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억압과 싸우는 사랑은 힘이 세다, <마인>의 백미경

한겨레21 2023. 3. 1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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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S][22writers] <마인> 의 백미경 작가 인터뷰
이해와 포용, 위로와 연결의 세상을 빚는 창조자
백미경 작가가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백미경이 조형한 세계는 ‘힘의 분배’로부터 주요 골자가 완성된다. 한 사람에게 너무 몰려버린 힘은 오히려 그 사람을 옥죄며 자신을 감추게 하지만, 비로소 그 힘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힘쎈여자 도봉순>) 타인의 모든 힘을 빼앗아가는 게 목적인 사람과 제 몫만을 정당하게 요구하는 사람의 아슬아슬한 힘싸움은 ‘동경’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사랑으로 조금씩 불식되다 안정된 땅 위에 착지한다.(<품위있는 그녀>) 또 서로의 힘을 경계하고 견제하며 흔들리는 외줄타기를 타던 이들은 지난한 시행착오 끝에 균형점을 찾아 완전한 하나를 이루기도 한다.(<마인>)

여느 작품에서 힘은 위계이자 권력, 관계적 장악의 근간이지만 백미경 세계관에선 그 정의가 조금 다르다. 이해하는 힘, 포용하는 힘, 연결하는 힘, 하나 되는 힘. 극 안에 포진된 소외계층이나 자기만의 싸움을 홀로 이어가는 이에게 그는 세계관 창조자로서 힘을 분배하고 위로하고 다독인다. 어떤 슬픔도 그를 만나면 무력해지는 이유기도 하다. 그의 작품이 좇아온 연대의 가치와 잠재력, 다정하고 인내심 높은 사회로의 열망을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다. 3월5일, 서울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의 이야기가 태동하는 공간에서 긴 이야기를 나눴다.

‘개구멍’ 반성문의 애독자가 된 선생님

―처음 드라마작가로서 자질을 발견한 때는 언제인가요.

“초등학생 때부터 글짓기상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일찍부터 ‘내가 글쓰기에 소질이 있나보다’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작가가 되고 싶진 않았어요. 어린 저에게 문인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미지를 줬거든요. 그러다 고등학생이 됐는데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20분이 걸리는 거예요. 중간에 철조망을 넘어가면 5분이면 도착하는데. 그래서 제가 직접 개구멍을 만들어서 다녔어요. 근데 다른 친구들이 실크로드처럼 통행하더니 구멍이 커진 거예요. 결국 선생님의 색출 작전 끝에 잡혀 1년 동안 반성문을 썼어요. 나중엔 정말 쓸 게 없어서 제 일대기를 담기 시작했어요. 당시 학년주임 선생님이 고3 국어 과목 선생님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제 반성문을 기다리시더라고요.”

―선생님이 독자가 돼버린 거네요!

“맞아요. (웃음) 하루는 선생님이 저를 불러 ‘꿈이 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없다고 했죠. 그랬더니 작가 한번 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처음 타인의 눈으로 제 재능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그렇게 2000년 제1회 MBC 프로덕션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아요. 중간에 공백이 있다가 2012년 제10회 경상북도 영상콘텐츠 시나리오 공모전 장려상, 2013년 SBS 극본공모전 대상, 2014년 MBC 극본공모 미니시리즈부문 우수작 등 수상을 이어갑니다. 3년 연속 공모전 수상을 한 이력이 이색적이에요.

“누구는 제가 공모전에 취미로 낸 줄 알아요. 하지만 왜 그랬겠어요. 그만큼 공모전에 당선되고 나서도 작가 되기가 어려웠던 거예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백이 있겠어요, 아니면 도와주는 사람이 있겠어요. 게다가 지방에 사니까 서울에서의 정보 혜택도 누리기 어려웠죠. 공모전 말고는 답이 없었어요. 쉽게 말해 너무 가수가 되고 싶어서 <슈퍼스타K> <k팝스타> <프로듀스 101>을 매년 나간 거예요. 파죽지세로 돌진한 것 같지만 좌절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저는 인터뷰하거나 방송에 나가면 제 실패담을 주로 이야기해요. 저를 보고 많은 사람이 용기 내면 좋겠어요. 나이 들어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다시금 희망을 갖기 바라고요. 그게 제가 인터뷰 자리에 서는 이유예요.”

