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인생] “법 따라 살아온 20여년…이젠 ‘벌 따라’ 새 인생”

황지원 2023. 4. 26.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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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인생] (6) 검사 은퇴 후 한국꿀벌생태환경보호협회 만든 송인택 변호사
지검장 퇴직 후 주말농부 변신
산에 밀원수 심고 벌통 설치해
5년간 전국 돌며 적임지 찾아
해외논문 뒤지며 나무도 수입
지난해 협회 세워 숲조성 운동
꿀벌과 꿀샘 식물 중요성 알려
목장시범단지 만들어 생태실험
취지 공감한 대기업들 후원도

‘꿀벌이 사라지면 전세계 경제 손실이 최대 164조원 발생한다.’

농작물 수분을 담당하는 꿀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아일랜드·영국 연구팀이 내놓은 연구 결과다. 누구보다 이 위기를 절감하며 충북 영동에서 꿀벌을 되살리기 위해 앞장서는 사람이 있다. 24년간 검사로 일하다 2019년 울산지검장을 끝으로 퇴직한 송인택 변호사(60)다. 그는 평일엔 서울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주말에는 산에 가 나무를 심고 벌을 돌본다. 평생을 법조인으로 살아온 그가 어쩌다 벌 생태에 관심을 두게 됐을까?

“젊었을 때부터 ‘65세까지만 법으로 먹고살고 그 이후엔 농민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살았는데, 아무 준비 없이 하루아침에 농부가 될 순 없겠더라고요. 일과 병행할 방법을 고민했죠. 밭농사는 손이 많이 가고, 공무원은 농지를 취득하지 못해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양봉이었어요.”

송인택 변호사가 꿀벌목장 시범단지 앞에서 꿀벌을 위한 밀원숲 조성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동=김원철 프리랜서 기자

대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송 변호사는 학창 시절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왔다. 법조계에 몸담으며 농업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왔지만 50세가 되던 해 구체적인 귀농 계획을 세웠다. 그는 산에서 벌을 키우기로 마음먹고 적합한 곳을 찾아 5년간 전국을 다녔다. 그렇게 자리를 잡게 된 데가 영동에 있는 임야다. 높이가 500m로 높지 않고, 고향인 대전과도 가깝기 때문이다. 산지 취득비용이 만만찮게 들었을 터, 가족 반대는 없었는지 궁금했다.

“결혼 전부터 아내에게 ‘은퇴 후엔 농촌으로 간다’고 누누이 말했어요. 처음에는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했을 거예요. 임야를 사려고 하는데 말을 못 꺼내겠더라고요. 일단 계약금을 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땅을 안 사면 계약금을 다 잃게 된다’고 통보했죠. 그러니 뭐 어쩌겠어요.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받아 나머지 금액을 냈습니다.”

산을 사고 나서부터 밀원숲 조성을 위한 송 변호사의 노력이 시작됐다. 벌이 좋아하는 나무를 찾아 밤새워 해외 논문을 뒤지고, 캐나다 설탕단풍나무 등 외국산 나무는 직접 수입해왔다. 6년 동안 33㏊(10만평) 부지에 심은 나무는 5만그루에 달한다. 종류도 피나무·쉬나무 등 10가지가 넘는다. 주민들의 접근이 어려운 산 중턱에 벌통 10개가 있는 막사를 둬, 벌 수십만마리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쉽게 꿀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벌이 설탕물을 먹기보다 자연 그대로 벌이 자라길 바란단다.

“많은 사람들이 벌에게 설탕물을 먹여서 벌꿀을 생산해요. 양봉장 주변에 꿀샘 식물이 없으니까요. 꿀벌이 스스로 날아서 다양한 꽃을 찾아 생산한 벌꿀과 설탕물을 먹여 만든 벌꿀(사양꿀)이 비교되겠습니까? 천연 벌꿀에는 꽃에서 나온 무기질과 비타민이 들어 있죠. 또 꿀벌 멸종을 막기 위해선 건강한 먹이가 많이 생겨나야 합니다.”

그렇게 숲을 만들던 송 변호사는 혼자만 건강한 벌을 기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국에 밀원수 심기 운동을 펼칠 방법을 찾다 지난해 한국꿀벌생태환경보호협회를 세웠다.

협회는 3월 학산면 서산리의 꿀벌목장 시범단지에서 ‘밀원숲 가꾸기 행사’를 열어 언론과 참가자들에게 꿀벌과 꿀샘 식물의 중요성을 알렸다. 그는 자신이 가꾸는 임야에 ‘꿀벌목장 시범단지’라는 이름을 붙여 밀원수와 꿀벌이 공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생태 실험장’을 만들었다. 이에 공감한 대기업의 후원도 이어지고 있다.

밀원수 심기는 꿀벌만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 특히 임업인의 재정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 방치된 야산에 밀원숲을 조성하고, 이를 양봉업자에게 대여하는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게 송 변호사의 설명이다.

“23㏊ 산지에서 50년 동안 자란 나무를 다 팔아도 1700만원밖에 받지 못해요. 하지만 야산에 밀원수를 심어 양봉업자에게 빌려주면 임업인은 매달 임대료를 받을 수 있죠. 벌도 건강해지고, 양봉업을 하는 사람에게도 좋고, 국민은 고품질 꿀을 먹을 수 있으니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꿀벌목장 시범단지가 본보기가 돼, 전국에 밀원수 100억그루가 자라는 날을 꿈꾸고 있다는 송 변호사.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그는 이번 주말에도 한그루의 밀원수를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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