에선 “아, 이게 안세영이지” 하는 탄성이 자연스럽게 터졌다.

이날 경기는 두 선수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줬다. 둘은 서로를 너무 잘 안다. 야마구치는 안세영의 수비와 연결 플레이를, 안세영은 야마구치의 템포 조절과 역공의 타이밍을 읽고 있다. 그래서 결국 이 매치업은 누가 먼저 속도를 장악하느냐, 그리고 위기에서 누가 더 간단하게 해결하느냐로 귀결된다. 1게임 초반, 안세영은 리듬을 잡지 못했다. 셔틀콕이 네트에 자꾸 걸리고, 코너를 찌르려다 라인을 살짝 벗어났다. 반면 야마구치는 가볍게 앞쪽을 건드린 뒤 뒷코트로 쭉 밀어내는 전형적인 본인 패턴으로 흔들었다. 그런데 2게임 시작과 함께 그림이 완전히 바뀌었다. 안세영이 드라이브 속도를 끌어올리고, 발을 한 발 더 앞에 두니 야마구치가 먼저 흔들렸다. 얇은 각으로 내려놓는 커트와 직선 스매시가 섞이면서 야마구치의 발이 묶였고, 결국 범실이 늘었다. 안세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점수판은 빠르게 벌어졌고, 표정도 밝아졌다. 코트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이어지는 긴 랠리에서도 숨이 차지 않는 듯했다.
이 승리는 성적표 하나 더 쌓은 이상의 의미가 있다. 첫째, 리턴매치에서의 승리 경험은 시즌 후반 멘탈에 큰 버팀목이 된다. 코리아오픈 때는 홈 관중 앞이라 더 힘을 주다 보니 손끝이 굳고, 평소라면 가볍게 긁어 내릴 공들이 자꾸 걸렸다. 본인도 경기 후 “조급했다”는 말을 했었다. 덴마크에선 달랐다. 한 점씩 풀어가겠다는 표정이었다. 3게임 초반 7-0으로 달아나며 사실상 승부를 끝낸 장면이 상징적이다. 라인 끝, 네트 앞, 백코트 직선, 다 나왔다. 셔틀콕이 손에 들러붙는 느낌, 선수들이 흔히 말하는 ‘감’이 완전히 돌아왔다. 둘째, 피지컬 관리가 확실해졌다. 여름에 무릎을 한번 크게 신경 쓰고 나서 대회 운영이 더 영리해졌다. 쓸 때 쓰고, 뺄 때 뺀다. 불필요한 전력 소모를 줄이고, 꼭 필요한 포인트에 에너지를 몰아 넣는다. 그게 2·3게임 스코어에 그대로 찍혔다.

야마구치와의 맞대결 구도도 깔끔해졌다. 이젠 상대 전적이 다시 균형을 넘어서고, 내용 면에서도 올여름 이후 흐름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안세영의 강점은 한 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면 흔들림이 적다는 데 있다. 발이 먼저 가 있고, 라켓 면이 공을 정확히 감싸니 상대는 계속 반 박자 늦게 쫓아간다. 특히 이번 대회에선 방어가 단순한 ‘받기’가 아니었다. 디펜스에서 곧장 하프 스매시로 전환되는 장면이 반복됐다. 수비가 공격의 시작이 되는, 안세영다운 배드민턴이 돌아왔다. 야마구치가 1게임에서 통했던 앞뒤 흔들기도 2게임부터는 잘 먹히지 않았다. 안세영이 베이스라인 한 칸 안쪽에서 스텝을 준비하고 있었고, 네트 앞에선 손목 한 번만 꺾어도 셔틀콕이 원하는 각도로 떨어졌다. 그 작은 차이가 점수 차이를 만들었다.
이제 결승이다. 상대는 중국의 왕즈이 또는 한웨. 둘 다 까다롭다. 왕즈이는 랠리가 길어질수록 강하고, 한웨는 코스 선택이 야무지다. 게다가 두 선수 모두 최근 몇 년간 안세영을 가장 많이 연구한 쪽이다. 하지만 이번 덴마크에서 보여준 안세영의 템포를 유지한다면, 누구와 붙어도 주도권 싸움에서 밀릴 가능성은 크지 않다. 키포인트는 두 가지다. 리턴 첫 셔틀콕의 질, 그리고 인터벌 이후 첫 2~3랠리의 매듭. 여기만 확실히 잡으면, 상대가 준비해 온 전술 카드를 꺼낼 타이밍을 애초에 주지 않는다. 덴마크 코트가 조금 미끄럽다는 말이 있는데, 발 스텝이 민감한 선수들에겐 변수가 된다. 오늘처럼 스플릿 스텝이 정확히 들어가면 그 변수도 내 편이 된다.