―중간에 잠시 공백이 있어요. 그때 작가 활동이 아닌, 영어학원을 운영하셨죠.

“2000년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했는데 제 작품이 표절된 거예요. 꿈을 좌절하고 대구 내려와서 학원을 했는데 그게 잘됐죠. 제가 잘 가르쳤어요. 아이들하고도 소통을 잘했거든요. 학생들과 친해지려고 같이 <스타크래프트>랑 <디아블로> 온라인게임도 하고요. (웃음) 그때의 경험으로 <힘쎈여자 도봉순>의 안민혁(박형식 분)이 게임회사에 다니는 설정을 하게 됐어요. 저는 늘 본질과 비본질을 생각해요. 그때 제 본질은 돈 버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가까워지는 것이었어요. 성적 낮은 아이들도 제가 가르쳤죠. 오히려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원장 직강을 못 들었어요. 학원이 더 잘될 수도 있었는데 제가 선택하지 않은 거예요.”

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의 홍보 스틸컷. JTBC 제공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저 웃음소리를 지켜주고 싶어. 나 혼자서 이 세상을 구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다시 돌려받은 이 힘 진짜 제대로 쓰고 싶어.” -<힘쎈여자 도봉순>

도봉순, ‘힘쎈여자’ 아닌 약자 이야기

―그때의 결정에 자부심과 자긍심이 느껴져요.

“그게 제 철학이고 가치관이니까요. 저는 멋지고 뛰어난 사람보다 사람들이 관심을 주지 않는 약자에게 더 마음이 가요.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없다는 생각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를 담아내려 해요. <품위있는 그녀>의 박복자(김선아 분)도 그랬고, <마인>의 강자경(옥자연 분)이 그랬죠.”

―아무래도 그러한 연민과 이해가 작가님이 글감을 찾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큰 힘이 되는 거겠죠.

“맞아요. <힘쎈여자 도봉순>도 힘센 여자보다는 약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봉순이(박보영 분)가 키가 작고 고졸이잖아요. 언더도그죠. 그런데 세계를 정복하는 고졸인 거예요. 그건 저에게 아주 큰 의미가 있어요.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거든요. <품위있는 그녀>에서도 어린 시절부터 가난했던 여자의 비루한 삶을 그리는 시선이 있고, <마인>에서도 성소수자 이야기가 나오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세상이 좋아요.”

―<힘쎈여자 도봉순>이 방영된 2017년에는 정통 로맨스가 각광받던 시기였어요. 여성 히어로의 등장에 많은 시청자가 환대했는데요. 시기적으로 드물고 낯선 소재를 꺼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가 일을 다시 하기 전에 한동안 학원을 운영했잖아요. 심지어 잘됐고요. 그래서 경제적 안정감이 있었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작가는 돈이 없으면 하기 싫은 걸 쓰거나 좇아야 해요. 협상 테이블 앞에서 심적으로 비굴해지기도 하고요. 그러니 방송사 입장에서 저는 벤츠를 타고 다니는 신인 작가인 거예요. 마음의 여유가 있었죠. 그때만 해도 방송사 사람들이 신인 작가에게 모욕을 주던 좋지 않은 관습이 있었어요. 일종의 갑질이죠. 저는 그런 것에 일절 끄떡도 하지 않았어요. 그 덕에 남들이 바라는 것보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제가 잘하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죠. 누군가는 이 악습을 해결해야 환경이 변한다는 책임감도 있었고요. 그래서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

―과거 드라마를 다시 보면 2023년 시점으로 달라 보이는 지점도 있어요. 예를 들어 <힘쎈여자 도봉순>의 경우, 철문도 쉽게 뜯어내는 괴력을 지닌 봉순이가 친구의 납치 사실을 알고 가장 먼저 한 건 남자주인공에게 찾아가 도와달라고 한 거였어요.

