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 40년 명장, 폐교에서 전통문화 다시 싹틔운다

경남지역 숙련 기술인 단체 '경상남도최고장인회'는 2023년 3월 '경상남도명장회'로 명칭을 바꾼 후 도내 숙련 기술 전수·계승에 더욱더 힘을 쏟고 있다. 최고장인회가 명장회로 거듭난 이유는 더욱 대중 친화적이면서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기술인이라는 호칭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경남에는 2022년 기준 총 74명이 명장으로 등록돼있다. 기계·재료·전기·조선·공예·화훼·제과제빵 등 37개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인재를 만나본다.

이위준 수로요 대표. /수로요

남해에서 태어난 남아는 가난한 환경에 고향을 떠나 양산, 부산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하루 벌어 하루 지냈다. 입에 겨우 풀칠하는 삶 속에서도 소년은 배움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하루는 서예 교실 선생을 통해 차 문화를 배우게 됐는데, 고급 차 문화와 아름다운 다기는 남아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소년에게 다기의 생김새는 매력적이었고, 그의 관심사는 자연스레 차 문화와 다기로 향햇다.

소년은 차를 마시며 꿈꿨다. 언젠가는 이 아름다운 다기를 내 손으로 직접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늘날 '보천'으로 불리는 이위준(67) 수로요 보천도예창조학교 대표이자 경남도 명장이다.

수로요 보천도예창조학교 전경. /안지산 기자

◇차와 다기의 풍류에 반하다 = "멋진 다기를 만들고 싶어 도예에 발을 담근 지가 벌써 40여 년이다. 경기도 이천, 김해를 거쳐 현재 고성에 자리 잡고 '즐겁게 놀자'는 마음으로 매일매일을 축제처럼 보내고 있다."

이 대표는 주말에 진행될 지역 도자기 축제에 필요한 도자기를 빚으며 말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이 격언처럼 매일 도자기를 빚는 이 대표에게 도예는 직업이 아닌 즐거움 그 자체다.

그가 처음 도예와 만난 시기는 입대를 앞두고 있던 때였다.

이 대표는 "어머니는 내가 '화이트칼라'가 되길 바라셨지만, '하고잡이'였던 내게 화이트칼라는 어울리지 않았다"며 "녹차를 즐기고 정약용 선생 등 선현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자연스레 도공의 길에 접어들게 됐다"고 밝혔다.

차 문화는 멋졌고, 다기는 아름다웠다. 그 문화에 흠뻑 매료된 이 대표는 양산, 김해, 경북 문경, 부산 기장, 경기 이천을 쏘아 다니며 다기를 배웠다. 그는 이천에서 남곡 고승술 선생 휘하에서 수학했는데, 고 선생의 자녀이자 1세대 여류조각가였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도예가 집안에서 도예인 사위를 맞은 것이다.

이 대표는 "스승님이자 장인이신 선생님은 물론, 아내와 처남 등 온 집안 식구가 도예인이었다"며 "그 DNA를 물려받았는지 자녀도 미대에 진학해 도예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유년 시절 삶의 터전이자 차 문화가 발달해 있던 김해로 1981년 아내와 함께 둥지를 옮겼다. 김해시 진례면에 옹기를 만드는 '옹기골'이 있었는데 여기에 가마를 짓고 본격적으로 찻사발을 구웠다.

그는 "당시 아내는 연고가 전혀 없는 김해로 터전을 옮기는 데도 반대하는 기색이 없었다"며 "오히려 아내가 나보다 도자기를 더 좋아해서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다. 김해는 물론 고성으로 가고자 했을 때도 흔쾌히 호응해줬다"고 밝혔다.

처가가 있는 도예 메카 이천을 떠나 김해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이 대표는 '맨땅에 헤딩'으로 도예를 시작했다. 시행착오 속에서도 '보천 이위준'의 다기를 즐겨주는 이들이 하나둘 늘었다.

차 애호가부터 스님까지 다양한 이들의 호응 속에서 그는 1987년 부산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그는 바늘로 두드려 도자기 겉에 무늬를 새기는 '침화' 기법으로 새로운 도자기 디자인을 선보였다. 창의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이 대표는 김해에서 오랜 기간 활동하며 도예 분야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위준 수로요 대표가 작품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 /안지산 기자

◇원로 선생님 소원, 지역 대표축제로 거듭나 = 1996년, 이 대표가 김해도예협회 회장 자리에 있을 때였다. 김해에 처음 자리 잡았을 때 이 대표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토광 배종태 선생이 그에게 '살아생전 소원'이 있다고 운을 띄웠다.