시즌 그림으로 넓혀봐도 이번 결승은 의미가 깊다. 벌써 올해만 7승. 말레이시아오픈, 전영오픈, 인도네시아오픈 같은 슈퍼 1000을 싹쓸이했고, 일본오픈과 중국 마스터스까지 품었다. 중간에 세계선수권 4강, 코리아오픈 준우승이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 완주가 너무 좋았다. 덴마크오픈까지 우승하면 시즌 8승, 그리고 ‘주춤’이라는 단어를 확실히 지우는 마침표가 된다. 나아가 연말 파이널로 이어지는 흐름 관리 차원에서도 최고다. 사실 안세영에게 가장 무서운 상대는 타국 선수보다 ‘컨디션 흔들림’일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 대회는 시작부터 끝까지 에너지가 일정했다. 그게 무엇보다 반갑다.
세밀하게 보면, 기술적 보정도 눈에 띈다. 네트 앞 백핸드 처리에서 라켓 면을 한 톤 얇게 세우면서 미스가 눈에 띄게 줄었다. 하프 스매시 구간에선 팔로스루를 과감히 길게 가져가 각이 선명해졌다. 무엇보다 서브 리턴이 공격의 문을 열었다. 상대 하이서브가 떠오르면, 리턴을 단순히 밀어 넣지 않고 몸 쪽으로 한 번 접어 코트를 좁힌다. 그러면 상대는 두 번째 셔틀에서 이미 선택지가 줄어든다. 이런 작은 디테일이 2·3게임 대승을 만든 바탕이다. 체력 안배도 칭찬할 만하다. 긴 랠리 끝에도 숨 고르기가 빨랐다. 코트 뒤에서 물 한 모금 마시고 돌아오면 표정이 이미 다음 포인트를 보고 있었다.

멘탈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야마구치 같은 상대에게 1게임을 내주면, 보통은 그다음 게임 초반이 더 불안하다. ‘또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근육을 굳게 만든다. 오늘 안세영은 그 고리를 끊었다. 2게임 스타트에서부터 스피드를 확 올려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내가 먼저 밀어붙인다’는 선언 같은 스피드였다. 그게 코트 전체에 전달됐다. 벤치, 관중석, 중계석까지 공기가 바뀌는 느낌이었다. 이건 숫자로 측정하기 어려운 영역이지만, 톱랭커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순간이다. 위기에서 한 박자 먼저 가는 결심. 오늘은 그 결심이 승부를 갈랐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한 경기. 여기서 중요한 건 과욕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오늘처럼 단순하게, 필요한 샷만 꺼내고 불필요한 숏랠리 싸움은 피하면서 긴 호흡으로 끌고 가면 된다. 결승전이니 상대도 분명히 별 생각을 다 갖고 나온다. 하지만 안세영이 올 시즌 내내 증명해온 건 ‘내 템포가 가장 강력한 전술’이라는 사실이다. 라켓을 너무 세게 쥐지 말 것, 첫 두 발을 가볍게 뗄 것, 그리고 라인 끝을 두려워하지 말 것. 그 세 가지면 충분하다.
덴마크오픈은 오래된 전통을 가진 무대다. 유럽 선수들에게는 홈 같은 대회고, 아시아 선수들에겐 체력과 적응력을 시험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무대에서 ‘숙적’을 꺾고 결승에 섰다. 이미 많은 걸 해냈지만, 안세영은 보통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표정 무너지지 않고, 루틴대로. 오늘 2, 3게임처럼만 하면, 트로피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번, ‘세계 1위’라는 말이 왜 안세영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흐름이면, 시즌 8승이라는 숫자도, 덴마크 첫 우승이라는 타이틀도 그리 멀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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