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KIA 타이거즈의 어바인 스프링캠프에서 이순철 SBS 해설위원을 만나 질문을 던졌다. KIA의 2025시즌을 어떻게 예상하느냐고.
이 위원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특강’을 이야기했다.
그 후 두 달이 지났고, 24경기가 진행됐다. KIA는 7위다. 이 위원에게 다시 물었다. 여전히 KIA가 강하다고 생각하느냐고.
그의 답은 “그렇다”였다.
시즌 시작하기 전 이 위원은 물론 많은 이들이 KIA의 독주를 예상했다.
이 위원이 자신 있게 ‘특강’을 언급한 이유는 “전력이 유지됐고, 조상우도 왔고, 선발이 넘쳐난다. 불펜 튼튼하고, 마무리 잘돼 있다. 야수 뎁스 두껍고, 흠잡을 데가 없다”였다.
일단 이 위원의 이야기대로 지난해 우승 전력에 큰 변화가 없었다. 불펜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책임져 준 장현식의 FA이적은 있었지만 KIA는 발 빠르게 움직여 마무리 출신의 조상우를 품었다.
‘에이스’ 제임스 네일의 잔류 속 ‘빅리거’ 아담 올러로 외국인 원투펀치를 구성했고, ‘토종 좌완 듀오’ 양현종과 윤영철이 순조롭게 시즌을 준비했다. 이의리가 캠프에서 라이브 피칭까지 소화하면서 복귀 이상 무를 알렸고, 김도현과 황동하의 5선발 경쟁은 뜨거웠다.
소크라테스 브리또와 작별하고 패트릭 위즈덤에게 1루를 맡기면서 야수진 운영 폭도 넓어졌다.
프로 3년 차에 리그를 호령한 김도영을 중심으로 타선의 힘도 여전해 보였다. 공격과 주루의 핵심인 박찬호와 최원준이 FA를 앞둔 만큼 퐈로이드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또 하나, 투타의 치열한 경쟁이 전개되면서 이 역시 시너지 효과를 낼 전력으로 평가됐다. 지난해 우승맛을 본 선수들의 의욕도 넘쳤다
어어어 하는 사이 KIA는 최하위도 경험했다. KIA의 예상과 다른 행보에 이순철 위원의 이름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스프링캠프에서 각 팀의 전력을 살펴봤던 이순철 위원은 “대항마가 없다”며 KIA 팬들의 편안한 저녁을 예고했다.
그의 말대로 편하게 발가락 좀 움직이면서 야구를 감상하려던 KIA 팬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시작이었다.
이 위원의 ‘발가락 논란’에 변명을 해준다면 그의 ‘특강론’에는 단서가 있었다.
이 위원은 “부상이 없다면”이라는 전제조건을 이야기했었다.
물론 부상이라는 것은 모든 팀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변수이기는 하다. 부상 없는 팀이 없고, 부상은 핑계일 수 있지만 KIA의 부상은 복잡했다.
지난 시즌 선발진이 4명이나 동시에 부상으로 이탈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던 KIA는 ‘부상 타도’를 외치면서 비시즌부터 스프링캠프까지 몸관리에 공을 들였다.
그리고 바람대로 큰 부상자 없이 스프링캠프가 잘 마무리됐다.
준비한 전력 그대로 시즌을 시작하게 된 만큼 선수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개막전이 끝나기도 전에 부상 이탈자가 나왔다.
10개 구단 팬과 관계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시즌을 시작한 김도영이 두 번째 타석에서 시즌 첫 안타를 남기고 사라졌다.
KIA의 가장 큰 전력이 첫날 사라졌고, 그다음 주자는 유격수 박찬호였다.
수비도 해야 하고 나가서 상대도 압박해야 하는 박찬호에 이어 ‘야구 천재’ 김선빈이 빠졌다.
1루수를 제외한 주전 내야수이자 지난 시즌 3할 타자 3명이 동시에 부상자가 됐다. 여기에 지난해 ‘우승 주역’이기도 한 곽도규는 아예 시즌을 일찍 접어야 했다.
타자들이 잠잠하면 불펜이 어떻게든 틀어막고, 불펜이 흔들리면 더 쳐서 이기던 지난해와는 다른 엇박자였다.
어느 팀이나 부상은 피해 갈 수 없다. 하지만 부상 발생 시기와 연속성은 KIA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또 하나 간과했던 빈틈이 있었다. 우승을 경험한 젊은 선수들의 패기가 연패의 전력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베테랑의 경험과는 다른 경험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실패도 하고 스포트라이트도 받으면서 단단하게 바닥을 다진 베테랑의 경험과 어린 선수들의 경험의 질은 달랐다.
분위기를 탈 때는 젊은 선수들의 힘이 크다.
베테랑이라는 든든한 바탕 위에서 겁 없이 달린다. 반대로 바닥을 밀고 올라서는 힘은 약하다.