“남자주인공에게 의존한다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죠. 오히려 저는 그게 협업이라 생각해요. 안민혁은 재산도 많고 똑똑한 친구예요. 브레인이죠. 그런데 봉순이는 머리가 나쁜 대신 힘이 아주 세요. 그래서 둘이 공동의 목표를 두고 공조해나가는 거예요. 저는 상생과 병립의 가치를 믿기에 그 점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백미경 작가의 작업실.

이루지 못한 꿈을 향한 욕망

―작가님은 극 중 피피엘(PPL·제품 광고)을 자연스레 배치하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어떤 작품은 과도한 피피엘 때문에 조명되기도 해요. 이 과정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 같아요.

“드라마는 굉장히 많은 사람의 이권이 합쳐져 있어요.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죠. 사실 큰 제작비를 쉽게 받으면 문제가 없을 텐데 현실적으로 어려우니까요. 그래서 저는 정말 협조를 잘하는 편이에요. 제가 비즈니스를 오래 했기 때문에 피피엘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가능하면 제작사를 위해 피피엘을 다 넣어주려 하죠.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도외시할 순 없으니까요. 다만 피피엘도 규제가 있어 일정 기준 이상은 못 넣어요. 안 그러면 광고 드라마가 될 테니까요. 제가 가장 잘하는 스토리텔링과 피피엘의 기본 목적을 자연스레 합치하려 해요. 본질만 흐트러지지 않으면 괜찮아요. 중요한 건 그거예요.”

―<품위있는 그녀>에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기묘한 관계가 등장해요. 우아진(김희선 분)은 박복자가 위로받고 싶고 닮고 싶은 여성으로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 둘은 남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에요. 적도 아니지만 완전한 아군도 아니고요.

“쓰기 쉽지 않았어요. (웃음) 우리나라 드라마는 전형적인 도식을 갖고 있잖아요. 내 편 혹은 네 편. 그래서 시청자 반응도 응원하거나 응징하기 바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죠. 그런 현실에 박복자라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던지고 싶었어요. 사실 누구나 마음속에 박복자가 있어요. 이루지 못한 꿈이나 가지지 못한 걸 욕망하죠. 그런 욕망이 없다면 우리가 어떤 동력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어요. 스스로 가장 잘 썼다고 생각한 부분은 우아진이 마음공부를 하며 유언장을 남기는데, 박복자가 죽은 뒤 그의 유품에서 우아진의 유언장이 발견되는 장면이에요. 그 유언장 내용도 결국 박복자의 삶과 죽음을 은유하거든요. 두 사람이 그렇게 연결되죠. 제가 봐도 잘 썼더라고요. (웃음) 사실 <품위있는 그녀>는 초반 편성이 잘 잡히지 않았던 작품이에요. 중년 여자 둘이 나오는 드라마를 누가 보겠냐는 업계 반응이 대부분이었거든요. 하지만 다행히도 시청자 반응이 좋아서 그 뒤로 드라마 시장에 여성 서사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었죠.”

“모든 것을 잃은 나조차도 사랑할 수 있는 나 자신. 그거예요. 마인.” -<마인>

여성의 연대, 인간의 품위

―<품위있는 그녀>는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한 이야기예요. 영풍제지를 모티브로 했죠.

“영풍제지 직원들을 만나 인터뷰도 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어요. 아무래도 내부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해주지 않거든요. 영풍제지 이야기는 워낙 기사에 많이 나오고 온라인에도 정리된 글이 많아 거기서 비롯한 이야기를 따온 거죠. 하지만 둘이 완전 다른 이야기이긴 해요. 박복자는 훨씬 더 입체적인 캐릭터에서 시작했으니까요. 박복자와 우아진, 다른 두 여자를 한데 연결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영풍제지는 소재와 배경으로서 흥미를 느낀 거예요. 배우들이 캐릭터을 잘 연기해줬죠. 김선아가 아니었다면 박복자를 누가 소화할 수 있었을까요.”

