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만 있는거 아니다..세계 3위+5위가 ‘급조’했는데 이렇게 강력하나?

칭다오 콘손체육관에서 한국 여자 배드민턴이 보여준 장면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승부를 하러 간 게 아니라, 우승을 설계하러 갔다.” 조별리그 대만전은 단체전 특성상 단순한 1승짜리 경기가 아니다. 조 1위가 걸려 있고, 대진이 바뀌며, 토너먼트에서 ‘피해야 할 팀’을 피할 수 있는 갈림길이 된다. 게다가 이번 대회는 4강에만 올라가도 4월 덴마크에서 열리는 세계남녀단체선수권 본선행이 달려 있다. 한 경기의 의미가 여러 겹으로 쌓이는 날, 한국은 가장 확실한 카드부터 꺼냈다. 그리고 그 카드가 이름값을 넘어 ‘대회 흐름’ 자체를 바꿔버렸다. 안세영.

안세영(삼성생명)은 대만의 에이스 치우 핀 치안(세계 14위)을 상대로 21-10, 21-13, 2대0 완승을 거뒀다. 시간도 길지 않았다. 약 40분 안쪽에서 끝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스코어가 아니라 경기의 성격이다. 단체전 1단식은 팀의 얼굴이고,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날의 공기’를 결정한다. 1단식이 길어지면 뒤에 나설 복식과 단식 선수들은 워밍업을 해도 마음이 차가워진다. “혹시 오늘 꼬이는 날인가”라는 생각이 한 번 스치면, 단체전은 연쇄반응이 시작된다. 반대로 1단식이 짧고 단단하면, 그날 경기는 ‘승부’가 아니라 ‘운영’이 된다. 감독의 선택지가 늘어나고, 컨디션 조절이 가능해지고, 교체·조합을 만질 여유가 생긴다. 안세영은 그 여유를 통째로 벌어줬다.

경기 내용은 더 깔끔했다. 초반 잠깐 흔들리는 듯 보이는 순간이 있었지만, 안세영은 감정적으로 급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레이스를 걸었다. 오늘 승부의 키워드는 다들 말하는 것처럼 ‘드롭샷’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있다. 드롭샷은 그 자체가 비장의 무기가 아니다. 드롭샷을 “언제” 쓰느냐가 무기다. 상대가 뒤로 물러나는 타이밍에 뚝 떨어뜨리면 발이 멈춘다. 앞으로 들어오려는 찰나에 떨어뜨리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발과 머리가 동시에 꼬이면 그다음은 실수다. 안세영은 그 과정을 정말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코트의 구석구석을 찌르다가, 갑자기 짧게 떨어뜨리고, 다시 길게 빼며 리듬을 찢어버린다. 상대는 따라가다 지치고, 지치다 보면 욕심을 내고, 욕심을 내는 순간 안세영은 더 정확해진다. 그래서 1게임 21-10은 ‘대승’이 아니라, 상대의 자신감을 조기에 꺼버린 점수다. 2게임 21-13은 더 무섭다. 반격할 틈은 주되, 동점은 허용하지 않는다. 단체전에서 이게 진짜 에이스다. 크게 이기는 게 아니라, 팀이 흔들릴 가능성을 아예 없애버리는 경기.

안세영이 이렇게 짧게 끝내주니, 그 다음 장면이 더 도드라졌다. 1복식에서 한국이 꺼낸 조합이 파격이었다. 백하나(인천국제공항)와 김혜정(삼성생명)이 한 조로 묶였다. 원래 한국 여자복식의 간판은 이소희-백하나(세계 3위), 공희용-김혜정(세계 5위) 조합이 ‘원투펀치’로 굳어 있었다. 그런데 이소희가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현지에서 급조된 조합이 등장했다. 보통 “급조”라는 말은 불안의 다른 표현이다. 호흡이 어긋나고, 타이밍이 늦고, 서로의 습관을 몰라 애매한 공을 만든다. 그런데 대만전의 백하나-김혜정은 그 상식을 뒤집었다. 스코어가 21-6, 21-6. 두 게임 합쳐 12점만 내주고 끝냈다. 이건 단순히 상대가 무너졌다, 수준을 넘어선다. “조합이 바뀌어도 한국 복식의 기본기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선언에 가깝다.

