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며 울렁거렸다”…한국사회 오늘을 비춘 6인의 빛나는 거울들 [Books]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9. 1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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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 등
단편소설 8편 한데 엮어
대상 손보미 작가의 자선작
‘천생연분’도 함께 실어
지난해 대상 작가 안보윤
‘그날의 정모’ 최신작 선보여
올해 이효석문학상 수상자들. 대상을 수상한 손보미 작가, 우수작품상을 받은 문지혁·서장원·성해나·안윤·예소연 작가(왼쪽부터). [사진 = 북다]
단편소설의 미학은 ‘제약’으로부터 온다.

정해진 분량 안에, 정확히는 ‘앉은 자리에서 한 편을 다 읽을 수 있는’ 분량 속에 인물의 처한 상황의 우주를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단편 집필엔 고도의 치밀한 구성적 요건을 글줄에 능수능란하게 배치하고 직조하는 작가의 재능과 역량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한해 발표된 한국 단편소설 가운데 가장 첨예한 문제의식을 되짚은 소설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가 출간됐다. 평론가와 소설가들이 모여 진행한 치열한 경합 끝에 소설적 미학을 보여준 작품을 엄선한 이 책을 미리 펼쳐봤다.

올해 책에는 8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올해 대상을 받은 손보미 작가의 작품 2편, 문지혁, 서장원, 성해나, 안윤, 예소윤 작가(이상 우수작품상)의 단편 5편, 또 2023년 대상 수상작가인 안보윤의 최근작 ‘그날의 정모’도 함께 실렸다. 이들 작품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재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대상 수상작 손보미의 ‘끝없는 밤’은 순항하던 10억원짜리 호화 요트가 전복되는 이야기다. ‘그녀’는 남편 지인이 소유한 이 요트에 승선했다가 사고를 당하는데, 갑판 위의 사람들은 배가 요동치자 패닉상태가 된다. ‘그녀’는 난파하는 배를 바라보며 오래 전부터 자신의 신체에 머물던 통증의 이유를 깨달아간다. 읽는 내내 배멀미가 날 것 같은 파동이 독자의 심부를 찌르지만 결론에 이르면 ‘고통의 원인’에 관한 사유가 강렬하다.

함께 수록된 손보미의 ‘천생연분’은 작가가 작품집 출간을 앞두고 직접 선택해 실은 ‘자선작’이다. 소설은 작은 포터 트럭을 운전하는 한 여성에게서 시작된다.

25년 전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는 영국에서 7년간 체류한 뒤 다른 남성과 재혼했다. 불화했던 어머니는 말없이 재혼하더니, 또 호스피스 병동에서 사망할 때까지도 병중임을 자식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새 남편이 어느 날 전화를 걸어온다. ‘연락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내 유언이라서 했다. 남긴 물건이 있으니 가져가라’는 통보였다. ‘그녀’는 원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유품인 거대한 엔티크 가구를 가지러 ‘대여비가 가장 싼’ 차를 몰고가는 중이다. 가는 내내 과거가 ‘그녀’ 내면에 틈입한다.

문지혁의 ‘허리케인 나이트’는 허리케인이 들이친 날 부유한 친구집으로 피신한 남성의 이야기다. 같은 외고를 졸업한 둘은 뉴욕에 체류중으로, 그들의 ‘사회적 계층’은 한때 엇비슷해 보였지만 지금은 확연히 다르다. ‘나’는 소설가, 친구는 유대계 로펌 출신으로 현재 최고위층 부자다. 친구의 콘도미니엄에 도착하니 피터의 아내가 ‘나’를 맞는다. 고교 시절, 피터의 롤렉스를 훔친 적이 있던 ‘나’는 “훔쳤지만 결코 훔칠 수 없는” 뭔가를 느낀다. 빈자가 아닌 중산층의 계급적 박탈감이 문장 저변에 흐른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신빨이 다한 박수무당 문수와 그의 집앞에 이사온 신애기의 갈등을 그렸다. 터가 센 골목이라 무당들이 머무는 그 골목에, 스무살이나 됐을까 싶은 신애기가 이사를 온다. 문수가 모시던 장수할멈이 신애기에게 옮겨간 게 분명해 보인다. 아파트 재건축을 위한 굿판에서 큰 망신을 당한 문수는 신애기가 벌이는 굿판으로 무작정 가서 칠성작두에 오르며 ‘경쟁’한다. 마지막일 수 있는 굿판의 승자는 누굴까. 무속을 주재로 존재 증명, 세대 갈등을 포착했다.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 키 크는 수술을 선택한 오스틴과 트렌스젠더 남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토미를 통해 한 인간의 정체성을 고민했다. 토미는 큰 수술을 받은 직장 동료 오스틴을 자신과 같은 상황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오스틴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토미는 ‘페미가 아닌 좋은 여자’를 운운하며 타자를 혐오하는 문제적 인물이다.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의 문제와 결코 근접할 수 없는 인간 본래의 속성을 예리한 시선으로 다뤘다.

안윤의 ‘담담’도 정체성을 묻는 소설로, 혜재와 은석이 중심인물이다. 양성애자인 혜재는 동성 애인 수윤과 11년을 만났지만 수윤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혜재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이(양성애자)’라고 여기는데, 혜재를 만난 은석은 ‘그게 혜재씨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지’를 되묻는다. 사별한 은석은 한때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유족’이라고 여겼던 때가 있었다. 존재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담았다.

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은 난장판이 된 장례식장의 풍경이 인상적인 단편이다. 암환자였다가 눈을 감은 태수의 딸 수민의 이야기로, 태수씨의 빈소엔 그의 오랜 동료들이 찾아온다. 아빠 태수는 한때 ‘혁명’을 꿈꾸는 운동권이었고 그의 친구들은 ‘지령’을 받고 러시아로 가기도 했다. 강렬했던 시간은 사그라들고 이제 빈소엔 유기견 한마리가 돌아다닌다. 난장판이 된 건 장례식장이 아니라 그들의 과거일 수 있다.

책에는 2023년 이효석문학상 대상을 받은 안보윤 작가의 자선작이 함께 실렸다. ADHD를 겪는 아이 정모를 둘러싸고 단톡방 괴롭힘, 고부 갈등 등을 다룬다. 한국사회의 예리한 문제를 포착해 소설화하는 안보윤의 내공은 더 단단해졌다. 작품집에는 손보미 작가의 수상소감(‘소설이 비로소 완성될 때’), 작품론(정실비 평론가의 ‘파도가 되는 문장들, 표류하는 진실(들)’), 심사평(‘고통의 실로 엮는 자기-바느질’), 인터뷰 등도 함께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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