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여학생, 반사회적 분풀이에 희생당했다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나는 강하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시사저널=정락인 객원기자)
당신도 길을 지나가다 누군가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큰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는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다. 묻지마 범죄는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누구라도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뚜렷하지 않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벌이는 폭력적 범죄를 '이상동기 범죄'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묻지마 범죄'가 여기에 속한다. 최근 전남 순천에서 일어난 10대 여성 살인 사건은 묻지마 범죄의 심각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웬 남자가 쫓아온다, 무서워 죽겠다"
전남 순천시 조례동에 사는 남아무개양(17)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자퇴했다. 이후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지난 8월 시험에 합격해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인정받았다. 평소 경찰관이 되고 싶었던 남양은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9월26일 0시44분쯤 남양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약을 사러 나갔다가 잠시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향했다. 조례동에 위치한 병원 인근 길거리를 걸어갈 때였다. 누군가 남양의 뒤를 몰래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남양은 친구에게 전화해 "웬 남자가 쫓아온다. 무서워 죽겠다"고 말하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약 800m쯤 가자 불빛이 어두운 곳에 다다랐고, 이때 범인이 빠르게 쫓아오더니 갑자기 남양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남양은 배와 가슴을 수차례 찔려 피를 흘린 채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범인은 자세를 낮추면서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남양이 바닥에 쓰러지며 "살려 달라"고 외치자 때마침 지나가던 행인이 비명을 듣고 달려왔고, 범인은 쏜살같이 사라졌다.
행인은 신음하고 있던 남양을 발견하고 "아가씨, 저 남자 알아요?"라고 물었고, 남양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아저씨, 저 좀 살려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의식을 잃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와 경찰은 남양을 근처 병원으로 옮겨 응급조치를 한 다음 광주 전남대병원으로 이송했다. 치명상을 입은 남양은 당일 오전 6시쯤 치료를 받다 끝내 사망한다. 딸이 걱정됐던 아버지가 "밤길 조심하라"고 했지만 외동딸은 묻지마 살인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남양을 흉기로 공격한 범인은 달아나면서 신고 있던 슬리퍼가 벗겨졌다.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맨발로 인근 호프집에 들어가 맥주 반 병을 마셨다. 범행 현장에서 700m쯤 떨어진 자신의 가게로 되돌아온 그는 운동화를 신고 흉기를 소지하고 다시 나와 노래방에 가서 추가로 술을 마시고, 인근 원룸 주차장에 흉기를 버렸다. 1시간 정도 거리를 배회한 후 새벽 3시쯤 인근 마트에 주차된 차량을 발로 찼다가 이를 목격한 차주와 몸싸움을 벌인다.
차주는 상대의 눈빛에 살기가 있고 흥분한 상태여서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를 무력으로 제압한 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넘겼다. 범인은 경찰을 보자 양손을 내밀며 "잡아가세요"라고 말했다. 이때가 새벽 3시쯤이었다.
신원조회 결과 범인은 순천에서 찜닭집을 운영하는 박대성(30)으로 드러났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범행 당시 소주 4병을 마셨고, 그다음은 취해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지만,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경찰이 박씨의 가게를 압수수색한 결과 당시 식탁에는 소주병 4개가 있었지만, 이 중 술이 모두 비워진 것은 2병뿐이었다. 한 병은 마개만 땄고, 나머지 한 병은 마개도 따지 않은 상태였다. 즉 박씨가 실제 마신 술은 소주 2병이었던 것이다.
범행 후 박씨가 주도면밀하게 움직인 것을 보면 술에 취해 살인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특히 범행 후 현장을 빠져나가면서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는 모습이 인근 폐쇄회로(CC)TV에 찍혔는데, 마치 목적을 이룬 것처럼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박씨는 왜 일면식도 없는 남양을 살해한 것일까.
범행 후 심신미약 주장, 형량 줄이기 꼼수도
박대성은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을 괴롭히는 등 말썽을 부렸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툭하면 시비를 걸고 이유 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키가 작고 체격이 왜소했던 박대성은 자기보다 강하면 굽신거리고, 약하면 괴롭히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모습이었다. 군대에 가서도 사소한 것으로 시비를 걸고 싸움을 벌였다. 유격조교로 복무했던 그는 부대의 선임·동기·후임을 가리지 않고 주먹질을 하며 문제를 일으켰다. 박씨와 군 복무를 함께 했던 한 동료는 언론 인터뷰에서 "(박씨가) 가혹행위와 후임 폭행 등으로 영창에 다녀왔다"고 증언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도 박씨의 폭력은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를 때렸다는 말을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실제 박씨는 폭력 행위로 수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고, 관련 전과도 있었다.
그는 또 남들에게 강하게 보이기 위해 몸에 문신을 새기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이 무서운 사람이고 힘 있는 사람이라고 과시했다. 목 정면에 새긴 문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어릴 적에 생긴 얼굴 흉터까지 있었던 박씨는 '나는 강한 자'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박씨는 5년 전 순천으로 옮겨와 식당 주방장을 하며 정착했다. 지난 6월에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배달 전문 음식점을 차렸지만 장사는 시원치 않았다. 범행 한 달 전부터 영업난으로 휴업하며 생활고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결혼을 전제로 사귀던 여자친구와 말다툼도 잦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수차례 자해를 시도하는 등 반사회적인 분노도 쌓여 갔다.