여기서 흥미로운 포인트는, 이 조합이 ‘어쩔 수 없이’ 만들어졌는데 결과는 ‘전술 실험’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단체전은 팀의 두께가 곧 실력이다. 대회가 길어질수록 부상 변수가 나오고, 하루 컨디션이 출렁이고, 갑자기 누군가가 흔들린다. 그때 우승하는 팀은 한 가지 조합만 고집하지 않는다. 여러 조합을 돌릴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카드가 바뀌어도 경기력이 유지된다. 백하나-김혜정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이기면, 대표팀은 선택지가 늘어난다. “원래 조합으로 돌아가야 하나”가 아니라 “상대 성향에 따라 최적 조합을 고를 수 있나”로 질문이 바뀐다. 이 차이가 단체전에서는 엄청 크다.

그리고 한국은 이날 4-1로 대만을 잡으며 조 1위를 확정했고, 조별리그 2연승으로 8강에 올라섰다. 과정도 단체전다운 그림이었다. 안세영이 ‘첫 단추’를 잠그고, 백하나-김혜정이 ‘분위기’를 더 끌어올렸고, 김가은(삼성생명)이 단식에서 역전승을 해 조 1위를 조기에 확정지었다. 뒤에 이서진(인천국제공항)-이연우(삼성생명) 조가 복식에서 패했지만, 박가은(김천시청)이 단식을 다시 잡으며 전체 스코어를 4-1로 마무리했다. 단체전은 늘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 다 이기면 좋지만, 진짜 강팀은 중간에 흔들려도 전체 흐름을 망치지 않는다. 오늘 한국은 흔들림이 나오더라도 ‘총합’을 지켜냈고, 무엇보다 초반부터 경기의 온도를 자신들이 정했다.

이번 대회의 한국 여자대표팀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이유는 “안세영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안세영이 ‘기둥’인 건 맞다. 그런데 기둥만 튼튼하면 집이 되는 게 아니다. 기둥이 서면, 벽이 올라가고, 지붕이 얹힌다. 오늘 대만전은 그 ‘벽’과 ‘지붕’이 동시에 올라간 경기였다. 급조된 복식이 21-6으로 두 세트를 쓸어 담았다는 건, 팀의 구조가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뜻이다. 단식에서도 김가은, 박가은 같은 선수들이 자기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건, 토너먼트에서 생길 수 있는 변수를 흡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단체전 우승은 “최고 한 명”이 아니라 “평균이 높은 팀”이 가져간다. 한국은 오늘 그 평균을 확 끌어올렸다.

또 하나, 단체전에서 안세영의 존재가 특별한 이유는 실력 외에도 ‘경기의 길이’를 다룰 줄 알기 때문이다. 같은 2-0이라도, 상대가 숨을 한번 돌릴 틈 없이 끝내는 2-0이 있고, 치열하게 흔들리다 겨우 잡는 2-0이 있다. 오늘 안세영은 전자였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단체전에서 가장 비싼 자원은 체력보다 감정이기 때문이다. 불안이 퍼지는 순간,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힘이 들어가면 범실이 나온다. 범실이 나오면 더 불안해진다. 그걸 끊는 가장 쉬운 방법이 “첫 경기에서 상대를 확실히 눌러버리는 것”이다. 안세영이 해낸 건 바로 그 역할이다.

이제 관심은 자연스럽게 토너먼트로 옮겨간다. 한국 여자대표팀은 아직 이 대회 우승 경험이 없고,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었다는 부담이 있다. 하지만 부담을 지우는 방법은 늘 같았다. “상대가 강하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나”를 먼저 보여주는 것. 대만전의 1단식과 1복식은 그걸 보여줬다. 안세영이 상대의 숨을 끊고, 백하나-김혜정이 ‘급조’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며, 팀 전체가 ‘우승 루트’를 눈에 보이게 그렸다. 오늘이 단지 조별리그 한 경기였다면,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 1위 분수령이었고, 4강 티켓(세계단체선수권 본선행)까지 연결되는 길목이었다. 그 길목에서 한국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해 보였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이번엔 정말 사상 첫 정상까지 갈 수 있나?”

오늘 같은 경기력이 반복된다면, 그 질문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현실적인 전망이 된다. 우승은 큰 소리로 외친다고 오는 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한 경기씩, 분위기부터 잠그면서 가까워진다. 그리고 지금 한국은, 그 방식으로 가고 있다.

Copyright © 구독과 좋아요는 콘텐츠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