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부패·실정에… ‘중남미 핑크타이드’ 붕괴 시작됐다
19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극우 성향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가 승리하자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핑크 타이드(pink tide·분홍 물결, 중남미 좌파 연쇄 집권)가 퇴조세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해 6월 콜롬비아 대선에서 첫 좌파 후보(구스타보 페트로)가 당선됐고, 넉 달 뒤 브라질 대선에서 ‘중남미 좌파의 대부(代父)’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가 12년 만에 대권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중남미 6대 경제 대국(멕시코·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콜롬비아·페루) 모두 좌파가 집권하는 초유의 상황이 전개됐다.
그러나 페루 대통령이 탄핵으로 축출된 데 이어 중남미 좌파의 적자(嫡子) 격인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대중 영합주의) 집권 세력까지 정권을 내주며 ‘핑크 타이드 6강’ 체제가 허물어졌다. 영국 더타임스는 “이번 아르헨티나 대선이 ‘2차 핑크 타이드’에 종말을 고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1990년대 중남미를 휩쓸었다가 퇴조한 뒤 2018년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 집권을 시작으로 부흥했던 두 번째 ‘분홍 물결’이 썰물처럼 흩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핑크 타이드는 남미에 온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현상으로, 공산주의 유행을 뜻하는 ‘붉은 물결(red tide)’에 비해 상대적으로 밝은 ‘분홍 물결’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2차 핑크 타이드’는 강력했다. 기존 좌파 독재국가인 쿠바·베네수엘라·니카라과뿐 아니라 선거로 정권을 교체해 온 나라에서도 좌파가 잇따라 집권했으며, 지난해 콜롬비아·브라질 대선으로 정점을 찍었다. 만성적인 경제난과 사회 혼란 속에 유권자들이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는 좌파 정당에 매력을 느껴 표를 던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 부패와 무능이라는 해묵은 과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균열의 시작은 페루였다. 청렴 이미지를 앞세워 집권한 교사 출신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이 측근 부패 연루 의혹과 설익은 급진 좌파 정책에 따른 국정 혼란으로 집권 동력을 상실해 지난해 12월 의회에서 탄핵됐다. 이어 중남미 주요국 좌파 정권도 삐걱대는 모습을 보였다. 2022년 36세의 나이로 ‘칠레 역사상 가장 젊고 급진적인 대통령’으로 주목받으며 집권한 가브리엘 보리치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독재 시절(1973~1990)을 무리하게 지워내려다 역풍에 직면했다.
지난해 9월 집권 세력이 주도한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62%라는 압도적 반대로 부결됐다. 이 개정안은 군부 정권 시절을 부정하고, 원주민 권리 확대, 정부와 공기업 내 성평등, 노동조합 권리 강화, 성 정체성 선택 권리 등 급진적 내용이 대거 포함돼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지난 5월 새 헌법을 제정할 헌법위원회 선거에서 우파 야당에 완패했다. 지난 8일 공개된 두 번째 개헌안에는 집권세력의 방향과 달리 임신 중지권 제한 조항 등 보수적 의제가 다수 채택됐다.
줄곧 우파가 집권하다 처음으로 좌파가 정권을 잡은 콜롬비아에서도 집권 세력에 경보음이 들려왔다. 정치적 풍향계로 여겨졌던 지난달 29일 지방선거에서 집권당이 완패한 것이다. 수도 보고타 시장 선거에서는 페드로 대통령의 최측근 구스타보 볼리바르 후보가 집권당 프리미엄을 갖고도 18.7%로 3위에 그쳤다. 과거 우파 정권을 이끌었던 이반 두케, 알바로 우리베 전 대통령은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주요국에 속하지 않는 중남미 국가에서도 최근 우파의 선전이 두드러진다. 지난 10월 열린 에콰도르 대통령 보궐선거에서는 기성 정치인이 아닌 바나나 사업가 출신인 서른여섯 살 다니엘 노보아 후보가 우파 성향 국민민주행동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다. 치안 강화와 빈곤 퇴치 등의 공약이 서민층을 사로잡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남미의 유일한 대만 수교국 파라과이에서 지난 4월 치른 대선에서는 집권 여당 소속 산티아고 페냐 후보가 친중국 성향의 좌파 후보에게 15%포인트 차의 압승을 거뒀다.
중남미의 탈핑크 타이드 흐름이 내년에 한층 거세질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내년 2월 예정된 엘살바도르 대선에서는 초강력 치안정책으로 폭발적 지지를 얻고 있는 우파 성향 나이브 부켈레 현 대통령의 무난한 재선이 점쳐진다. 반면 6월 예정된 멕시코 대선 선거전에서는 집권당의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후보가 지지율 선두다. 손혜현 고려대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소 연구교수는 “밀레이의 승리 원인 중 하나는 중남미에 만연한 집권 세력에 대한 반발·비판 정서”라며 “멕시코를 제외한 다른 중남미 국가에서 부패·무능 정부 심판론을 내세운 우파 후보들이 좌파에 연쇄적으로 승리하는 일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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