백미경 작가의 작업실 벽에 걸린 드라마 <날 녹여주오>의 포스터. 오른쪽 벽면에 작가의 작품별 스케줄과 작품 정리도가 빼곡하다.

―대본 작업을 할 때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며 쓰잖아요. 내 그림과 가장 일치했던 장면은 무엇인가요.

“4회 엔딩에 박복자와 우아진이 처음으로 붙어요. 비가 내리고 천둥도 치는데 폭주하는 박복자에게 우아진이 ‘여기서 멈춰!’ 하고 소리를 지르고 원하는 게 뭔지를 물어요. 그리고 박복자는 이 집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갈 거라고 대응하고요. 둘의 긴장감과 박복자의 표정, 우아진의 목소리까지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연출까지 완벽했다고 생각해요.”

―<품위있는 그녀>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게 <마인>이에요.

“처음부터 <품위있는 그녀2>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에서 시작했어요. 같은 베이스와 같은 소재지만 조금 더 확장된 버전으로 쓰고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제 한계를 분명하게 느꼈던 작품이라 아쉬워요. 결과적으로 불륜을 다루게 되고 혼외자가 나오잖아요. 다시 쓴다면 그렇게 안 쓰고 싶어요. 모성을 조금 더 부각하고 싶었어요. 모성을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결의 맥락인데요, 드라마에서 키운 자식에 대한 모성이 나타나잖아요. 서희수(이보영 분)는 자신이 낳지 않은 자식을 잘 키워서 세상에 내보내겠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고요. 이게 일반적 시선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거든요. ‘제 자식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싶잖아요. 강자경도 그 육아를 함께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정서현(김서형 분)도 자기만의 모성을 보여주죠.”

―그래서일까요. 편견에 맞서 싸워나가는 네 여성(미혼모, 새어머니, 성소수자, 빈곤층 여성)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이 바로 희수가 피를 흘리며 유산할 때예요.

“모두가 아이를 잃은 서희수를 감싸는 장면은 제가 <마인>에서 제일 공들여 쓴 장면이기도 해요. 여자가 여자를 따뜻하게 감쌀 수 있는 포인트이기도 하죠. 가장 아픈 일이잖아요. 강자경도 거기서 같은 여자로서 엄청 아파하고 연민하고요.”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용기

―특히 성소수자를 섬세하게 다룬 것으로 호평이 잇따랐어요. 성소수자가 현실과 타협하는 것과 그로 인한 내적 갈등을 세세히 그리다보니 오직 극을 위해 예민한 사안을 차용했다는 느낌을 주진 않아요.

“그렇게 쓰지 않으려 정말 노력했어요. 또 다른 사랑의 형태로서 조심스레 다루려 했어요.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있잖아요. 그런데 드라마가 조명하는 건 대부분 20대 남녀의 사랑이에요. 이상하지 않나요? 당장 이 아파트를 탈탈 털어도 50가지의 헤테로(서로 다르다) 연애담을 들을 수 있을 텐데. 저는 편견, 선입견, 차별 등과 싸우는 사랑을 더 많이 그리고 싶어요. 그래서 <힘쎈여자 강남순>(2023년 방영 예정)에도 노인의 사랑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데,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사랑이거든요. 많은 시청자가 원하는 게 아닐지라도 소수의 사랑을 말하려 해요. 왜 노인들이 트로트 방송만 보고 싶다고 생각하나요? 그들이 주인공이 된, 사랑 이야기도 보고 싶을 수 있잖아요. 저는 돈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아요. 아무도 하지 않은 것, 시청률이 잘 안 나올까봐 머뭇거리는 것을 먼저 시도해서 길을 열어주고 싶어요. 다른 작가들을 위한 일이고 이 일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 때문이기도 해요.”