범행 당일 0시15분쯤 경주에 사는 박대성의 친형이 "동생의 극단적 선택이 의심된다"고 신고했고, 3분 후 경찰이 도착했다. 당시 박대성은 술을 마시고 가게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경찰과의 면담에서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관이 돌아간 후 20여분 만에 흉기를 들고 나가 살인을 저질렀다.
박대성은 경찰 조사에서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횡설수설했다. 그러면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거나 "공황장애가 있다"고 주장하는 등 범죄에 대한 반성보다는 심신미약을 내세우며 형량을 줄이려는 꼼수를 부렸다. 하지만 박씨가 관련 질환으로 진료받은 기록은 없었다.
지금까지 정황으로 보면 박씨의 범행은 '반사회적 성향에 의한 분풀이 살인'일 가능성이 높다.
평소의 폭력적인 성향, 경제적인 문제, 여자친구와의 다툼 등이 원인으로 작용해 술을 마신 후 분풀이 심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가게에서 흉기를 들고 나온 후에는 한참 동안 범행 대상을 물색했고, 그가 서성거릴 때 손님으로 인식한 택시기사가 창문을 열고 그와 대화를 나눌 때는 흉기를 허리춤에 감추고 허리를 숙인 채 "그냥 가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10대 여성인 남양이 지나가자 인적이 드문 장소까지 따라가 살인을 저질렀다. 범행 이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행동한 것을 보면 계획살인에 무게가 실린다.
경찰은 범행의 잔인성 등을 이유로 신상공개위원회를 열어 박씨의 이름·나이와 머그샷 얼굴 사진 등을 공개했다. 또한 수사를 통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묻지마 범죄'로 판단하고 살인 혐의를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우리 사회에서 묻지마 범죄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 묻지마 범죄는 총 22건 발생했다. 지난해 상반기(20건)보다 10% 증가한 수치다. 범죄유형별로는 상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살인과 살인미수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하다.
범인들은 20대(16명), 50대(15명), 30대(13명), 40대(12명) 순으로 나타났는데, 각 연령대에 고르게 분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 전과가 있는 경우가 39건(57.4%)으로 과반을 차지했지만, 초범인 경우도 29건(42.6%)이나 된다.
범행 장소는 길거리 등 공개된 장소에서 49건(72.1%)이 발생했다. 편의점·상가·쇼핑몰 등 공공 장소는 16건(23.5%)이었다. 어느 곳도 안전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주민 집중거주 시설인 아파트 단지도 예외가 아니다. 7월29일 서울 은평구의 한 아파트에서는 30대 남성 백아무개씨가 아무 이유 없이 같은 아파트 주민을 일본도로 살해해 충격을 줬다.
정부 관련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묻지마 범죄에 대한 국민 불안감이 커지자 CCTV 등 범죄 예방 기반시설 확충, 정신질환자 합동 대응 모델 확대, 자율방범대 활동 확대 지원 등 다각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든 돌발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묻지마 범죄', 이런 사람이 위험하다
지금까지 발생한 묻지마 범죄자들의 범행 동기는 정신병 등 개인적인 요인부터 경제적 어려움, 사회 불만, 실직, 채무 압박 등 다양하다. 묻지마 범죄자 상당수는 고립된 생활을 하거나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사회와 소통을 끊은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분풀이 대상을 찾게 되는데, 이것이 묻지마 범죄로 연결되는 것이다.
우선 '정신이상자'들이 경계 대상 1순위다. 물론 자신의 주변에 있는 정신이상자들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당사자나 그 가족들이 이런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 후에야 '정신병력'이 알려지게 된다.
우리 주변에서 비정상적인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는 사람들도 조심해야 한다. 환청이 들린다며 떠들고 다니는 사람, 아무 이유 없이 이웃에게 욕하거나 폭력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 반복적으로 괴성을 지르는 사람, 극도의 경계심을 표출하는 사람 등이다.
이런 사람들은 특별경계 대상이다. 아파트 관리실 등에 신고해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거나 가급적 마찰을 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사회 불만을 극도로 표출하거나 "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등 범행을 고지하는 사람도 잠재적인 위험 인물에 속한다.
학교·공원·아파트·지하철역 등을 비정상적으로 배회하는 사람도 의심해야 한다. 길을 가는데 누군가가 내 동선을 계속 지켜본다거나 뒤를 따라올 때는 위험 신호다. 이런 때는 빨리 동선을 바꾸거나 가까운 편의점 등 안전한 실내로 들어가야 한다. 밤길을 갈 때는 인적이 드문 골목보다는 사람이 많은 대로변을 택해야 한다. 위험을 느끼지만 신고할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가족 등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 위치를 알리거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만약 길을 가는데 누군가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걸어간다. 이때 뒤를 따라오는 사람도 똑같이 방향을 바꾸면 위험하다고 판단해야 한다. 혼자 외진 곳을 다니는 경우에도 범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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