배 선생은 "경기 이천처럼 우리 김해에도 뛰어난 도예인이 많고, 역작이 많다. 이걸 대중과 함께 소통하며 즐기는 장을 보천(이 대표)이 만들어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옛 도공 어르신들이 가난하게 사셨지만, 자부심은 대단하셨다. 아버지처럼 모시던 토광 선생께서 살아생전 소원이라고 하시니 마음이 동했다"며 "젊은 기백과 도리로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 대표는 축제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시청, 시의회, 관계 단체 등에 김해 도자기 축제 필요성을 입이 닳도록 설파했다.

적은 예산으로 논밭에 어설픈 텐트를 치고 시작한 첫 축제.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 일부 도예인들만 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결과는 대반전이었다.

이 대표는 "출품작도 모자라 공방의 먼지 덮인 도자기까지 싹 긁어모아 대중들에 김해 도자기 저력을 선보였다"며 "도예인 동호회로 그칠 줄 알았던 게 인산인해를 이루자, 당시 회원들이 축제를 기획해 고맙다고 벽돌만 한 휴대전화를 선물해줬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전설적인 첫 전시회는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예비축제로 격을 올리면서 지역 대표 축제로 거듭나게 된다. 이 대표는 모두가 박수를 보낼 때 김해를 떠나 새로운 고행길에 올랐다.

◇폐교, 도자기 학습 공간으로 재탄생 = 그의 새 여정이 시작된 곳은 고성군 구만면. 고령토 생산 거점으로, 예부터 도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구전이 내려오는 지역이다.

이 대표의 목표는 즐겁게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도예의 재미를 깨닫고, 지역 도예인에게는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이 대표는 "김해에서 수십 년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지만,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여력이 닿을 때 하고 싶었다"며 "4300평 폐교에 녹차, 가마, 교육시설 등을 세우는 것으로 출발했다"고 말했다.

폐교 안은 지역 신예 도예가를 위한 숙소, 작업 공간, 전시공간으로 꾸몄다. 2008년에는 '전국학생 창작도자기 만들기 대회'를 개최해 도자기는 둥근 그릇이라는 틀에을 깨는 창작 사고를 통해 결과물을 만들게 했다. 초대 대회 우승작은 무시무시한 이빨이 달린 휴대폰 속에 인간이 기어 들어가는 모습을 한 도자기다. 대회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수로요는 공룡 관광지를 기반으로 티라노사우루스·브라키오사우루스·하트사우루스(등에 하트 모양 무늬가 있는 창작 공룡) 머그잔도 개발해 특허청 디자인 등록도 냈다.

도예업계에서 선구적인 활동, 지역축제 개발, 후학 양성 등의 우수한 성과를 도출한 이 대표는 2013년에는 경상남도 최고장인으로 선정됐다.

명장 선정 후에도 이 대표는 더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1년 구만면 마을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연극을 만들고, 그에 어울리는 도자기를 개발해 '구마이 사발 문화축제'를 기획했다.

이 대표는 "예부터 고령토가 많았던 구만면은 보통 막사발보다 더 큰 백자 사발을 많이 사용했다"며 "어렵고 가난한 시절, 한 머슴이 허기를 채우고자 밥 한술을 더 먹게 해달라는 말을 도공이 듣고 사발을 크게 만들었다는 유래에서 착안한 것이 '구마이 사발'"이라고 설명했다.

구만면 폐교의 수로요 보천도예창조학교는 이 대표 입주 이후 창작활동의 산실이 됐다. 덕분에 우수 폐교사례로 알려지며 타 지역에서도 벤치마킹하고자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

보천은 앞으로도 자유분방하고 창의적이며, 신선한 축제를 기획하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대학에서 도예과가 없어지고 있는데, 그 명줄을 이어가기 위해 지역 도예인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고자 한다"며 "매주 TV 프로그램 <TV쇼 진품명품>을 챙겨 본다. 우리 옛것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정신무장하는 삶을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안지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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