―문득 궁금해요. 이렇게 많은 글을 써온 작가님에게 가장 글 쓰기 편안한 환경은 어떤 상태인가요. 보통 작가는 올빼미족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아우, 그럼 오래 일 못해요.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 그때 에너지가 가장 좋아요. 다른 직장인처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루틴이 가장 맞아요. 밤 11시에는 자야 하고요. 주말에는 무조건 쉬죠. 해의 순환에 따라 일해야 몸이 건강해요. 몸이 건강해야 글이 잘 써지고요. 신이 인간에게 햇빛을 줬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건강을 위한 필수 요소인데 심지어 공짜잖아요. 잘 이용해야죠.”

글 이자연 <씨네21> 기자·사진 백종헌 <씨네21> 기자

백미경 작가. 백미경 제공

나만의 글감을 얻는 방법

사회문제와 다양한 가치관, 소수를 위한 이야기를 다루는 백미경 작가는 어디서 흥미로운 글감을 찾을까. 신문을 통해 세상의 다양한 소식을 많이 접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하는 행동은 바로 상상이다.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으면 우리의 문화유산은 어떤 방식으로 바뀌었을까요? 백설공주가 일곱 난쟁이 중 잘생긴 애랑 눈이 맞는다면? 막상 왕자를 만났는데 상당히 폭력적이라면?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건 자의였을까 타의였을까? 이런 식으로 상상해요.” 백미경 작가는 세상이 참이라고 내세운 명제를 무조건 옳다고 믿지 않고, 그 의미를 비틀어내며 새로운 가상세계를 계속 구축한다.

에필로그

백미경 작가의 드라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힘쎈여자 도봉순>을 꼽았을 때, 그가 건넨 첫 번째 질문은 “기자님에게 <힘쎈여자 도봉순>은 로맨스예요, 히어로물이에요, 코미디예요?”였다. 어떤 점이 좋았는지 물어보는 질문이 돌아올 줄 알았건만 완전히 예상을 비껴갔다. 그런데 맞는 말이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로맨스이자 히어로물이고 코미디다. 어디 그뿐일까. 마지막 작품 <마인>도 미스터리 스릴러이자 블랙코미디에 로맨스, 추리물이기도 하다. 약간의 하이스트 무비적 요소까지. 한 작품에 여러 색깔을 담는 것이 요즘 트렌드라 하지만, 백미경 작가는 더더욱 색다른 장르적 믹스 앤드 매치로 유연한 조합을 이뤄내는 데 능하다.

그러니 그는 작가이지만 조향사와 화학공학자 사이 어드메쯤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긴다. 무슨 재료를 더할 때 어떤 화학반응이 올지 예리하게 예측하고 과감하게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현실 속 변화를 이끌어내는 지반이 되고 만다. 그가 작품으로 제시한 세상을 간접경험한 시청자가 현실에 돌아와 낙차를 느끼며 더 좋은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작품 목록

<힘쎈여자 강남순>(JTBC, 2023년 방영 예정)

<마인>(tvN, 2021년):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 진짜 자기 것을 찾아나가는 여성의 이야기,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날 녹여주오>(tvN, 2019년): 24시간 냉동 인간 프로젝트에 참여한 남녀 주인공이 20년 뒤 깨어나 마주한 세상의 이야기를 다룬다.

<우리가 만난 기적>(KBS, 2018년): 평범한 가장이 이름과 나이가 같지만 정반대의 삶을 사는 남자의 인생을 살게 된 휴먼 멜로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JTBC, 2017년): 가감 없는 욕망 앞에서 엇갈린 두 여성의 삶을 다룬다. 동경, 위로, 연민, 연대 등 다양한 키워드가 펼쳐진다.

<힘쎈여자 도봉순>(JTBC, 2017년): 여성 히어로 드라마. 모계 중심으로 내려오는 괴력을 지닌 봉순이 삶의 모험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TV 토크쇼에 나와 백미경이 가장 애정이 깊다고 말한 작품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은동아>(JTBC, 2015년): 첫 장편 드라마.

<강구 이야기>(SBS, 2014년): 단막극. 백미경 작가의 데뷔작. 영덕 강구항을 배경으로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k팝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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