괜히 베테랑이 베테랑이 아니라는 걸, 베테랑은 위기 때 가치를 드러나곤 한다.
이 위원이 김선빈의 이탈이 치명적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위원은 ‘연결고리’의 힘을 이야기했다.
그는 “김도영, 박찬호가 빠진 것도 컸지만 김선빈만 버티고 있었다면 공격을 풀어나가는 데 큰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다. 20일 두산전에서도 김선빈이 타석에서 연결을 해줬기 때문에 여유 있게 이길 수 있었다. 볼넷을 나가면서 상대를 괴롭히고, 타점도 만들었다. 김도영이 해결을 한다고 하면 김선빈은 연계를 한다. 그 힘이 크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투타의 최고참 최형우와 양현종이 전면에서 싸움을 걸어주면 ‘신 해결사’가 김도영이 그라운드를 휘저으면 상대에게 KO 펀치를 날렸다.
올해는 베테랑들도 예상치 못한 부상 잽을 연달아 맞으면서 당혹의 봄을 보냈다.
지난해 KIA의 우승을 자신 있게 예고했던 이순철 위원, 그의 변함없는 올 시즌 예상 배경에는 144경기 장기 레이스가 있다. 진짜 시즌은 이제부터라는 것.
세부적으로 보면 마운드에는 이의리가 있다. 윤영철과 양현종의 부진만 보면 특강론을 고민할 수 있지만 이의리라는 자원이 있다.
이 위원은 “이의리가 돌아오니까 선발은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한다. 만약에 이의리의 복귀가 없었다면 ‘특강’에 대한 내 마음이 달라졌을 것인데, 그게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불펜의 키는 조상우다. 초반 부진에서 벗어난 조상우가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생각과는 다른 활약이라는 게 이 위원의 설명이다.
그는 “조상우를 생각하면 빠른 볼과 고속 슬라이더인데 그 부분이 안 보인다. 전상현이 있어서, 최지민이랑 곽도규의 공백을 메워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조상우가 관건이다. 이의리가 복귀라는 조건에서 보면 김도영이 돌아온다면 여전히 KIA는 쉽게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고 말했다.
KIA의 초반 부진에도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이 위원. 예상과는 달랐던 부분은 없을까?
있다.
“김규성이나 백업 선수들이 주전 그늘에 가려져 있었는데 이번에는 큰 공백 없이 메워주고 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그 점은 다르다”며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난 백업 선수들의 성장세를 이야기했다.
그는 위즈덤도 주목하고 있다. 좋지 않을 때 편차가 큰 선수지만 좋을 때는 알차게 활약을 해줬던 소크라테스, 강렬하게 한방을 날리지만 알뜰살뜰한 공격이 아쉬운 위즈덤.
‘기세’도 예상과는 달랐다.
이 위원은 “아무래도 한 점 차 승부들에, 우승 후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음대로 안 이뤄지고, 선수들은 다 빠져나가 버리니까 어려운 경험을 했을 것이다”며 ‘디펜딩 챔피언’다운 면모를 강조했다.
엇박자의 엇박자에 선수들도 혼돈의 초반을 보냈다. 준비했던 것과 또 지켜봤던 것과는 너무 다른 과정과 결과에 선수들은 스스로를 의심했다. 믿음이 필요하다.
위기 상황에서 1군에 콜업된 포수 한승택은 믿음을 이야기했다.
한승택 “올라와서 공을 받아보면 다 좋다. 공이 안 좋은 사람이 없다. 그런데 한 명이 안 좋으면 전염병같이 2명, 3~4명이 안 좋아진다. 1~2명이 좋으면 또 분위기를 탄다. 분위기 타서 다음 투수도 잘 막는다. 공이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다. 초반에는 그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좋은 흐름 속에 던지다 보면 자신감이 생기고, 그런 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며 “(전)상현이가 자신을 몰아붙이는 스타일이다. 자신을 계속 채찍질하니까 안 좋으면 생각이 많아지는 스타일 같다. 소심하고 그런 것 없는데 그런 스타일인 것 같다. 멘탈이 99%다. 도영이, 형우 형, 선빈이 형처럼 타고난 S급 선수들 빼고는 다 멘탈 싸움이다”고 이야기했다.
야구는 결국 기세 싸움이다. 나를 믿고, 동료들을 믿고 “내가 최고”라는 마음가짐으로 그라운드에 올라야 한다.
야구는 절대 평가가 아니라 상대 평가다. 얼마나 빠르게 공을 던지느냐 얼마나 세게 공을 치느냐로 승부가 갈리는 경기가 아니다.
상대의 실수를 유도해서라도 바가지 안타를 만들어내서라도 상대보다 더 많은 점수를 만들어야 이기는 경기다.
이 위원이 이야기한 ‘특강론’이 시즌이 끝나는 날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올 시즌 또 하나의 관전포인트가 생겼다.
<광주일보 김여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