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조원 실탄 확보해 반격 나선 영풍·MBK, 고려아연 품을 수 있을까
(시사저널=송응철 기자)
영풍가(家) 경영권 분쟁이 점입가경이다. 최근 장형진 영풍 고문과 영풍이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MBK파트너스와 함께 고려아연 지분 공개매수에 나서면서 양측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고려아연은 MBK파트너스를 '약탈적 투기자본'으로 규정하며 반발하고 있다. 여기에 장 고문 측은 MBK파트너스와의 연합이 고려아연 경영 정상화를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맞서고 있다.
고려아연이 '분쟁의 장' 된 배경은?
영풍그룹의 소유 구조는 재계에서도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최씨와 장씨 두 집안이 그룹을 함께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풍그룹은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1949년 공동 설립한 이래 70년 이상 두 집안의 공동경영 체제가 유지돼 왔다. 현재도 전자·비철금속 부문은 장씨 일가가, 아연제련·정련 및 합금 제조 부문은 최씨 일가가 경영을 담당하고 있다. 고려아연 역시 두 집안이 함께 경영했다. 최윤범 회장의 부친인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은 고려아연 경영과 관련한 대소사를 장 고문과 세세하게 논의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고려아연이 분쟁의 중심에 선 까닭은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비철금속제련 부문 세계 1위인 고려아연은 영풍그룹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회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려아연은 장씨 일가가 소유하고, 최씨 일가가 경영하는 구조로 운영됐다는 점이다. 최씨 일가가 고려아연을 성장시켜도 그 결실 대부분은 장씨 일가가 가져가는 구조였던 셈이다.
'한 지붕 두 가족 경영' 체제는 최 회장이 고려아연 회장에 취임한 2019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풍그룹 내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최 회장은 장 고문과 몇 차례 상견례만 가진 뒤 왕래를 끊었다. 여기에 2022년 최창걸 명예회장이 코마(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면서 두 집안의 소통 창구는 사실상 사라졌다. 지금도 두 집안을 연결하는 메신저나 중재자는 부재한 상황이다.
포문은 최 회장이 먼저 열었다. 미국에서 수학한 최 회장이 제3자 유상증자, 자사주 교환 등을 통해 지분율을 높이려 한 것이다. 고려아연은 2022년 8월 한화그룹 미국 계열사인 한화H2에너지USA를 대상으로 제3자 유상증자를 단행해 우호세력을 확보했다. 당시 한화H2에너지USA는 4717억원을 투자해 고려아연 지분 5%를 취득했다. 최 회장과 미국에서 동문수학했던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힘을 보탠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해에는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가 공동 설립한 해외 법인 HMG글로벌을 상대로 5272억원 규모의 신주(5%)를 발행하기도 했다.
고려아연 자사주(6.02%)도 우군 확보에 활용했다. 고려아연은 자사주 1.2%를 한화그룹 지주사인 한화 자사주 7.3%와 교환했고, LG화학에도 자사주 1.97%를 넘기고 이 회사 자사주 0.47%를 받았다. 또 글로벌 원자재 트레이딩 기업 트라피규라(1.5%)와 한국투자증권(0.8%), 모건스탠리(0.5%) 등에 자사주를 매각하기도 했다. 자사주가 타사로 넘어가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는 점을 이용해 다수의 기업을 우군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영풍이 MBK와 연합한 이유는?
이때부터 장 고문과 최 회장의 관계는 서서히 금이 갔다. 다만 장 고문은 최 회장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봐온 아들뻘인 최 회장과 각을 세우는 모습이 외부에 노출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1946년생인 장 고문은 올해 78세다. 1975년생인 최 회장(49세)과 29살 차이다. 영풍 경영진도 대응을 만류했다. 지분율 차이로 최 회장이 사용할 카드가 많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분쟁 초기에 장 고문과 영풍 등 장씨 집안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31.02%로, 최씨 일가(15.35%)의 두 배에 가까웠다.
그러나 장 고문 측의 위기감은 높아졌다. 최 회장이 유상증자와 자사주 교환·매각을 통한 우군 확보로 고려아연 지분율을 높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 고문이 본격적인 대응을 고려한 시점은 올해 3월 주주총회 시즌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최 회장과 고려아연의 압박이 거세졌다. 특히 고려아연의 서린상사 경영권 강탈과 영풍 황산 취급대행계약 갱신 거절은 사실상 영풍의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실제 고려아연은 지난 3월부터 서린상사 경영권 확보에 나섰다. 서린상사는 그동안 고려아연과 반대로 최씨 집안이 소유하고, 장씨 집안이 경영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고려아연은 이런 관행을 무시하고 이사회 장악에 나섰다. 그 결과 지난 6월 장씨 일가 3세인 장세환 전 대표가 서린상사 대표이사에서 밀려나면서 이 회사 경영권은 최씨 일가로 넘어갔다. 이로써 영풍은 비철금속 판로는 물론 고려아연과 공동 판매를 통해 누려온 '가격 협상력'도 잃게 됐다.
