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8) 기술이 다시 쓰는 인간의 정의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기술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거울이다. 인류의 역사는 흔히 도구의 역사라고 말한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도구를 통해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의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는 보통 기술을 인간의 의지를 실현하는 편리한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나 기술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술은 우리가 몸을 이해하는 방식, 마음을 설명하는 언어, 심지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가장 오래된 질문에까지 깊숙이 개입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시계와 증기기관, 컴퓨터와 AI는 단지 생활을 편하게 만든 발명품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각 시대가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틀이었다. 사람들은 늘 자신들이 만든 가장 정교한 기계를 통해 인간을 다시 해석해 왔다. 시계가 정밀했던 시대에는 인간의 몸이 기계처럼 보였고, 증기기관이 세상을 움직이던 시대에는 인간도 에너지를 태워 노동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컴퓨터가 등장하자 인간의 마음은 정보 처리 시스템처럼 설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생성형 AI, 휴머노이드 로봇, 자가 추적 기술은 다시 묻고 있다. 인간의 고유성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은 바로 그 질문을 따라가려 한다. 근대의 기계론적 인간관에서 출발해, 산업 시대의 에너지적 인간, 정보화 시대의 통신 시스템 같은 마음, 그리고 AI 시대의 데이터화된 자아와 포스트휴먼의 문제까지.

시계: 자연에서 떨어져 나온 기계적 신체
이 변화는 곧 인간 이해의 변화로 이어졌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의 몸을 영혼과 분리된 하나의 정교한 기계로 보았다. 그의 눈에 신체는 태엽과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는 시계와 비슷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그 시대의 가장 정교한 기계가 인간의 몸을 설명하는 모델이 된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몸을 살아 있는 신비로운 유기체라기보다, 잘 조정되고 정확하게 작동해야 하는 구조물로 보기 시작했다. 이런 시각은 개인의 신체를 넘어서 사회 전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간은 점차 거대한 사회 기계의 한 부품처럼 이해되었고, 행동은 더 세밀하게 표준화되었다. 시간의 정밀한 측정은 노동의 정밀한 통제로 이어졌다.
증기기관: 에너지로 읽히는 열역학적 신체
이 시대에는 기계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표현을 썼다. 기계가 “피로하다”, “과열된다”, “폭주한다”라고 말했다. 흥미롭게도 반대로 인간 역시 기계의 언어로 설명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몸은 출력, 효율, 연료 소비, 대사 같은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노동하는 몸은 하나의 열역학적 시스템이 되었다.
이 변화는 단지 학문적 설명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가치의 기준을 바꾸었다. 사람은 더 이상 얼마나 깊이 사유하는가로만 평가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바깥으로 쏟아낼 수 있는가, 얼마나 생산적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산업 자본주의는 이 시각을 제도화했다. 피로는 개인의 고통이기보다 더 관리해야 할 비용이 되었고, 신체는 돌봄의 대상이기보다 최적화의 대상이 되었다.
컴퓨터: 정보 처리 시스템이 된 마음
수학자이자 사상가인 노버트 위너가 주창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는 인간과 기계를 같은 틀 안에 묶었다. 그 틀은 제어와 통신이었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더는 단지 에너지를 태우는 엔진이 아니다. 인간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하고, 다시 환경으로 되돌려 보내는 시스템이다. 삶은 피드백의 연속이 되고, 지능은 정보 흐름의 정교한 조정 능력으로 이해된다.
이 변화는 분명 강력한 통찰을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잃어버린 것도 있었다. 컴퓨터라는 거울은 인간 정신에서 정서와 맥락, 모순과 침묵의 영역을 잘 드러내지 못했다. 기계가 잘 이해하는 것은 논리와 규칙, 신호와 연산이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도 그런 요소들로 환원되기 쉬웠다.
우리는 이 시기에 인간의 뇌를 회로망에 비유했고, 사고를 일련의 정보 처리 과정으로 설명했다. 물론 그런 설명은 많은 유용한 성과를 낳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은 점차 시스템의 한 마디, 정보가 지나가는 경로, 조정 가능한 노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AI 시대: 데이터가 된 실존, 흔들리는 인간의 경계
이제 기술은 바깥에서 인간을 돕는 도구가 아니라, 안쪽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를 다시 설계하는 장치가 되고 있다.
생성형 AI: 창조자에서 편집자로 이동하는 인간
이 질문 앞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가치를 성급히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인간다움의 자리를 다시 찾아야 한다. 이제 인간의 고유성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산하는 능력에만 있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방대한 정보와 문장,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는 무엇이 중요한지 분별하고, 무엇을 선택할지 판단하며, 그 결과에 책임지는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이 점에서 인간은 전지적 창조자라기보다 최종 편집자에 가까워진다. 기계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중 무엇이 진실에 가까운지,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공동체에 유익한지 묻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휴머노이드 로봇: 관계의 본질을 다시 묻다
인간과 비슷하게 반응하는 기계에 공감하고 돌봄을 느끼는 과정에서, 현대인은 큰 변화를 겪는다. 상처받기 쉽고 복잡하며 피곤한 진짜 사람과의 관계 대신,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항상 나에게 맞춰주는 편안한 기계와의 유대를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간이 맺어온 관계의 정의를 뿌리째 흔드는 도전이다. 자칫 인간관계의 본질이 깊은 마음의 교류가 아니라, 그저 상대방의 즉각적인 맞장구나 그럴듯한 반응 정도의 얕은 수준으로 떨어질 위험을 보여준다.
자가 추적: 측정되는 삶, 관리되는 자아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고전적 선언은 “나는 기록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이터적 확신으로 대체된다. 수면의 질, 심박수, 심지어 감정 상태까지 모조리 수치로 환원되면서, 현대인은 내면을 살피는 주관적 직관을 기계의 분석에 내맡기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자아는 이제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관리하고 효율을 높여야 할 데이터 세트이자 최적화 프로젝트로 전락하는 실존적 역설에 직면해 있다.

기술은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고 있나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히 “이 기술은 얼마나 편리한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이 기술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드는가.
더 인내하는 사람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더 즉각적인 반응만 원하는 사람으로 만드는가. 더 책임지는 존재로 만드는가, 아니면 판단을 기계에 넘기는 존재로 만드는가. 더 깊이 사랑하게 하는가, 아니면 더 쉽게 대체하게 하는가.
AI 시대에 인간다움의 마지막 보루는 의외로 완벽함이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인간의 유한성, 몸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 상처받고 책임지는 능력, 고통 앞에서 비합리적으로라도 공감하는 마음에 있을 수 있다. 알고리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결정이 남긴 상처를 가슴에 품고 오래 괴로워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시스템은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도덕적 결단은 여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기계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하지만 거울은 얼굴을 보여줄 뿐, 삶의 의미를 대신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손현주/전주대 창업경영금융학과 교수(미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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