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설계된 전기차다
자동차를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닌 내 발이 되어주고 함께 호흡하는 기계장치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시선은 소수에 가깝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자동차의 본질은 명확하다.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을 것, 그리고 필요할 때 짐을 충분히 실을 수 있을 것. 이 두 가지만 충족해도 자동차로서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여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차는 꽤나 목적이 정확하다. 감성이나 낭만보다는 실용성을, 스펙 경쟁보다는 실제 쓰임새를 우선한 전기차. 바로 기아 레이 EV다. 박스형 경차 특유의 넓은 적재 공간과 좁은 골목길에서도 부담 없는 차체 크기, 도심 주행에 최적화된 구성은 그대로 유지됐다. 레이가 그동안 쌓아온 장점 위에 전기차의 특성을 얹은 차량이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배터리가 기존 레이의 단점을 상쇄시켰다
아쉽게도 레이를 그대로 계승한 모델인 만큼 현대차의 자랑인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1회 충전 시 복합 주행거리는 205킬로미터에 그치며 겨울철에는 효율 저하로 약 167킬로미터 수준까지 떨어진다. 수치만 놓고 보면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하지만 이 차량이 애초에 장거리 주행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차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기존 레이의 약점들이 EV로 넘어오면서 상당 부분 상쇄됐다는 것이다. 바닥에 깔린 배터리팩은 무게중심을 낮춰 주행 안정성을 끌어올렸고 전기모터 특유의 즉각적인 반응은 부족했던 동력 성능에 여유를 더했다. 여기에 바닥의 배터리팩이 노면 소음을 억제해 주고 전기차인 만큼 엔진 소음이 사라지면서 소음 측면에서도 체감 차이는 꽤 크다. 전기차 전용 타이어가 적용되면서 소음 억제 효과에 대한 만족도 역시 높은 편이다.

경차지만 안전 사양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경차라는 체급에도 불구하고 안전 사양을 소홀히 하지 않은 점도 눈에 띈다. 전방 충돌 방지 보조와 후측방 충돌 방지 보조, 후방 교차 충돌 방지 보조 등 일상 주행에서 체감도가 높은 기능들이 빠짐없이 탑재됐다. 차로 이탈 방지 보조와 차로 유지 보조 기능도 포함되어 있어 고속도로 주행 시에도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다.
레이 EV는 가솔린 레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만큼 기존 레이가 갖고 있던 장점을 그대로 계승했다. 높은 전고 덕분에 긴 짐도 수월하게 적재할 수 있고 박스형 디자인은 부피가 큰 화물에도 강하다. 슬라이딩 도어 덕분에 좁은 공간에서도 짐을 싣고 내리는 데 불편함이 거의 없다. 여기에 이런 공간이 있었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곳곳에 숨겨진 수납공간은 레이의 상징과도 같다.

도심 물류와 차박족에게 대안이 없는 선택지다
작은 차체와 넓은 적재 공간의 조합은 도심 위주로 물류를 이동해야 하는 수요층에게 거의 대안이 없는 선택지다. 좁은 골목길과 복잡한 주택가, 빽빽한 상가 밀집 지역에서도 레이는 많은 짐을 실은 채 부담 없이 오갈 수 있다. 기아 역시 이를 의식해 뒷좌석이 제거된 레이 밴 모델을 함께 제공하고 있다.
주행거리가 길지 않다는 점도 서울 및 수도권 근교 위주의 이동이라면 큰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하루 주행거리가 100킬로미터 내외인 도심 배송 업무에는 충분한 스펙이다. 오히려 넓은 공간을 활용해 차박용으로 레이 EV 밴을 선택하는 소비자층도 꾸준히 늘고 있다. 전기차 특성상 시동을 끄지 않아도 배터리로 에어컨이나 히터를 가동할 수 있어 차박에 최적화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판매량이 상품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레이 EV의 방향성은 판매 실적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2024년 1월부터 8월까지 레이 EV 판매량은 8555대로 집계됐으며 이는 기아 전기차 라인업 중 가장 많은 수치다. 국산 전기차 전체 순위에서도 1만14대를 기록한 현대차 아이오닉5에 이어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주행거리가 200킬로미터 남짓에 불과한 경차 전기차가 이 정도 판매량을 기록했다는 것은 놀라운 성과다.
레이 EV가 잘 팔리는 전기차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하다. 모두를 위한 차가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차였기 때문이다. 짧은 주행거리 하나만으로 레이 EV를 구매 대상에서 제외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 차는 애초에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대중적인 전기차가 아니다. 수요가 분명한 니치 시장을 정확히 겨냥한 차량이다.

주행거리 한계를 극복한 후속 모델을 기대한다
물론 가장 큰 단점은 여전히 짧은 주행거리다. 이 한계만큼은 분명하다. 겨울철 167킬로미터라는 주행거리는 도심 배송이나 출퇴근용이 아닌 일반적인 용도로는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 충전 인프라가 잘 갖춰진 수도권이 아니라면 충전 스트레스가 클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레이의 공간 활용성과 도심 친화적인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적용해 주행거리 걱정 없이 탈 수 있는 모델이 등장하길 기대해 본다. 만약 레이 EV가 400킬로미터 이상의 주행거리를 확보한다면 도심용을 넘어 더 넓은 소비자층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레이 EV는 도심 최강 전기차라는 타이틀을 지키며 자신만의 영역에서 꾸준히 사랑받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