고려아연은 또 지난 4월 영풍에 황산 취급대행계약 종료를 통보하기도 했다. 영풍은 2000년부터 경북 봉화군 석포제련소에서 생산된 황산을 온산항으로 수송하는 과정에서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의 황산 탱크와 파이프라인을 유상으로 이용해 왔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황산 취급대행 거절로 온산항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황산 수출길이 막힌다. 사실상 석포제련소 운영이 불가능해지는 셈이다.
특히 지난달 고려아연의 4000억원 규모 자사주 매입 발표는 MBK파트너스와 손잡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최 회장이 고려아연이 매입한 자사주를 다른 기업 자사주와 맞교환하는 등의 형태로 우군 확보에 나서게 되면 장 고문의 입지가 크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장 고문은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를 위한 자금줄 확보에 나섰다.
장 고문은 극비리에 MBK파트너스와 접촉해 협업을 결정했다.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를 위한 충분한 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백기사'는 MBK파트너스가 유일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고(故) 박태준 포스코 초대 회장의 넷째 사위인 김병주 회장이 2005년 설립한 MBK파트너스는 약 40조원의 자금을 운용하는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다.
그 결과 영풍과 MBK파트너스가 9월13일 약 2조원을 투입해 고려아연 지분 약 7~14.6%를 공개매수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공개매수가 계획대로 완료될 경우 MBK파트너스와 영풍의 고려아연 지분은 47.75%로 의결권 있는 지분의 과반을 확보하게 된다. 이 경우 장씨 집안은 최씨 집안과의 지분 다툼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장 고문과 MBK의 공개매수 목표는?
고려아연은 즉각 반발에 나섰다. 장 고문이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침탈하기 위해 약탈적 투기자본인 MBK파트너스와 손을 잡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장 고문 측은 MBK파트너스와의 연합이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를 위한 고육지책이라는 입장이다.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한 고려아연의 압박으로 열세에 몰린 상황에서 경영권 확보를 위해서는 살을 내어주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장 고문 측은 공개매수 목표가 '고려아연 CEO 교체를 통한 경영 정상화'라고 설명했다. 최 회장이 자신의 경영권 강화와 회사 사유화를 위해 전횡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고려아연의 기업 가치가 크게 하락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장 고문 측은 최 회장의 전횡 근거로 '묻지마 식' 무분별한 투자를 들었다. 최 회장은 고려아연 회장 취임 이후 '트로이카 드라이브'라는 기치 아래 이차전지와 수소, 재활용 등 신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장 고문 측은 최 회장이 주도한 투자처 38곳 중 30여 곳에서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폐전자제품 재활용업체 이그니오홀딩스 인수가 대표적인 사례다. 고려아연은 2022년 이그니오홀딩스 지분 100%를 5819억원에 인수했다. 그해 11월 이그니오홀딩스가 공시한 재무제표에는 자본금과 자본총계가 각각 1100만원과 –18억원,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이 각각 28억원과 –47억원으로 기재됐다. 완전자본잠식에 빠진 기업 인수에 수천억원의 거액을 투자한 셈이다.
원아시아파트너스에 대한 투자도 석연치 않다고 지적했다. 고려아연은 최 회장의 중학교 동창인 지창배 회장이 설립한 원아시아파트너스에 약 5600억원을 투자했다. 거액의 투자 결정이었지만 이사회 승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렇게 투자된 자금 중 일부가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사건에 투입된 사실이 드러나 지창배 회장이 구속되기도 했다. 여기에 원아시아파트너스에 대한 투자에서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실제 지난 6월말 기준 총손실액은 1378억원으로 추정된다. 전체 투자금의 24.8%에 해당하는 규모다.
영풍은 이런 투자에 '의도'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투자 명목으로 유출된 고려아연 자금이 세탁돼 최 회장의 우호지분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영풍은 현재 법원에 고려아연의 회계장부 열람 및 등사 등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제출한 상태다.
한편, 최 회장은 장씨 집안의 공개매수 카드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 김동관 부회장과 회동하는 등 우호세력을 결집하고 있다. 현재 한화와 LG, 한국타이어 등이 최 회장에 대한 지지 의사를 직간접적으로 밝힌 상태다. 최 회장도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그는 9월19일 '고려아연과 계열사, 협력사 임직원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통해 "그들의 허점과 실수를 파악하고 대항해 이기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며 "많은 고마운 분들의 도움과 격려를 받아 계획을 짜낸 저는 이 싸움에서 우리가 이길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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